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경제관: 르호봇 경제(21) : 체리 피커(Cherry Picker)

글 김태구 경제학 박사

2023-09-22 23:46:10  인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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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 피커(Cherry Picker)라는 경제학 용어가 있습니다. 체리 피커는 본래 체리 따는 지게차 같은 기계를 지칭하는 단어였습니다. 현재는 기업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실속을 차리는 소비자를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케익에서 하나뿐인 체리를 빼먹는 사람, 신용카드 회사가 제공하는 보너스 혜택은 다 챙기고 정작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성경에 구주’, ‘구세주라는 단어가 36, ‘’, ‘주님이라는 단어는 7,800번 정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구주(Messiah)’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나타냅니다. ‘(Master)’는 예수님이 우리의 삶 속에 차지 하는 위치를 말합니다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면 그 분을 동시에 주인으로 모신 것입니다. 즉 구주와 주인이 분리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겨우 신앙생활의 첫 발에 불과 합니다. 그 이후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옥중에서 쓴 빌립보 서신을 통해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우리의 과업은 구원을 이루는데(Work Out)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두렵고 떨림으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죄 값을 담당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세웠기 때문입니다.(1:22)

종교개혁은 카톨릭의 타락과 부패에 의해 촉발된 것입니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과연 누가 주인인가’, ‘과연 누가 기준인가에 대한 싸움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교황이 기준이 아니고 하나님이 변함 없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면 잘못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16세기 프랑스에서도 종교개혁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극심한 박해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Master)’되심에 복종하는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로 불리운 위그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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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위그노는 섬유, 방직, 기계 등 각 분야에서 숙련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도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40여 만 명의 위그노들이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영국 등으로 탈출하였습니다. 영국으로 망명한 위그노는 증기기관의 기술과 면방직 공업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미국에 건너간 위그노(청교도)는 서부개척을 해냈고 미국의 기틀을 만들었습니다. 위그노가 살아가는 방식은 구원과 삶이 하나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빵을 만들어도 주인이신 예수님께 드리는 빵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하는 것이 위그노 정신이었습니다. 위그노는 작고 큰 문제가 닥치면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풍요를 만들어 냈지만 사치와 향락을 일삼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 광야 1세대 앞에 서서 얘기합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신신당부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4~5)

여호와를 사랑하되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 마음의 중심에 주의 법을 두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법이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되 뜻을 다해야 합니다. 뜻을 다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숨을 버려서(12:30)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목숨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되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힘을 다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복(바라크)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놓치면 필히 멸망하고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오순절 날이 왔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이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모여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2:36)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는 삶의 주도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분이 삶의 운전대를 붙잡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종된 청지기입니다. 큰 재물을 위임 받아도 마음이 완악해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가지 않습니다. 방탕함과 술취함으로 마음이 둔해지지 않습니다. 못된 나무가 노력한다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좋은 열매는 좋은 나무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자가 좋은 나무입니다.

당연한 얘기는 이쯤에서 멈추고 체리 피커를 소환하겠습니다.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데 예수님을 구주로만 붙잡고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 입니다. 이것이 바로 체리 피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선물로 받았으나 사는 것은 하나님과 무관합니다. 체리 피커는 구원과 삶을 나눕니다. 종되었던 애굽에서 해방 된 기쁨을 갖고 바알 신당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가능합니다.

왜 이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필시 구원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구원은 프로세스입니다. 구약도 이를 얘기합니다. 출애굽기는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얘기합니다. 그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법을 받고 언약의 백성이 됩니다. 이것이 레위기 입니다. 민수기는 언약의 백성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훈련의 삶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훈련 받은 광야 후대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복이 되는 것이 여호수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은 겨우 구원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한 번의 이벤트(Event)입니다. 구원을 이벤트로만 보면 체리 피커의 결과를 낳게 됩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죄의 종노릇을 합니다. 죄가 끊임 없이 육신의 사욕을 쫓아 살도록 우리를 종용하기 때문입니다.(6:6~14)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B. Ferguson)성도의 삶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죄의 종노릇을 하기 않게 되었다고 해서 죄와의 싸움도 끝났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지만 우리 안에 죄는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받게 됩니다. 그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의 종으로서 마땅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8:17) 그러나 체리 피커는 이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선한 행위(6:8), 우리 자신을 부인 했던 삶(16:24~27),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사람에게 베푼 것(14:13~14), 심지어 원수에게 친절하게 대한 것(6:35) 등에 대하여 보상하십니다. 그러나 체리 피커는 이 보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존 번연이 이런 말을 합니다. 주인을 위해 행한 좋은 일은 하늘나라 금고에 보관되었다가 우리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때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상급이 되어 나아 올 것입니다. 체리 피커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자의 영원한 가치를 놓치게 됩니다. 우리가 체리 피커의 길에서 떠나 하나님의 기업을 얻기에 합당한 자들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10~12) 

)이 내용은 존비비어(John Bevere)Good or God?을 인용한 것입니다.

(다음 호: God is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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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김태구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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