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는 반복된다. 성경 속 가장 비극적인 인물인 가룟 유다의 그림자가 2천 년이 지난 지금, 다락방 전도 운동의 현장 뒤편에서도 똑같이 재현되었다. 수십 년간 류광수 목사의 곁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오직 복음과 전도, 렘넌트 운동의 대열에 서 있다고 자부하던 자들이 등을 돌려 자기 살려고 도망치고, 되려 자신들이 몸담았던 전도 운동의 제단을 무너뜨리려 혈안이 된 자들도 있다.
이들의 행태는 과거 은 삼십양에 스승을 판 가룟 유다의 모습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다.
시편 기자가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시편 41:9)라고 탄식했던 영적 배신의 역사가 오늘날 전도 운동의 흐름 속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본질적인 이유는 ‘중심의 변질’이었다. 그는 3년 동안 예수님의 공생애를 가장 가까이서 목도했고, 재정을 맡을 만큼 신임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영적 사실과 그리스도의 천국 복음이 아닌, 육신적인 메시아관과 세상의 이익에 머물러 있었다. 성경은 이미 유다의 중심을 두고 "돈자루를 맡아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한복음 12:6)고 폭로한 바 있다. 자신의 기준과 동기에 예수님이 맞지 않자, 그는 결국 사단에게 생각을 내어주고 스승을 팔아넘기는 배신자가 되었다.
오늘날 다락방을 무너뜨리려는 배신자들의 행태도 이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들은 수십 년간 이 전도 운동 안에서 메시지를 듣고, 직분을 얻고, 성도들의 눈물 어린 헌신을 바탕으로 영적·육신적 유익을 누려왔던 자들이다. 그랬던 이들이 돌변하여 조직의 약점을 들춰내고 비방의 칼날을 겨누는 이유는 단 하나다. 복음의 절대성보다 자신들의 ‘숨은 동기’와 ‘자리’, ‘이익’이 앞섰기 때문이다. 이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요한복음 13:2)는 말씀처럼, 복음의 흐름을 놓친 틈을 타 사단이 심어놓은 불신앙과 파멸의 덫에 걸려든 결과이다.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이들이 철저하게 ‘자기 의(義)와 자기애(愛)’에 걸려 넘어졌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의의 사도인 양 행동하며 교단과 전도 운동을 비판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복음의 본질을 상실한 채 율법과 정죄의 덫에 갇힌 자들에 불과하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로마서 10:3)고 경고했다.
복음은 인간의 연약함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덮고 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살리는 복음을 버리고, 오직 죽이고 파괴하는 사단의 심부름을 하고 있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영적 겸손은 사라진 채, 오직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는 교만이 그들의 눈을 가린 것이다. 가룟 유다의 결말은 비참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초래한 파멸을 보고 뒤늦게 후회했으나, 끝내 참된 회개에 이르지 못하고 스스로 파멸의 길을 택했다. 성경은 유다를 향해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사도행전 1:25)라고 명시하며, 그가 복음의 대열에서 완전히 이탈했음을 선언했다.
복음의 대열에서 이탈해 전도 운동을 무너뜨리려는 자들 역시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속에서 일어나는 전도 운동은 인간 몇 명의 훼방과 배신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이 휘두르는 비방의 칼날은 결국 자기 자신을 찌르는 부메랑이 될 뿐이다. 전도 운동의 흐름 속에서 찌꺼기가 걸러지는 것은 영적 과학이다. 지금의 흔들림은 다락방이 무너지는 징조가 아니라, 참된 제자와 가짜 배신자를 걸러내는 영적 분리수거의 시간표다. 복음을 버리고 자기 의에 걸려 넘어간 자들의 비참한 말로를 거울삼아, 남은 자들은 더욱 오직 복음, 오직 기도, 오직 전도의 언약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할 때이다./ 윤광식 장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