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행전(1) "선교사가 된 구두 수선공 ‘윌리엄 카레이’(1760~1834) "

2012-10-23 09:38:16  인쇄하기


 위인을 인정하지 않은 세대는 위인을 배출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것은 교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기독교인의 삶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 앞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전파한 도전을 보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

20세기에 ‘인도복음선교회’를 창설하고 줄곧 이 단체를 이끌었던 데오도르 윌리엄스(Dr. Theodore Williams, 1935~2009) 목사는 세계복음화를 위해 10인의 개척 선교사의 이야기를 엮어 소책자 『십자가의 종』(Servants Of The Cross)을 펴냈으며, 이 책은 지금도 인도에서 청소년 신앙 교육 자료로 크게 호응을 받고 있다.
여기에 소개된 선교사 10인의 삶을 우리말로 옮겨 각 2회씩, 모두 2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선교사가 된 구두 수선공 ‘윌리엄 카레이’(1760~1834) ①


소년기
소년 시절 윌리엄 카레이(William Carey)는 모험을 시작하면 그것을 끝장내고야 말았다. 그는 항상 모험을 즐겼다. 한번은 그가 새둥지를 알아보기 위해 나무에 오르다가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다. 멍들고 긁혀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어머니는 붕대로 싸매주고 침대에 누워 있도록 했다. 그러나 어린 윌리엄이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놓쳤고 그녀가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을 때 그의 손에는 새둥지가 쥐어져 있었다.
윌리엄은 운동과 여행을 좋아했다. 탐험가 콜럼버스는 그의 마음에 드는 영웅이었고 종종 그에 대해 말하곤 했다. 그래서 아이들로부터 콜럼버스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자연을 사랑했으며 새와 곤충을 수집하고 들의 식물을 찾아내어 연구했다. 그러나 그는 특별히 여행과 모험에 관한 책을 좋아했다. 그는 언어 공부에 흥미를 가졌고 청소년시기에 라틴어 공부를 시작했다.


 구두 수선공 시절 만난 그리스도
그는 열두 살까지 학교 교육을 받았고 14세 때에 그의 아버지는 그를 구두 수선공 견습생으로 보냈다.
당시 그는 종교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좋은 기독교인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는 종종 다른 성가대원들과 어울려 욕과 거짓말 그리고 지저분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던 중 동료 견습생인 Warr의 강한 신앙 간증은 수시로 그의 양심을 괴롭혔기에 이따금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주인의 동전 한 닢을 써버린 후 비슷한 것으로 바꿔 놓았다. 주인은 그를 잡아 공개적으로 창피를 주었다. 이 일로 카레이의 마음이 낮아져서 하나님이 임할 수 있게 되었다. 죄를 깨닫고 힘들어하고 있을 때 그의 목사는 사람이 교회 출석만으로 교인이 되거나 선한 일을 행함으로가 아닌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이 모든 것이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고 결국 무릎을 꿇게 되었고 “주 예수여 내 마음에 오셔서 나의 죄를 씻어 주옵소서 지금 당신을 영접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부르짖었다. 그 순간 그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들어갔고 카레이는 회심하게 되었다. 
 
구두수선공 목사로 활동하다. 
그는 구두를 만들고 수선하면서 영국의 모울톤(Moulton)에 있는 교회에 목사로 사역하고 있었다.
그는 “내 사업은 그리스도 왕국의 확장이고 나는 다만 그 비용 감당을 위해 구두를 만들고 수선할 뿐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구두 일을 하면서도 그는 책을 가까이 두고 읽었다.
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했고 히브리어, 불어, 이태리어와 화란어를 공부했다.
히브리어 학습을 위해 9마일(14.4Km) 거리를 도보로 교사를 찾아 다녔다.

선교사의 꿈을 키우다
 목사로 재직할 때, 카레이는 우연히 쿡(Cook) 선장의 항해에 관한 책을 읽다가 남태평양의 남양제도의 수많은 섬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손수 만든 세계지도를 작업실 벽에 붙여 놓고 그가 읽은 내용에서 각국의 인구의 정보를 기입했다.
매일 아침 그는 의자에 무릎을 꿇고 지도에 표시된 그리스도 없는 민족, 나라를 위해 기도를 드렸다.
그의 믿음은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게 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듣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기도하기 위해 기도회를 조직했으며
다른 목사들에게도 이와 같은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글을 써 보냈다. 목회자 모임에서 카레이는 이교도 국가에 대한 짐을 나누어지고 이 일을 위해 책임을 인식하도록 목회자들에게 촉구하였다.
한 원로 목사가 외쳤다. “앉게 젊은이! 하나님께서 이교도 개종을 원하시면 그가 우리의 도움 없이 행하실 것일세.” 카레이는 목회자들 앞에서 크게 굴욕감을 느꼈으나 어릴 적부터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익혀온 카레이는 굽히지 않았다.  1791년 카레이는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1792년 그는 침례교 목회자 연례회에서 설교를 요청받았다. 그때의 설교 제목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것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시도하라”였다. 이것은 그를 감동시키는 그의 모토가 되었다. 그 회의의 결과 침례 선교회가 구성되었고 선교회의 첫 선교지 파송에 기꺼이 뜻을 두었다.

 ▲인도에서의 카레이
카레이는 항상  어디로 가야 할까? 고민했고  마음속에는 남태평양의 남양군도와 아프리카를 두고 생각했다.
드디어 카레이의 선교사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카레이를 위해 인도를 뜻에 두고 계셨다. 하나님은 인도에 다녀온 토마스(Thomas) 박사를 카레이와 만나도록 보내셨다. 카레이는 토마스 박사의 열의에 영향을 받아 그와 함께 인도 선교사로 가기로 결정했다. 신임 선교사회 협회장과 몇몇 사람들은 카레이의 배경이 되어서 기도와 재정 후원을 약속했다. 카레이가 인도 선교사로 갈 것을 결정한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많은 계획 수립과 약간의 저해로 지연된 후 1793년 6월 13일 마침내 카레이와 그의 가족, 그리고 토마스 박사 일행은 인도를 향해 닻을 올렸다. 험난한 항해 끝에 11월에 인도 캘커타에 상륙했다. 카레이는 아내와 네 자녀, 그리고 처제와 함께 온 것이다. 그들 중 아무도 인도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친구와 친척들은 그가 미쳐서 작은 돈과 후원자 없이 외국에 기착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레이는 매우 열정적이고 희망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오랜 항해 동안에 벵갈어 공부를 시작했다.
훗날 그는 힌두어, 페르시아어, 마라티어 그리고 범어인 산스크리트어를 배웠다. 인도에 정착한 이후 그는 인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성경을 벵갈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이 사역을 위해 그에게 언어를 준비시키셨다.    인도에서의 첫 해 동안 온 가족이 한 사람씩 차례로 병이 들었고, 다섯 살 난 아들 피터(Peter)는 고열로 사망하고 말았다. 힌두교와 이슬람교 인부들은 무덤을 파는 일을 꺼려했으므로 병약함에도 불구하고 카레이는 손수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그때에 두 하인이 와서 그를 도왔고 카레이는 눈물겹도록 고마워했다. 

생계를 위해 카레이는 인디고 염색 공장의 관리인으로 일했다.
그는 성경 인쇄를 위한 인쇄기를 가지고 있었다. 얼마 후 그는 그 공장 사업 실패로 일자리를 잃었다. 그의 인쇄기도 화재로 파손되었다. 그러나 일련의 일들이 카레이를 실망케 할 수 없었다. 그의 유일한 염원은 ‘내가 어떻게 인도를 도울 것인가?’였다. 

▲하나님은 카레이를 사용하심
7년간의 힘든 수고 끝에 카레이는 그의 첫 번째 개종자, 목수 일을 하는 크리스누 팔(Krishnu Pal)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그는 많은 핍박을 무릅쓰고 진리를 지켰고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1798년 영국에서 4명이 카레이와 합류하게 되었다. 그들은 세람포어(Serampore)에 훌륭한 선교센터를 건립했고, 그곳을 기점으로 인도 전역에 그리스도를 전도하고,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도 설립했다. 그들은 소책자와 성경 인쇄를 위한 인쇄기도 갖게 되었다. 
1800년에 이르러 카레이는 세람포어 대학을 설립했고 고아원과 나환자 병원도 개설했다. 1815년에 이르기까지 그가 인도에 정착한지 거의 22년 만에 그는 765명을 개종시켰다. 그가 소천하기 전 26개의 인도 교회를 설립했다. 
카레이는 캘커타에 있는 국립대학의 벵갈어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후에 거기서 마라티어와 산스크리트어도 가르쳤다. 그는 30년간 봉직했고 그의 봉급 대부분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쓰여졌으며, 다만 소액의 돈만이 그의 몫이었다. 

1800년 신약성경이 벵갈어로 번역되었다.
그가 소천하기 전 신약성경을 동양의 40개 이상 언어로 번역했고 그중 20여개 언어로 신·구약성경이 모두 번역되었다. 이로써 세계 1/3 지역에 성경을 보급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의 감화로 인도 정부는 죽은 남편의 화장 장작더미 위에 살아 있는 과부를 생화장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는 갠지스강에 어린이들을 제물로 던지는 것을 중지시키는 일에도 혁혁한 공헌을 했다.
 
이와 같은 모든 성취에도 불구하고 카레이 자신은 항상 무익한 종이라 여겨 왔으며 ‘쓸모없는 자’라고 말했다. 그의 말년에 방문한 친구에게 “내가 죽은 후 카레이 박사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말게. 카레이 박사의 구세주에 대하여만 말하게”라고 당부했다.

그의 나이 72세 때에 카레이는 여덟 번째의 신약성경 벵갈어 번역 개정판을 수정한 후 말했다. “나의 할 일을 다 했다. 나는 이제 더 할 일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뿐이다.” 2년 후인 1834년 6월 그는 임종했고,

그의 유해는 그의 가장 사랑하는 인도 땅에 안장되었다.
카레이는 41년 동안 그의 생애를 인도에서 보내며 수고했고, 한 번도 그의 모국에 귀국한 적이 없었다. 그 수고의 열매는 아직까지 존속되고 있으며 그는 참으로 ‘근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번역=윤봉기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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