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수 영 목사(Ph.D, 조직신학, RTS)
최근(2026. 1. 17) 그리스도 S 교회에서 있었던 평신도신학 세미나에서 최신광 목사가 다락방 전도운동에 대하여 제기한 비판은, 다락방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어 왔던 문제들의 재현으로, 새로울 것이 없으며, 우리 다락방 측에서는 이미 그러한 비판들이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점을 충분히 밝혔던 사안들이다. 이처럼 재탕, 삼탕 반복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악의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다락방 전도운동에 대한 비판은 이제 소재가 고갈되었다는 인상은 비단 우리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최목사가 다락방에 대해 내세우는 비판들은 다락방 전도운동의 진의를 왜곡하고 그 본질을 외면한 매우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비판들이며, 다락방 전도운동의 본질에 무지하거나 피상적인 이해에 기반되어 있는 것으로, 현장성을 외면한 채, 신학 이론에만 머물러 있는 '외눈박이'식 비판임을 분명히 한다.
대부분의 주장들은 사안을 침소봉대하고, 자의적이고 추정적인 해석에 근거하여 다락방 전도운동을 비판함으로써 다락방 전도운동의 순수성을 호도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 교회는 물론 최목사 자신에게도 아무런 유익도 없는 비신앙적 행태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이에 다락방 전도운동에 대한 근거없는 일방적 주장들로 인한 폐해로부터 다락방 전도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교회와 속한 성도들을 보호하고, 한국교회의 기독교인들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반박문을 작성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최 목사의 논리는 다락방 전도운동의 '현장 언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정통 조직신학의 '박제된 잣대'로 재단한 전형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며, 그가 제기한 몇몇 주장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1. 인죄론(죄론)
최 목사의 주장:
최 목사는 다락방이 원죄를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라는 본질 대신 '사단에게 붙잡힌 상태'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락방이 창세기 3장 문제를 사단에게만 투영하여 인간의 전적 부패와 그에 따른 죄책(Guilt)을 희석하며, 결국 모든 죄의 원인을 외부 존재(마귀)에게 전가하는 '영적 무책임'에 빠져 있다고 주장한다.
다락방의 반박:
최목사의 비판은 다락방 전도운동을 비판하기 위한 인위적인 프레임을 구조화한 결과물이다. 다락방의 원죄에 대한 도식은 “원죄=사단에 잡힌 상태“로 설정되고, 이러한 허구적 프레임을 무기삼아, 다락방의 원죄 이해에 대한 본질을 오도하고 있다. 다락방 전도운동은 인간의 죄(원죄)와 죄책을 결코 부정하거나 약화시키지 않는다. 도리어 다락방 전도운동은 드러난 죄의 '현상' 너머에 있는 '영적 실재'를 폭로함으로써 참된 해방을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 성경은 죄인이 단순히 도덕적 실수를 범한 자가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 2:2) 아래 있음을 분명히 한다. 존 칼빈은 인류가 타락했을 때 사단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음을 강조하며, "사단은 인간의 마음을 자기의 거처 삼고, 그곳을 자기의 나라처럼 다스린다"고 밝힌다(기독교강요, 1.14.18). 칼빈의 논지는 "사단의 역사"를 말하되, 인간의 죄책과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훼손하지 않는 방향으로 정렬되어 있다(칼빈, 『기독교강요』 1.14.18, LCC 20, p.177).
다락방 전도운동에서 원죄의 결과로 '사단에게 붙잡힌 상태'를 강조하는 것은 칼빈이 말한 인간의 철저한 무능력과 영적 노예 상태를 현장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성경도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 8:44)라고 죄와 그 결과적 상태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분적 소속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며, 다락방 전도운동은 이를 통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답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락방 전도운동은 원죄의 본질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그로 인한 실존적 상태는 사탄에 장악되어 있음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겉으로 드러난 죄라는 행위적 현상 너머 배후에 역사하는 사탄의 실체를 분명히 하는 것이고 성경도 이 부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최 목사의 주장과 달리, 다락방 전도운동은 원죄는 첫 인류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것이며, 그 범죄 과정에서 사탄의 유혹이 있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을 떠난 상태로 표현한다. 여기서 ‘떠났다’는 말을 하나님으로부터의 공간적 이탈이 아닌, 영적 분리요, 관계의 파괴를 뜻하는 것이다. 다락방의 건전한 원죄 교리에 ‘사탄-프레임’을 덧씌워 건전한 전도운동을 신학적 오류라고 주장하는 것은, 반(反)신학적이고, 반(反)복음적인 악의적 행태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2. 마귀론
최 목사의 주장:
최 목사는 다락방의 마귀론이 하나님과 사단을 대등하게 보는 이원론적 경향을 띠며, 이는 베뢰아의 귀신론과 궤를 같이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사단의 권세를 지나치게 부각하여 성도가 하나님보다 사단을 더 의식하게 만들고, 성경의 모든 맥락을 영적 전쟁으로만 도식화하는 '신학적 편식'이 심각하다고 주장한다.
다락방의 반박:
다락방의 마귀론을 “하나님과 사단을 대등하게 보는 이원론적 경향”이라고 오도하는 최목사의 주장은 객관적 실체가 없는 주관적 확증 편향에 근거한 허구적이고 악의적인 주장임을 보여준다. 최목사는 다락방을 베뢰아의 귀신론과 등치시켜놓고, 무리하게 꿰어맞추기식으로 몰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의 주장과 달리 다락방의 마귀론은 이원론이 아니며, 헤르만 바빙크가 강조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 있는 악의 세력에 대한 정당한 인식인 것이다(바빙크, 『개혁교의학』 2권, p.618–619). 당연히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이나, 당연히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피조물인 것이다.
바빙크는 이와 관련해서 "사단은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는 피조물이나, 그리스도의 나라를 대적하는 실제적인 권세"임을 명시한다(개혁교의학, 3권). 현대 개혁파 신학자인 마이클 호튼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법정적 대속뿐만 아니라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는"(히 2:14) 승리의 측면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기독교 신학). 다락방 전도운동에서 ‘사탄’에 대한 언급이 많은 것은 현장 전도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며, 마귀에 대한 언급이 곧 마귀를 하나님과 대등하게 간주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다락방 전도운동은 마귀의 일을 멸하신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선포하여 흑암 세력을 꺾음으로써, 복음의 현장성을 회복한 것이다. 성경 요일 3:8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함으로써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개혁파의 정통 기독론의 핵심이며, 다락방은 이를 전도 현장의 실제적인 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락방 전도운동은 사탄의 권세를 지나치게 부각하지 않는다. 현장전도과정에서 영적으로 시달리고 멸망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배후에 역사하는 사탄의 역사를 분명히 알게 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그것을 꺾고 이기는 길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락방 전도운동을 비판하기 전에, 다락방 전도운동이 무엇이며, 그 본질이 무엇인지 겸손한 마음으로 배워야 할 것이다.
3. 구원론
최 목사의 주장:
최 목사는 다락방이 "모든 문제 끝"을 강조하며 칭의에만 매몰되어, 성화와 회개를 경시하는 구원파적 오류에 빠졌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신학이 성도들로 하여금 도덕적 해이를 정당화하게 하며, 신앙생활의 인격적 변화와 성숙을 방해하는 '반율법주의(Antinomianism)'의 온상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락방의 반박:
다락방이 "다 이루었다"를 강조함으로써 칭의에만 매몰되어, 성화와 회개를 경시하는 구원파적 오류에 빠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락방 전도운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천박한 오해에서 비롯된 지독한 오류이다. 다락방 전도운동에서 “다 이루었다”는 요한복음 19:30절에 근거하는 것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CF)가 선언하는 구원의 완전성에 근거한 것이다. WCF 11장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셨음을 명시한다. 다락방은 이 '확정된 승리'를 누릴 때, 진정한 회개와 성화가 비로소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는' 것임을 가르친다. 특히 다락방 전도운동은 '다 이루었다'라는 칭의 교리를 현장의 전도과정에서 적용함으로써 죄와 그에 따른 저주와 고통에 빠진 사람들에게 완전한 '해방'을 선언하고 치유한다.
그러나 칭의의 완전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성화적 국면을 약화시키고 도덕적 해이를 정당화하게 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며, 학문적 엄밀성을 생명으로 삼아야 할 신학자로서 심각한 논리의 비약이요, 주관적 억측에 기반한 헛된 주장임을 분명히 밝힌다. 다락방 전도운동은 '전도자의 삶'이라는 훈련 시스템을 통해서 매일 하나님 앞에서 먼저 하나님의 계획을 묻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답을 얻으며, 하나님이 위에서 주시는 힘으로 살아가는 루틴을 갖는다(전도자의 삶, 3오늘). 이는 칭의 이후에 일어나는 전형적인 성화의 삶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는 약속에 근거한 칭의된 신분은, 3오늘의 삶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삶(성화의 삶)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다락방 전도운동은 칭의를 실제적으로 강조할 뿐 아니라, 명백히 '칭의 이후 성화(점진적 성화)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개혁파 신학자 존 머레이는 성화의 근거가 인간의 노력이 아닌 "그리스도와의 연합"(머레이,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 "Sanctification"장 서두 및 전개, PDF p.46–48; "Union with Christ" 장, PDF p.52–54)에 있음을 강조한다. 다락방의 "되어지는 성화"는 머레이가 주장한 "결정적 성화(Definitive Sanctification)"가 삶 속에서 점진적으로 나타나는 과정을 의미하며, 이러한 다락방 전도운동의 '되어지는 성화' 개념에 대한 강조는 성경적으로도 지지를 받고 있다. 곧 로마서 8장 2절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말씀하고 있으며, 다락방 전도운동은 해방된 신분이 주는 영적 힘이 성화의 유일한 동력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최 목사는 “모든 문제 끝(요19:30)=칭의론에매몰=반율법주의”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다락방을 공격하고 있으나, 이는 인위적이고 악의에 찬 허구적 프레임일 뿐, 다락방 전도운동의 진실에 조금도 부합하지 못한다. 다락방 전도운동은 앞서 밝혔듯이, 칭의를 현장화, 실제화하여, 믿는 성도들에게 참된 해방된 신분임을 알게 하여, 확신 가진 신앙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다락방 전도운동은 해방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남은 죄성을 분명히 직시하며, 복음을 각인, 뿌리, 체질화할 수 있도록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집중할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다락방 전도운동이 칭의 이후, 성화적 국면을 얼마나 건전하게 강조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4. 교회론
최 목사의 주장:
최 목사는 다락방의 조직이 지역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류광수 목사 1인 체제의 "파라 처치(Para-church)"를 우상화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교회 내의 권징이 상실되고 모든 질서가 본부 메시지에만 종속되어, 개별 교회의 자율성과 목회적 다양성이 완전히 고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락방의 반박:
다락방은 최목사의 주장처럼 지역 교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세상 현장을 살리는 선교적 본질을 회복하도록 돕는다. 이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영역 주권' 사상을 전도 현장에 적용한 모델이다. 카이퍼는 하나님의 주권이 교회 건물 안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임해야 함을 가르친다. 그래서 망대운동으로 대변되는 다락방 전도운동은 성도가 처한 모든 삶의 현장에 망대를 세우는 파라처치 운동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영역 주권 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며, 칼빈 역시 교회를 "신자들의 어머니"로 보았으나, 동시에 교회의 본질이 복음 전파에 있음을 강조하는 바, 다락방 전도운동은 교회의 참된 본질인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를 구현하는 전도운동인 것이다.
특히 다락방의 5기초(다락방, 팀사역, 미션홈, 전문교회, 지교회 등)는 교회의 기능을 현장 구석구석으로 확장하여 성도 개개인을 '움직이는 성전'으로 세우는 것이다. 이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행 2:46)에서 알 수 있듯이, 성전(로컬)과 집(현장/파라)의 유기적 조화는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는 교회의 참된 모습인 것이다.
따라서 최목사가 말하듯 다락방의 조직이 지역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주장은, 교회의 실상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채, '교실'에서 배운 이론적 잣대로, 현장에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와 생명의 역사를 자의적으로 재단하는 오류임을 분명히 밝힌다.
5. 성경관
최 목사의 주장:
최 목사는 다락방이 '망대'와 같은 용어를 자의적으로 성경에 대입하여 해석함으로써, 성경의 본래 맥락을 훼손하고 리더의 전도 전략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삼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이 성경보다 메시지를 우위에 두는 '현대판 영지주의'라고 공격한다. 또한 극히 일부의 성경주해의 문제를 배경으로 다락방 전도운동에서 나오는 메시지 전체를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다락방의 반박:
최목사의 주장은 성경을 이분법적으로 오해하는데서 비롯된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는 성경과 현장, 말씀과 역사(History)를 분리 시켜서 성경을 이해한다. 반면 하나님은 언제나 세상 속에 임재하시며 만사를 섭리하신다. 출애굽의 역사, 광야 40년 역사, 가나안 정복의 역사가 모두 현장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단순히 현장이 아닌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논리는 일견 옳아 보이지만, 깊은 논리적 함정을 감추고 있다. 성경과 현장을 이분법접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근세 이신론의 재현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세계와 하나님을 분리시키고,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했던 근대 계몽주의 사상의 한계를 떠올리게 한다.
다락방의 메시지는 성경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내적 조명을 통해 기록된 말씀이 오늘날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있는 답'으로 성취되는가를 선포하는데 집중한다. 성경의 말씀을 이론이 아닌, 현장에서 성취를 확인하는 구조이다. 칼빈 역시 "말씀은 성령의 조명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봉인되어야 한다"고 말한다(기독교강요, 1.7.4). 다락방의 '시대적인 전도 전략'은 문자 배후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현장에서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라고 밝히고 있다. 성경은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현장을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능력이기에, 시대적 용어로 재해석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최목사는 이렇게 재해석된 결과를, 마치 성경보다 해석된 메시지를 우위에 둔다고 오독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거기다가 맥락도 없이 '현대판 영지주의'라는 해괴한 용어로 덮어씌우는 것은 전형적인 견강부회에 다름 아니다. 신학용어를 끌어다 씀으로써 신빙성 있는 전문적 견해로 포장하지만, 사실은 아무 내용도 없는 곡학아세의 전형인 것이다.
특히 최목사는 다락방이 '망대'와 같은 용어를 자의적으로 성경에 대입하여 해석함으로써, 성경의 본래 맥락을 훼손하고 리더의 전도 전략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삼는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성경해석의 기초를 모르는 주장이다. 아가서는 시가서에 해당한다. 시가서는 율법서나 역사서와는 다른 해석방법을 필요로 한다. 시가서 내용은 율법으로 보아서도, 역사적 사실로 읽어서도 안 되는 책이다. “다윗의 망대, 곧 방패 천 개,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1천개의 망대라는 의미는 분명히 아니다. 이는 무수히 많고 화려한 승리의 전리품을 의미한다. 이 방패들은 과거 용사들의 승리 기념물인 것이다. 다윗 왕조의 군사적, 왕권적 상징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천은 숫자 천이라기보다는 완전함, 충분함을 나타낸다.
다윗의 망대에는 실제 전쟁과 싸움을 통과한 방패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것을 신약적으로 확대해석하면, 성도 하나하나는 세상이라는 영적 전쟁터로 나가는 용사와 같다고 할 수 있다(딤후2:3-4; 엡6:10-18). 성도가 하나의 방패를 들고 싸우는 용사라면, 용사 하나하나는 세상에서 세상을 이기는 '망대'가 된다. 망대 자체가 견고한 요새요, 승리의 상징이듯이, 성도 개개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이기는 ‘망대’가 되는 것이다. 더나아가 성도가 모인 교회는 수많은 방패들이 걸린 더 큰 ‘망대’가 된다. 따라서 ‘1천 망대’라는 용어는 아가서의 내용을 심화하는 것이고, 망대 개념을 성도 개개인으로까지 확대 적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의미를 갖추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경 해석과 적용을 맥락훼손으로 호도하고, 성경보다 메시지를 우위에 두는 ‘현대판 영지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언어도단이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 최 목사의 비판은 성경해석의 깊은 차원을 이해하지 못한 채, 형식적인 문자주의에 빠진 터무니없는 오류임을 분명히 한다.
글을 맺으며,
최 목사의 비판은 다락방이 지향하는 '현장적 복음의 특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안일한 종교적 틀로, 연구실 신학에 갇힌 이론적 잣대로 성경적인 전도 운동을 재단하려는 무모한 오류에 다름 아니다. 다락방 전도운동의 신학은 마이클 호튼의 말처럼 "신학이 선교적(Missional)이지 않다면 그것은 참된 신학이 아니다"라는 명제에 가장 충실한 현대적 실천임을 분명히 하면서, 최 목사가 아무런 유익도 없는 다락방 비판에 기대어 다락방을 이탈한 것에 대한 자기변명 거리를 삼고, 신학자의 생명을 연명해 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신학자의 양심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건전한 신학자의 길을 갈 것을 간곡히 충고한다.
2026. 2. 1. 오 수 영(Ph.D, 조직신학, RT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