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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연재① 종교개혁의 선구자 ‘존 위클리프’
‘교황에의 저항’ 저서 통해 교황청을 공격
2017-10-13 20:48:33   인쇄하기
한국기독일보
 

중세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핀 주인공은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교수 존 위클리프(Jone Wycliffe, 1320-1384)이다

14세기 영국은 카톨릭교회가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할 때였다. ‘개혁의 샛별로 불리우는 위클리프는 당시에 카톨릭교회의 걸식 수도사들의 폐단을 공격해 걸식 수도원의 고위직에 의해 눈총을 받고 있었다. 걸식 수도교단들은 교황 정치를 떠받드는 주요한 기둥이었고, 그 결과 교황의 지원을 받아 특권적 존재로 활동하고 있었다. 

위클리프는 1374년 국왕의 신학고문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교황에 바치는 임직세 제도(사제로 임명되는 첫 해의 총수입 기부)와 교황의 임지보류권 남용의 폐단을 직접목도하게 되었다. 이 제도는 교황이 영국 국왕에 대하여 사실상 조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위클리프는 교황의 이러한 정치적 영향력이 자국에 미치는 데 대한 부당성을 역설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도 거스르는 일임을 천명하였다. 이유는 당시 교황청은 프랑스 아비뇽에 있었고 교황 역시 영국과 적대 관계에 있는 프랑스 왕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위클리프는 1370교황에의 저항이란 제목의 저서를 통해 교황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는 성경이 교회의 유일한 법칙이며, 진정한 교회는 교황이나 추기경을 중심한 것이 아니라, 예정된 자들의 전회중으로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며, 교황의 주장들은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악한 것이며, 교황자신의 구원도 일반사람들의 구원과 하등의 차이가 없으니 모든 기준은 그것이 복음에 부합하느냐 않느냐로 결정되는 것이지, 결코 교황자신이 무슨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청빈한 설교자들롤라드운동 전개

그는 그의 추종자들을 중심으로 청빈한 설교자들이라는 선교단체를 만들어 복음을 전했다. 이 선교단을 롤라드파(Rollards)’라 불렀는데, 처음에는 모두 카톨릭에서 사제로 임명된 신부로 구성되었다가, 후에는 평신도 설교자들도 많이 가담하게 되었다. 당시 성직자들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영국인들에게 이 롤라드 전도운동은 큰 호응을 얻었다. 그들은 사도적 청빈을 생활 모토로 삼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지팡이만을 짚고 둘씩 짝지어 다녔다. 이들은 화체설, 면죄부, 순례행각, 성직자독신제 등을 비판하고, 교황제도를 비 성경적이라고 규탄하였다.

롤라드파는 성경을 유일무이한 권위로 인정하고 신앙생활의 기준으로 삼았다. 모든 성도는 이 성경을 읽고 해석할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 교황의 권위보다는 성경의 권위가 더 높다며 기독교회의 법률은 오직 성경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위클리프는 가톨릭교회의 교리가 비성격적임을 선언하는 논문 12개를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그로부터 150여년 전에 제4차 라테란 회의에서 채택한 화체설을 부정하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마침 그때 영국에는 워트 타일러의 난이란 것이 발생했는데, 카톨리교회는 이를 위클리프의 주장과 관련시켜 그를 탄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으려했다. 이로인해 롤라드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 13815월에 일어난 워트 타일러의 난은 인두세에 불만을 품은 농민봉기이다.

컨터베리 대주교는 위클리프와 롤라드운동의 영향으로 농민폭동이 일어난 것이라고 위클리프에게 책임을 전가하였다.

그로인해 위클리프는 더 이상 옥스퍼드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위클리프는 그 시기 영어로 성경을 번역해 영국인들은 자국어(영어)성경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청빈한 설교자들은 다수가 체포되고 롤라드운동은 일단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1384년 위클리프는 죽었다. 위클리프 사후 당국은 1401년에 이단금지령을 발표하고, 1406년에는 반롤라드법을 공표하고 탄압을 계속했다. 이후 신성로마 황제 지기스문트가 피사계 교황 요한 23세의 동의를 받아 콘스탄츠에서 141411월 공의회를 개최했다. 공의회는 141554일 회의 도중 영국의 위크리프를 라틴어 성서를 영어로 번역했다는 이유로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 시체를 파내 불사르도록 결정했다. 그로부터 13년이 더 지난 1428년에 위클리프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 화형 시켰다

위클리프의 개혁정신은 영국 개신교의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후에 나타난 성공회의 탄생과 회중교회나 청교도운동은 모두 위클리프와 롤라드 운동의 영향을 받고 있다. 뿐만아니라 16세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종교개혁 운동 역시 모두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도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164371일부터 1649222일까지 무려 58개월에 걸친 토의 끝에 태어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영국에서 이루어진 사실 역시 그 뜻이 있다. 그는 종교개혁의 ;선구자임이 틀림없다. /한국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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