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가장한 ‘윤리적 방종주의’

‘한번 구원은 영원하기에 죄를 지어도 괜찮다? ...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는 다른복음, 이단사상이다

2023-01-27 15:42:47  인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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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믿음 좋다는 신자가 죄에 빠져 타락의 길을 걷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데 정작 그에게는 죄의식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란다. 또, 한번 구원은 영원하므로 죄에서 두려워 하거나 염려하지 말것을 강조하는 목사의 일탈행위도 심심찮게 목도한다. 그리고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뻔뻔하기까지한 행태에 할말을 잃는다. 이들은 모두  '율법페기론적 방종주의'를 신봉하는 다른복음, 이단사상을 가진 자들이다.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란?

오늘날 한국교회를 근원에서 무너지게 하고 있는 다른 복음은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다는 복음 진리를 바르게 회복하였다. 하지만 개혁교회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순수한 은혜의 복음은 뒤틀림과 왜곡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의 등장이다.

여기서 율법폐기론이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과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율법은 이제 완전 폐기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의 삶에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주장이다.

이런 율법폐기론은 윤리적 방종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윤리적 방종주의란 "그리스도인들은 율법과 율법의 정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하게 되었으므로, 어떻게 살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주장이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래서 윤리적 방종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심각한 죄악에 자신을 방임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음으로 나는 구원을 받았고, 단번에 주어진 구원은 결코 상실될 수 없으며, 내가 계속 죄를 지어도 율법은 더 이상 나를 정죄할 수 없기에, 그리고 자백만 하면 주님께서 계속 용서해 주신다고 했기에, 내가 계속 죄를 지어도 상관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품고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는 결코 성경이 지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은혜의 왜곡이요 복음의 타락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는 성경과 복음에 대한 깊은 무지와 터무니없는 오해에서 나온, 심각한 이단사상임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사도바울의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에 대한 논박

율법폐기론적인 방종주의는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이미 존재했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 이미 이런 자들이 존재했음을 우리는 로마서 331절을 통해서 알게 된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에서 바울은 여러 차례 "그럴 수 없느니라"는 표현을 사용해 바울은 복음의 대적자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들의 주장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면, 결국 바울 당신은 그 믿음으로 율법을 파기하고 폐기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답변한다. 그 말은 '오직 은혜에 의한, 믿음을 통한 칭의'의 복음이 율법폐기론으로 귀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도리어 '오직 은혜에 의한, 믿음을 통한 칭의의 복음', 율법의 바른 용도와 의미와 가치를 굳게 세워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의 바른 용도와 의미와 가치란, 칼빈이 율법의 제3용도론에서 주장한 것처럼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율법은 그들이 추구해야 할 거룩하고 선한 삶의 규범과 가이드로서 역할을 하게 됨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이 열심으로 감당해야 할 선행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로마서 4장과 5장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신칭의의 복음을 역설하고, 이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혜택들을 논의한다. 그리고는 5장 마지막 부분을 아래와 같은 말로 결론짓는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5:20-21)".

여기서 바울은 율법이 범죄를 더하게 한다고 선포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율법을 통해 죄인이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바울은 증거한다. 무슨 말인가? 죄를 더 많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 죄를 거저 값없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넘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위대한 복음 진리를 오해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렇다면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 죄에 더욱 거하자. 우리가 죄에 더 거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 많아질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하게 된다. 아주 전형적인 방종주의적 주장이다. 이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반박한다. 그렇다.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에 대하여 이미 죽었다. 원리적으로 죄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무관한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죽은 새로운 피조물은 결코 죄 가운데 더 살 수 없고,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도리어 우리가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혀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6:4)". 여기서 새 생명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결국 선한 일, 선행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목적이, 바로 새 생명 가운데 선한 일과 선행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임을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612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에 대해 경계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계속 거하면서 몸의 사욕에 순종하고 자신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어 주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도리어 우리 자신이 마치 이미 부활한 자와 같이 우리의 몸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에 빠지지 말고,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선행이 무용하고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이미 우리의 몸이 영광스러운 부활을 경험한 것 같이 하나님을 위한 의의 무기로 드리면서 거룩함에 이르라는 것이다.

로마서 614절 후반부에서 바울은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고 말씀한다.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아전인수로 해석한다.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다는 말은 이미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기에, 우리가 아무리 범죄 해도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는 말은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어떤 식으로 방종한다 해도, 주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심을 뜻한다. 그렇다면 "죄를 계속 지어도 되지 않는가?"라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 한 번 선포한다.

"그럴 수 없느니라."

왜 그럴 수 없는가? 왜냐하면 이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마음으로 순종하여(6:17),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기(6:18) 때문이다.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 사건은 이미 완료되고 완성된 사건이다. 의의 종이 된 자가 어찌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 있겠는가? 원리적으로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 하나님의 자녀들이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계속해서 윤리적으로 방종한다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6:19)"명령한다. 의의 종으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들의 정체성과 일치하는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마지막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6:22)".

오직 은혜와 믿음의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은 예수 제자들은 죄의 종된 상태로부터 해방되어 이미 하나님과 의의 종이 되었고, 그래서 계속 의의 종으로 살아가면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있으니 그 마지막은 틀림없이 영생이 될 것이라는 확증이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경험한 정체성 변화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일관성 있게 영향을 미치고, 그 증거를 나타내게 되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 자녀들은 이미 과거에 예수를 믿어 새 사람이 되었으므로, 이제 새 사람답게 의의 종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거룩함에 이르고 죄를 멀리하게 될 것이며, 이어 미래에 결국 약속된 영생의 은혜를 필연적으로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거꾸로 뒤집으면, 만일 예수님의 제자라는 어떤 사람이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율법폐기론을 주장하고 방종주의에 빠져 음행을 비롯한 타락한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중생하지 않은 불신자일 가능성이 높다.

또 오직 복음을 강조하면서도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의 삶을 사는 것을 정당화 하는 자라면 그는 다른복음을 전하는 이단사상을 가진 자로서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 발행인 윤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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