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개혁) 총회는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을 지향하는 총회로서, 유구한 역사와 아름다운 신앙 전통과 훌륭한 신앙 선진들을 가진 총회이다.
1912년 9월 1일 평양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1회 총회가 열렸다. 1952년 9월 장로교의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투옥당했던 사람들이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파로 분립하였다. 1953년 성서비평학 수용문제로 보수적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장)와 진보적인 한국기독교장로회 (기장)로 분열되었다. 1960년 2월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세계교회협의회 가입에 찬성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과 반대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으로 분열되자, 신학과 신앙이 같은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이 합동측에 참여하였으며, 합동 기념사업으로 새찬송가를 발간하였다. 1961년 총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가 합동하였으나 1962년 9월에 고려신학교가 환원함으로서 합동측과 고신측은 3년 만에 다시 분열하게 된다. 통합과 합동은 계속 합동을 논의하였으나, 1967년 미국의 남장로교회와 북장로교회가 합하여 연합장로교회로 출발하고, 67새신앙고백서를 채택하는 것을 계기로 이후 합동의 논의조차 시도된 적이 없었다. 1979년에는 합동교단은 교권 다툼으로 사당동파(주류)와 방배동파(비주류)로 분열되었으며, 1980년에는 총신대의 신학적 문제와 교권의 신학교 농단 문제로 총신대 학생 분규가 일어나고, 박운선 박사를 중심으로 한 몇몇 교수들의 합세로 합동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듬해인 1981년에는 합동 주류측과 비주류측의 분열 당시 중도적 입장을 취하던 그룹을 중심으로 예수교장로회 개혁총회가 설립되었다.
이 개혁 총회는 합동보수측 (총회장 변한규 목사)과의 합동을 추진하던 중 박윤선 목사의 반대로 합동신학원 중심의 교단을 지키기로 하고서 1984년12월 반포동 남서울 교회당에서 합동 총회를 개최하였으며, 이때부터 합동보수 측은 개혁을 총회 명칭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5년 4월 합동신학교 박윤선 목사를 중심으로 한 그룹이 합신측이라는 교단으로 다시 출발하였다.
개혁 교단은 방배본동에 3층 건물 전체를 임대하여 ‘총회신학교를 운영하던 중(당시 교장 정규오 목사), 이진태 박사를 교장으로 모시는 문제를 두고, 교장인 정규오 목사와 이진태 박사를 교장으로 모시려는 측의 대립하였고, 이진태 박사를 교장으로 모셔오자,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한 광주 측이 황성수 박사를 교장으로 초빙하고 서초제일교회당에서 개혁신학교로 출발하였다가 다시 청담동으로 이전하였다. 합동보수 총회신학교는 서대문구 홍은동의 건물을 매입하고 총회와 신학교를 같은 건물로 이전하였다.
이렇게 합동 비주류가 다시 홍은동파와 청담동파로 각기 활동하였으며, 교세는 홍은동측이 훨씬 더 우세하였다. 1989년 이르러 예장개혁은 보수 교단 합동이란 대전제 아래 79년 분열 당시 비주류였던 9개 교단의 합동을 추진하여 1989년 12월 28일 합동을 성사시켰다. 9개 교단 합동 당시 교세는 217개 노회에 6000여 교회의 국내 최다 교회 숫자를 가진 교단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명실 공히 국내 최대 교단이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었다.
그러나 1990년 노회 정비와 교단 신학교 문제 등을 둘러싼 견해 차이로, 홍은동과 청담동으로 갈라지고, 다시 개혁측은 개혁신학교를 청담동에 그대로 유지하고, 총회본부를 강서구 가양동에 두게 된다. 노태우 대통령 당시 총회는 대학 설립인가를 획득하고, 대대적인 건립자금 모입을 실행하여, 충북 음성에 건물을 신축하여 대학교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교권다툼으로 학생모집도 하지 못하고 해를 넘겨 개인이 부동산을 차지하고 결국 대학 인가를 반납해야 했다.
개혁신학교는 청담동에서 노량진에 있는 건물로 이전하였고, 건물을 매입하여 신학교의 영구적인 안정을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신학교의 운영권을 종암중앙교회에 넘겨주었다. 종암중앙교회에서는 노량진의 건물은 그대로 남겨두고, 강북구 수유리에 있는 건물을 매입하여 김영삼대통령 재임 시에 종암중앙교회는 학교법인을 획득하고, 특수대학원인 ‘개신대학원대학교’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개신대학원대학교는 몇 해 가지 않아서 운영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종암중앙교회가 총회 인사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재단을 설립하여 외부의 지원을 받는데 한계가 있었던 점과 88회 총회 당시 3,500교회이던 총회가 89회에서 광주측이 이탈하여 합동에 편입되면서 교세가 1,200교회로 급감한 까닭이었다. 개신대학원대학교는 정원(한 학년 40명, 전 학년 120명)을 채우지 못하였고, 95회 총회 당시 학생 수는 정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금은 졸업생이 한 자리 수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개혁교단은 1912년 평양에서 창립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으며, 1959년의 W,C.C를 반대하여 분리되었던 합동교단과, 1979년 대구동부교회에서 분열시 비주류인 합동보수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1984년 합동보수와 합신 측과의 합동으로 하나 된 후, 1989년 12월 비주류 9개 교단 합동당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때 교단의 명칭은 ‘대한 예수교장로회’로 하며, 타교단과 구별할 때는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으로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합동 당시 신학교를 하나로 출범시키지 못한 것은 큰 문제가 되었다. 개혁총회가 운영하는 청담동의 개혁신학교와 합동보수에서 운영하던 홍은동 소재 총회신학교를 그대로 유지함으로서 합동은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 분열을 맞게 되었다. 결국 개혁교단은 총회가 운영하는 신학교로 개혁신학교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교단과 신학교 모두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때 94회 총회 부총회장인 조경삼 목사는 타교단과의 합동을 통하여 교세를 확장하여 교단과 신학교를 정상적으로 운영할 생각으로 이를 강력하게 추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방해하는 일부 세력이 강북구 미아소망교회에서 열린 95회 총회를 방해하여 총회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교회의 음향기 볼룸을 최대한 높여 옆 사람과 대화도 할 수 없어 종이에 써서 의사를 전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증경총회장 회의를 황급히 교회 강단의 사회 석에 갖고 임원회에 잔무를 맡기고 파회하기로 뜻을 모았다. 총회 서기가 이탈하여 임원회는 정학채목사를 서기로 보선하였다.
이후 총회장 조경삼 목사는 개신대학원대학교 이사장 조경대목사의 권유로 전도총회와의 합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합동 논의는 총회임원회와 증경총회장 간담회, 신학위원회의 검증과 이단대책위원회의 검증을 거쳐, 6월 21일 영입총회 집회를 가지기로 결의하여, 거침없이 순항하는 듯하였으나, 반대세력은 비밀리에 이를 무산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1차 계획은 대천성주산기도원에서 열린 목사장로기도회(2011년 5월 첫 주간) 기간 중에 열릴 계획이었던 임원회에서 총회장 조경삼목사를 납치하고, 부총회장 장세일 목사의 사회로 총회장 불신임안을 결의하고 총회합동을 무산시키려 하였었다. 기도회 이튿날에는 기도원 입구에 ‘근조(謹弔) 조경대, 조경삼’이라고 쓴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전북지역 목사들은 꽹과리와 농악기구치명서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총회장 테러 정보를 전해들은 이화웅 목사가 총회장에게 전달하여 오전 집회 후 광고 시간에 총회임원회 취소를 알렸다.
총회장은 목사.장로기도회 개최 다음 주 월요일에 총회사무실에서 전도총회 영입에 대한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었다. 9시경에 총회사무실에 도착한 총회장은 사무실 문이 잠겨 있었으며, 문 앞에는 건장한 체격의 젊은이 두 사람이 문을 지키고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직원들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사무국장도, 신문사(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었음) 편집국장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뒤늦게 도착한 총무(정해송목사)가 사태를 파악한 결과 총회 사무국장과 신문사 편집국장이 문을 폐쇄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찰의 도움을 받고자 하였으나 경찰도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조경대목사는 물리적으로 문을 개방할 것을 추진하였으나, 총회장은 당시 교계의 여러 문제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 터에, 서로 충돌하여 불미스러운 사태가 발생함으로 지탄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다른 방법을 강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전도총회의 영입은 계획대로 추진하여, 2011년 6월 21일 오후에 일산 킨텍스에서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전도총회를 영입하고 4년 째 되던 해에 개신대학원대학교를 중심한 많은 사람들이 다시 돌아감으로 개혁교단 교회와 목회자의 수도 극소수만 개혁교단 안에 남게 되었다.
우리 교단은 기독교 방송인 CTS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창설 당시 개혁 총회 총무인 윤낙중 목사가 실무를 맡아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였으며, CTS 실무진에 개혁교단 인사가 많이 참여하였고, 지금은 개혁교단 출신인 박천일 목사가 사목으로 일하고 있다. 한편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창립 실무를 담당했던 윤낙중 목사는 한기총 초대 총무로 개혁교단의 박영률 목사를 추천하여 장기간 활동하였고, 다음으로는 개혁교단의 박천일 목사가 총무직을 이어 받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총회는 ‘개혁’이라는 이름을 최초로 한국교회에서 사용한 교단이다. 우리 교단은 장로교회의 정통성을 이어온 교단임은 물론, 한국 기독교의 연합기관 등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여 온 교단이다. 지금은 비록 교세가 크게 확장되지 못했지만 앞으로 교단의 위상을 회복하고, 다시금 한국교회를 선도하는 교단으로 한국교회의 발전과 세계 복음화에 기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