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전도역사 '성경으로 열린 선교의 문'

원제: 성경으로 읽는 한국교회사1 '열린문, 고려문' /이덕주 교수(감신대)

2021-07-07 22:30:29  인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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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4:3)

 

열린 문, 고려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요한 1:1)

이것으로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말씀의 기록이 성경이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그리스도는 성경을 완성하셨다. 기독교 역사를 성경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성경이 새로운 언어로 번역될 때마다 세상이 바뀌었다.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옮겨지면서 어거스틴의 중세기가 시작되었다. 라틴어에서 영어와 불어, 독일어로 옮겨지면서 종교개혁의 시대가 열렸다. 그것은 한국 교회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성경은 한국 기독교 선교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닫힌 문 

개신교 선교사로 우리 나라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독일 출신 귀츨라프(K. Gützlaff) 목사다. 그는 1832(순조 32) 7월에 내한해서 서해안 고대도에 상륙하여 한 달간 머물면서 그곳 선비의 도움을 받아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감자 심는 법, 포도주 만드는 법을 그곳 주민들에게 가르쳐 주고 떠났다. 그런데 그는 동인도회사 소속 로드암허스트호를 타고 왔다. 동인도회사라면 19세기 아시아인들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준 아편전쟁을 떠올린다. 아시아에서 자행된 대영제국의 경제정치적 침략의 현장엔 동인도회사가 있었고 그 회사 소속 선박에 길 안내 겸 통역으로 동승한 선교사들의 모습도 종종 보였다. 조선과 교역을 터볼 요량으로 서해안에 나타난 로드암허스트호에 동승한 귀츨라프의 역할도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교역 요구에 대한 조선 정부의 거절로 로드암허스트호가 떠나면서 귀츨라프의 역할도 끝났다. 중국 개척선교사 모리슨이 번역한 한문 성경을 뿌릴 기회도 얻지 못했다. 

다음으로 1866(고종 3) 8, 영국인 토마스(R. J. Thomas) 목사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나타났다. 그가 타고 온 배는 미국 프레스톤무역회사 소속 제너럴셔먼호였고 그 역시 그 배의 길 안내 겸 통역이었다. 그러나 남의 땅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미국 배는 안하무인격으로 평양 사람들의 인내심을 자극했고 결과적으로 쌍방간에 무력 충돌이 빚어져 배에 타고 있던 승무원들이 모두 희생되었다. 토마스도 그 때 조선 사람들에게 전도하다가 장렬하게 순교하는 장면을 연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제네럴셔먼호가 불타는 것으로 토마스의 역할도 끝났다. 중국 선교사 윌리엄슨이 마련해 준 한 상자 분량의 한문 성경도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 

귀츨라프나 토마스의 선교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는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사람에게 미지의 나라 조선에 복음을 전하려는 순수한 선교적 동기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들에게 조선 여행은 순교를 각오한 여행이었고 토마스는 실제로 그 길을 갔다. 이들의 선교가 성공했더라면 한국 개신교 역사는 그만큼 빨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선교 시도가 실패로 끝난 것이 아쉽지만은 않다. 그것은 그들이 타고 온 배의 성격 때문이다. 귀츨라프를 태워 온 로드암허스트호나 토마스가 타고 온 제네럴셔먼호나 아시아인들에겐 달갑지 않은 이양선’(異樣船)이었다. 정치적경제적 침략의 선봉에 섰던 이양선으로 한국인의 마음을 열기는 어려웠다.

이같이 서세동점’(西勢東漸) 과정에서 연출된 선교사들의 조선 접근이 성공했더라면 한국 개신교 역사와 그로 인해 형성된 기독교의 성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것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확장 과정에서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진 동남아시아와 제3세계 국가 교회들이 처한 오늘의 형편을 보면 잘 드러난다. 힘에 밀려 항구를 개방하고 상인과 군인을 받아들인 나라들은 하나같이 긴 인고의 세월을 겪어야 했다. 그런 침략에 길 안내자로 동원되었던 선교사들에 의해 해석된 기독교 복음은 언제나 강자의 복음이었다. 그런 복음은 출세 지향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기독교인을 배출하는데는 효과가 있지만 약자를 위한 사랑의 봉사자를 길러 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힘으로 여인의 몸을 정복할 수는 있어도 그 마음은 얻을 수 없듯 무력으로 항구는 열 수 있어도 그 땅 사람들의 마음의 문은 열 수 없다. 돈과 힘을 앞세운 선교의 결과는 늘 그러하다.

고려문 

토마스의 선교가 실패로 끝난 8년후, 1874년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선교사 로스(J. Ross)가 고려문을 방문하였다

고려문’(高麗門)은 봉천(지금의 심양) 아래 봉황성 근처에 있는 조그만 마을 이름인데 이곳에서 한 · 중 양국 상인들의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로스는 이곳에서 한국인들을 처음 만나 전도하였다. 의주에서 건너온 상인들이었다. 그러나 장사꾼들의 관심은 로스가 전하는 말보다는 그가 입고 있는 양복 옷감에 있었다. 그래서 방법을 바꾸었다. 상인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양초를 한 자루씩 주면서 한문 성경책도 나눠주었다. 그리고 그 자신 한국어를 배워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로 하고 한국어 선생을 찾았다. 그리하여 1876년 두 번째 고려문 방문 길에 한국어 선생 이응찬(李應贊)을 만날 수 있었다.

이응찬 역시 압록강을 건너다니면서 장사하던 의주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 번은 인삼을 사서 압록강을 건너가다가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전 재산을 날려 버렸다. ‘빈털터리가 된 이응찬이 만주 땅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중 로스의 중국인 조수를 통해 로스를 소개받았다. 이응찬은 밤중에로스를 찾아가 만났고 기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로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때부터 로스는 이응찬에게 한국어를 배웠고 불과 1년 만에 영어로 한국어 문법책을 저술할 만큼 발전을 보였다.

1년 만에 한국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된 로스는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응찬도 계속해서 돈을 받고성경 번역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2년 후인 1879, 4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번역 초고가 완성되었다. 로스는 이 원고를 들고 본국으로 들어가 인쇄기 모금 운동을 벌였다. 

그 사이 로스의 매제되는 매킨타이어(J. McIntyre)가 일을 맡아 보았다. 그 때 의주에서 백홍준이란 20대 청년이 그를 찾아와 세례를 받고 돌아갔다. 그는 3년전 로스가 나눠준 양초와 함께 성경을 가져갔던 의주 상인의 아들이었다.종교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백홍준은 아버지가 갖고 온 한문 성경을 혼자 읽으면서 공부하던 중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마음의 결심을 한 후 압록강을 건너와 세례를 받고 돌아갔다. 백홍준의 세례에 자극을 받은 이응찬이 결심을 하고 세례를 받겠다고 했다. 선교사를 만난지 3년만이었다. 같은 해 두 사람이 더 세례를 받았다. 이들이 한국 개신교 최초 세례자들이 되었다.

열린 문 

이렇게 만주에서 개종자들이 나오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로스와 매킨타이어, 이응찬김진기최성균이성하이익세서상륜김청송 등 의주 출신들이 번역한 한글 쪽복음들이 인쇄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1882년 봉천에서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이 처음으로 인쇄되어 나왔다. 그해, 한국은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 소식을 들은 로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최초 한글 성서 발행이 한미조약 체결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다. 완고한 고려문열린 문이 되면 곧바로 복음이 이 민족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예언대로 되었다. 만주에서 인쇄된 성경들은 백홍준서상륜최성균 같은 매서인을 통해 국내에 유입되었다. ‘고려문을 통해 들어온 성경은 불온문서’(?)처럼 유통되며 새로운 도에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 은밀하게 읽혔다. 그 결과 의주와 소래, 서울 지방에서 1백여 명에 가까운 개종자들이 세례를 받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이처럼 세례 지원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되었으니 서세동점의 폭력에 굳게 닫혔던 문을 연 것은 성경이었다.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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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주 교수(감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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