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리고의 밤은 깊었지만, 성문 곁에 자리한 라합의 집은 꺼지지 않는 등불로 붉게 타올랐다. 거친 사내들의 웃음소리, 독한 포도주 냄새, 그리고 분칠 뒤로 감춘 서글픈 한숨. 그것이 라합의 세상 전부였다.
성벽 위, 버려진 이름 ‘창녀 라합.’
사람들은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낮에는 고결한 척 침을 뱉던 성안의 귀족들도, 밤이 되면 늑대처럼 변해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여리고의 거대한 성벽 틈새에 매달린 그녀의 집은 마치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그녀의 인생과 닮아 있었다. 남자들의 욕망을 채워주며 입에 풀칠을 하는 비참한 삶이었지만, 라합의 영혼까지 탁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매일 밤 손님들이 취중에 뱉어내는 기이한 소문에 귀를 기울였다.
"이봐, 들었어? 그 히브리 노예들이 믿는 신이 홍해를 갈랐대!“
"바다가 갈라졌다고? 미친 소리!“
"진짜야!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을 단숨에 쓸어버렸다더군. 이제 그들이 이 요단강 건너편까지 당도했어. 여리고도 안전하지 않아…….“
사내들은 두려움에 떨며 술을 들이켰지만, 라합의 심장은 다르게 뛰기 시작했다. 광야를 건너온 이방 민족, 그리고 그들을 위해 바다를 가르고 길을 내는 신(神).‘상천하지(上天下午),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오직 그분만이 진짜 신이시구나.’ 거대한 여리고 성벽도, 풍요를 자랑하는 바알의 신전도 모두 허상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매일 밤 저 멀리 캄캄한 광야를 바라보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신에게 나지막이 기도를 얹었다. 이 지긋지긋한 진흙탕 같은 삶에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목숨을 건 도박(정탐꾼 구출 작전), 그리고 붉은 줄
"쾅! 쾅! 쾅!“
거친 문고리 소리가 라합의 방 가득 울렸다. 방금 전 들이닥친 두 명의 이스라엘 정탐꾼은 이미 여리고 왕의 군사들에게 발각된 상태였다. 숨소리마저 가쁜 사내들의 눈에 절망이 서렸다. 잡히면 능지처참이었다.
"여기다! 성문을 닫기 전 낯선 자들이 들어갔다는 밀고가 있었다!“
마당에서 들리는 군사들의 쇠갑옷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라합은 차분하게 두 사내의 덜덜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내 뒤를 따르시오. 어서!“
그녀는 두 사내를 이끌고 가파른 계단을 뛰어 올라가 평평한 지붕으로 향했다. 지붕 위에는 마침 겉껍질을 벗겨 말려두었던 거친 삼대 더미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라합은 사내들을 바닥에 엎드리게 한 뒤, 그 위로 무거운 삼대를 정신없이 덮어씌웠다.
"절대 숨소리도 내지 마시오.“
라합은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고, 분칠한 얼굴에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문을 열었다. 칼을 빼 들고 눈을 부릅뜬 여리고의 군인들이 그녀의 목덜미에 칼날을 들이밀었다.
"히브리 놈들이 이 집으로 들어왔다는 첩보가 있다. 어디에 숨겼느냐!“
칼끝이 살을 파고들 만큼 긴박한 순간이었지만, 라합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살짝 비웃음을 흘렸다.
"아이구 나리, 무섭게 왜 이러십니까? 과연 수상한 사내 둘이 오긴 했었지요. 하지만 성문을 닫기 직전에 급히 허겁지겁 나갔답니다. 어두워서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빨리 쫓아가시면 성문 밖 요단 나루터 길목에서 잡으실 수 있을 걸요?“
라합의 목소리에는 티끌만 한 떨림도 없었다. 군인은 그녀의 뻔뻔하고 자연스러운 연기에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추격조는 지금 당장 나루터로 달린다! 성문을 닫아라!“
군사들이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골목 저편으로 사라지자, 라합은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붕 위 삼대 속에서 기어 나온 두 사내는 등 뒤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창녀라는 신분 뒤에 숨겨진 여인의 담대함과 지략이 이스라엘의 두 목숨을 살려낸 순간이었다.
무너지는 여리고 성벽, 홀로 남은 구원의 집
몇 주 후, 거대한 함성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온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를 에워쌌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 싸우지 않았다. 그저 하루에 한 번씩, 묵묵히 성을 돌 뿐이었다. 여리고성 사람들은 미친 짓이라며 조롱했지만, 라합은 가족들을 제 집 안으로 가두고 숨을 죽였다.
마침내 일곱째 날, 일곱 번째 성을 돌고 난 후 제사장들의 양각 나팔 소리가 하늘을 찢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대한 외침이 이어졌다.
"와아아아아-!“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여리고의 거대한 성벽이 거품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굉음과 비명, 흙먼지가 하늘을 가렸다. 성 안의 모든 집들이 무너져 내릴 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오직 창문에 붉은 줄이 매달려 있던 라합의 집이 붙은 성벽만은 지진 속의 바위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정탐꾼들이 먼지를 헤치고 들어가 라합과 그녀의 가족들을 이끌어냈다.
여리고의 화려했던 문명이 잿더미로 변하는 순간, 가장 천대받던 창녀 라합은 살아남았다.
경계선 위의 이방인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구출된 라합과 그녀의 가족들은 이스라엘 진영의 외곽에 텐트를 쳤다. 목숨은 건졌지만, 진짜 지옥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쉿, 저기 좀 봐. 여리고에서 온 그 기생 창녀야.“
"부정한 이방 여자가 우리 거룩한 진영에 고개를 들고 다니다니, 소름이 돋는군.“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갈 때마다 여인들의 수군거림이 송곳처럼 라합의 심장을 찔렀다. 이스라엘 여인들은 그녀가 지나갈 때면 부정 탄다며 치맛자락을 거두었고, 아이들은 침을 뱉었다. 비난은 여리고성에서 듣던 욕설보다 더 아팠다. 철저한 율법 공동체인 이스라엘에서 이방인이자 몸을 팔던 여인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가족들마저 "차라리 여리고와 함께 죽는 게 나을 뻔했다"며 매일 밤 울부짖었다.
라합 역시 밀려오는 소외감과 정체성의 혼란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제가 잡은 붉은 줄은 가짜였습니까? 당신들의 신은 오직 히브리인만의 신입니까?‘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라합의 텐트를 찾아왔다. 여리고에서 그녀가 목숨을 걸고 살려주었던 정탐꾼 중 한 명이자, 유다 지파의 지도자인 살몬이었다. 살몬은 차가운 시선에 멍든 라합의 손에 따뜻한 떡을 쥐여주며 말했다.
"라합, 사람들의 말에 낙심하지 마시오. 당신이 우리를 숨겨주었을 때 고백했던 그 믿음을 기억하오. 거대한 여리고성 사람 모두가 하나님을 거역할 때, 오직 당신만이 그분을 믿었소. 당신은 더 이상 가나안의 창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오.“
살몬의 흔들림 없는 눈빛과 지지는 라합에게 다시 살아갈 용기를 주었다. 라합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에 도망치는 대신, 이스라엘의 율법을 배우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온 마음을 다했다. 진흙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피어나는 그녀의 고결한 중심은, 결국 유다 지파 전체의 마음을 돌려놓았고 마침내 살몬과의 거룩한 결혼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에필로그: 족보에 새겨진 영광
마태복음 1장, 가장 거룩하고 고결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한 여인의 이름이 당당히 기록된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라합은 세상이 새긴 주홍 글씨 '기생'이라는 낙인을 지우고, 믿음이라는 붉은 줄을 잡아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의 직계 조상이 되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여인을 가장 높은 곳으로 들어 쓰신 여호와 하나님의 드라마, 그것이 바로 라합의 위대한 인생 역정이었다./ 발행인 윤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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