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신앙은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자, 아프리카에서의 헌신적 봉사를 선택하고 결단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는 독일 알자스 지역에서 태어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어린 시절부터 어린 시절부터 성경과 예배에 익숙한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철학, 신학,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슈바이처는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예수의 생애와 초기 기독교에 대한 연구를 깊이 있게 진행했습니다.
그의 대표 저서인 《예수의 생애 연구사》에서, 그는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묘사한 도덕적 예수상을 비판하며, 예수를 종말론적 예언자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바흐 연구로 음악계에서도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학문적 성공과 안정된 삶을 뒤로하고, 30세 이후에는 인류를 위한 직접적인 봉사를 하겠다는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의학을 새롭게 공부했습니다. 이 결심은 어린 시절 가난한 친구들과의 경험, 아버지의 설교를 통해 접한 아프리카의 현실, 그리고 인간과 생명에 대한 깊은 존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생명은 거룩하며, 희생되어도 되는 생명은 없다”는 ‘생명에 대한 경외’ 철학을 바탕으로,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를 펼치기로 결심합니다.
1913년, 슈바이처는 아내 헬레네와 함께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현 가봉)의 랑바레네로 떠나, 닭장을 개조한 임시 병동에서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첫해에만 2,000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하며,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국적이었던 슈바이처는 프랑스군에 의해 포로로 감금되었고 병원은 폐쇄되었습니다. 이후 유럽에서 강연과 오르간 연주를 통해 병원 재건을 위한 자금을 모았으며, 1924년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와 병원을 확장했습니다. 그는 의료 활동뿐 아니라 한센병 환자 거주지, 정신 장애인을 위한 시설도 마련하며, 36명의 백인 의료진과 수많은 현지 직원들과 함께 병원을 운영했습니다. 병원 운영 자금은 저서, 연주회, 강연, 기부금으로 충당했습니다.
1952년, 슈바이처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상금은 나환자촌 건립에 사용했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를 계속하며, “흑인의 아버지”, “원시림의 성자”로 불렸습니다.
슈바이처의 삶은 단순한 의료 봉사를 넘어, 인류애와 생명 존중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행복은 섬김을 통해 얻어진다”고 믿었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여 전 세계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윤광식 기자(kidok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