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착해야 구원을 받을까?

2013-05-17 10:58:31  인쇄하기


일상에 매여 부지런히 살다가 어느 순간 문뜩 이런 생각이 날 수 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것이며 과연 나는 누구인가? 이런 생각은 특별한 천재성을 가진 철학자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당연한 질문이다.

그러나 간단한 질문만큼 쉬운 답을 찾기는 어렵다. 삶은 오늘을 살아감이지만 삶 이후의 삶을 구원이라고 하는데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미래는 경험한 것이 없기 때문에 구원의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구원을 위한 가치를 위해 종교를 만들고 종교에 귀속되는 구원의 가치에 인간다움을 가미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는 사랑이다. 사람은 누구나 지혜가 있어 인간다움을 발견하면 그 사실을 사랑으로 표현하기를 원한다. 동서고금을 통해 지식인의 가치나 종교인의 평가는 바로 사랑의 실천이었다. 그 고고함의 가치를 보통사람들은 선행이라 보고 스스로 그것을 나타내기를 즐겨했다. 당연한 것이지만 실행하기 어려운 행동을 기꺼이 실천하는 것이 자신들의 미래를 위한 답이라고 스스로 결정짓고 그 가치를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여겼다.

세계사에서 중세를 흑암의 시대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인간의 생각으로 신을 삼으므로 그 시대는 어둠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당시의 사람들은 믿음의 가치를 선행에 두고 충실한 종교적 삶을 살았다. 일반사람은 못 알아듣는 라틴어로만 진행되는 한 시간이 넘는 예배를 관람하고 진짜 예수의 몸으로 변했다고 믿는 한조각의 빵을 얻기를 그들은 원했다. 그런 착한 예배가 그들에게는 구원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예배가 끝나갈 때 사제가 외치는 “이타 에스트 미사 Ita est missa(이제 세상으로 보내집니다).”는 그나마 사람들이 알아듣는 한마디 라틴어였다. 그것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세 예배를 ‘미사(보내지다)’라고 불렀다. 예배에 참석하는 선행이 좋은 일 이었고 그것은 금식, 자선, 성지순례, 헌금, 성물수집, 십자군 참전등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최고의 선행은 독신과
순교이며 선행의 최고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성자였다. 더군다나 공로와 선행은 은행의 돈처럼 빌릴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그릇된 가르침은 인류역사에서 복음의 본질을 벗어난 흑암의 시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인간의 실패는 완전함을 버린 인간의 문제인데 그것은 인간 스스로 해결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이나 공로나 선행으로는 문제 해결이 안 된다.

인간문제는 그 문제를 원천적으로 아시는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신 구원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기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인간이 가진 최고의 힘은 곧 자신뿐이다. 그 표현이 사랑이라는 선행뿐인데 그것은 그 자신 스스로를 구원하기에도 너무 부족하다.

하나님께서 수고롭지 않게 선물로 주는 믿음의 방법으로 인간은 구원된다.
너무 쉽고 간단하기에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상식이지만 구원은 상식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다. 구원은 착한 일 힘쓰며 고생하며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믿으면 구원받는다.
 /정현국목사 (복음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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