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계절에 다시 숨 쉬는 부르심

수필기고: 주재식 선교사(세계 순회 의료복음선교사 / 한의사)

2026-02-12 14:29:41  인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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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스레 추운 계절의 파동이 가슴팍으로 파고듭니다. 살을 에는 바람이 골목을 휘돌아 나가듯, 사람들의 마음도 쉽게 녹지 않는 계절입니다. 이런 날이면 몸보다 마음이 먼저 굳어버린 이들이 진료실 문을 두드립니다.

오늘은 수십 년 전, 아직 젊은 날의 얼굴을 하고 나를 찾았던 한 노인이 다시 이 클리닉을 찾아온 날입니다. 세월은 그의 등을 먼저 굽게 만들었고, 걸음은 조심스러워졌으며, 문을 여는 손끝에는 힘이 많이 빠져 있습니다. 외투를 벗는 데에도 한참이 걸립니다. 그는 의자에 앉기 전, 짧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이젠 병원 병명들을 모아 살고 있습니다.”

쓴웃음과 함께 꺼낸 첫마디였습니다. 그 말 속에는 아픔보다 체념이 더 짙게 묻어 있습니다. 몸의 병이 늘어갈수록 마음은 점점 더 조용해졌고, 오래전 품었던 생각들은 삶의 먼지 속에 덮여버린 듯 보였습니다.

진료를 시작하며 그의 몸을 살피는 동안,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천천히 떠오릅니다. 젊은 날, 눈빛이 살아 있었고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진지하게 길을 묻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세월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지만, 아주 깊은 곳까지 지우지는 못한 무언가가 아직 남아 있는 듯했습니다.

진료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선교사가 되셨습니까?”

마치 오래 던지지 않던 공을 다시 꺼내 든 투수처럼, 어색하지만 묵직한 질문이었습니다. 그 물음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먼지 쌓인 자신의 시간까지 함께 건드리는 떨림처럼 들렸습니다. 그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문장들이 샘물처럼 솟아올랐습니다.

거창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아픈 곳, 외로운 곳을 찾아 복음과 진료를 전하며 부르심의 길을 걷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제 선택이라기보다, 저를 불러주신 하나님 앞에 매일 순종하며 서 있으려는 작은 몸부림이지요.”

진심을 담아 고백을 이어가며 나 역시 다시금 확인합니다. 이것은 한때의 결심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나의 의지라기보다, 부르신 분의 손에 붙들려 있는 하루하루라는 것을요.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진료실 안에는 기계의 미세한 소리와 우리 둘의 숨소리만 조용히 오갑니다. 고개를 조금 숙인 채 한참을 앉아 있던 그는, 마침내 낮은 목소리로 마치 자신에게 하듯 말했습니다.

나도한때는 그런 마음이 있었지요. 선교를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바쁘게 살다 보니그냥 묻어두고 살았습니다.”

그의 눈가가 조금 젖어 있었습니다. 세월이 덮어버린 줄 알았던 부르심의 씨앗이, 누군가의 고백을 통해 다시 숨을 쉬는 순간 같았습니다. 나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듣습니다. 그를 설득할 생각도, 무언가를 결단시키려는 마음도 들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깊은 곳을 만지고 계심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부르심도, 순종도, 그 열매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이루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명령 앞에 서 있는 작은 병사일 뿐입니다. 때로는 앞줄에, 때로는 물러선 자리에서, 그러나 언제나 그분의 손 안에서 말입니다.

진료가 끝난 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외투를 입었습니다. 들어올 때보다 조금은 부드러워진 얼굴입니다

나는 그의 굽은 등을 바라보며 속으로 기도합니다.

얼어붙은 계절 한가운데서도

주님은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녹이신다고.

한때의 부르심을, 다시 오늘의 숨결로 살려내시는 분이라고.

그리고 나 역시, 그 은혜의 현장을 오늘 또 한 번 목격한 사람으로 조용히 감사하며 하루를 닫습니다.

/ 글 주재식 선교사(세계 순회 의료복음선교사 / 한의사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개혁총연) 캐나다 노회 파송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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