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펜데믹으로 ‘주일성수 퇴색‘
∎코로나 언택트 시대는 성경공부를 통한 전도운동 일어나야
▴예장개혁 총회가 주최한 ‘코로나 언텍트시대의 한국교회 방향’ 세미나에서 강연 중인 강춘오 목사
코로나19 팬데믹이 가져온 한국교회의 손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우리 사회 그 어느 기관보다 큰 피해를 입었다. 더구나 방역당국의 대면예배 금지조치가 교회에 끼친 부정적 영향은 너무나 깊다. 백신 접종으로 금년 하반기가 지나면서 팬데믹 상황이 풀린다 하더라도 교회의 회복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사실 방역당국이 걸핏하면 교회를 표적으로 옥죄는 동안 세속 언론들의 무분별한 보도는 마치 교회가 코로나19의 진원지 마냥 떠벌여 그 내용을 잘 모르는 우리 시민사회로부터 교회가 더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질병관리청의 지난 1년간 코로나19 확진자 감염원 발표는 교회발 확진자가 11%로 나타났다. 이조차도 모두 교회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고 밖에서 전염된 것이다. 그러나 국민여론은 교회발 확진자가 44%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목회데이터연구소).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가. 그것은 방역당국이 만만한 교회를 희생양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급락했다는 조사도 있다. 이 문제는 언젠가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교회는 그들만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제 새롭게 교회의 부흥을 꿰해야 한다. 이것이 도전에 대한 응전이다.
백신맞은 사람 예배드려도 문제없는데 문닫아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령'과 '성경'이 이끌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시대마다 두 가지 주체에 의해 이끌려왔다. 하나는 '성령'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이다. 초대교회는 성령이 사도들을 부흥 현장으로 내몰았고, 중세교회는 성경이 부흥 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역사적 기독교는 곧 4세기 초부터 교리 논쟁에 휩싸여 8세기 말엽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도그마와 교권이 성령의 역사도, 성경의 감화도 통제하고 억압하기 시작했다. 평신도는 교권을 가진 교회의 허락 없이 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다. 교권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이단으로 매도되는 '이단 정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역사는 이 시기를 중세 가톨릭의 암흑기라 부른다.
이때 다시 역사에 새로운 빛을 비취기 시작한 것은 성경이었다. 종교개혁의 명분은 언제나 '오직 성경'이었다. 개혁파가 금과옥조로 여기고 '개혁신앙' '개혁신학' '개혁주의'니 하는 구호를 외치는데, 이 개혁의 기본은 성경을 바로 가르치는 데 있는 것이다.
다시 19세기에 과학과 인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자유주의와 고등비평에 의해 성경이 공격을 받았다. 그러자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현대오순절 성령운동이 일어나 세계교회를 이끌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에서 일어난 대중전도와 부흥운동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전 세계로 퍼져갔다. 한국교회의 성장에도 이 현대오순절 성령운동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이제 코로나 언택트 시대에는 대중부흥운동보다, 심도있는 성경공부를 통한 전도운동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이젠 성경공부로 그 내실을 다져야 한다. 특히 팬데믹으로 위축된 교회를 바로 세우는 데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복음에 대한 흔들림 없는 교인이 되게 해야 한다. 성경을 제대로 깨달은 자는 반드시 모두 스스로 전도자가 된다. 먼저 소수 정예에게 성경을 가르치다 보면 어느 날 교회 안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 한국교회를 살리는 새로운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 믿는다.
이단방지를 우해서도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교회를 찾아보기 어렵다, 언제 부터인지 성경공과 사라지고 성경공부를 안하고 있다.
퇴색되어 가는 '주일성수'
코로나19 팬데믹이 우리 사회의 미풍양속도 바꾸고 있다. 어떤 사정으로 집안이나 동료의 장례식이나 결혼식 등에 참석하지 못하면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코로나가 이런 전통을 바꾸어 놓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가 교회에 끼친 가장 큰 해악 중에 하나는 주일성수 개념을 바꾸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주일 날 예배당에 못나가면 죄를 범했다는 생각에 하나님 앞에 죄스런 마음이 있었는데, 코로나 정국에서 주일예배를 빼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은 교인들이 예배당에 모여 드리는 예배를 국가권력이 일방적으로 금지시킨 데 있다.그래서 교회가 궁여지책으로 도입한 것이 비대면 온라인 예배 아닌가? 이 온라인 예배는 '주일성수' 개념을 크게 퇘색시켰다. 엿새동안 일하고 주일에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성도들의 일상으로 알고 있던 한국교회가 방역당국의 강압적 조치로 주일 날에도 더 이상 예배당에 모일 수 없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도, 6.25 전쟁 중에도 주일 날에는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주일성수를 생명처럼 소중히 여긴 한국교회의 전통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사태 상황에서 방역당국의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대면예배 금지 조치로 교인들이 '집에서 주일예배를 드려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찮아도 주일 날 특정 교회의 예배시간을 방영하는 케이블TV들로 인해 교인들의 교회 출석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비판도 있는데, 각 교회마다 비대면 온라인 예배를 도입하면서 온라인 예배가 고착화 되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비대면 예배는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보는 예배' 곧 '시청하는 예배'로 전락할 수 있다.
예배는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교인 간의 교통, 즉 친교가 없으면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는 고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는 이 땅에서만 아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새예루살렘에 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한 공간에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성도의 교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주일성수 퇴색은 성도교제를 막고 있다.
한국사회의 주류종교로서의 기독교
오늘날 한국 사회를 다종교 사회라고 한다. 세력이 엇비슷한 종교전통이 여럿 공존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는 누가 뭐라 해도 기독교가 사회 각계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아직도 문화적 영역에서는 타종교에 비해 그 영향력이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교회당 수가 6만 개, 전임 목회자가 15만명, 신도 수가 1000만명이 넘는 기독교가 그 덩치에 비해서 우리 사회를 변화 시키는 힘이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각'(自覺)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사회의 많은 지성인들이 정신적 아노미 현상을 겪고 있고, 기독교인들이 사회 주도 영역에서 그 삶을 기독교적 가치관과 연결시키지 못한 채 그 신앙이 삶의 현장과 유리되어 있는 것은 우리 교회가 제대로 사회 변회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곧 가족과 집안의 만사형통하고 복 받는 것으로 기독교인 행세를 다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것은 생명력 없는 대량복제 교인들을 양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는 개인이 복 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영육(靈肉)의 온전한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우리 사회와 온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삶의 우선 순위가 달라야 한다. 개인이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에게 더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아직도 기복주의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극복되어야 할 한국기독교의 기복주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회적 규범은 주류종교의 가치관에서 나온다. 기독교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주류종교로서의 사명을 다하려면 기복주의(祈福主義)를 극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건강한 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 앞서 우리 사회에 전래된 대표적 고전 종교들이 모두 기복주의로 인해 생명력을 잃고 그 허울만 남아 미신화 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기복주의는 마치 에덴동산의 선악과와 같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하지만, 종교가 거기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한국기독교가 성장주의와 경쟁의 시대를 거치면서 목회자들이 자신들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교인들의 욕망에 영합하고, 그들의 현세적 충족을 위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한국기독교도 이미 기복화 되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기복화 된 기독교라면 불교나 무교나 다를 바 없는 데, 구태여 기족간, 이웃간, 동료간 문화충돌을 경험하면서까지 기독교인이 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기독교는 생명운동이다. 생명은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복음에 있다. 복음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라고 말씀하고 있다.
소시민들의 육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기복주의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선언하고 있다. 1000만이 넘는 신도를 자랑하고 있는 한국기독교가 과연 민족복음화에 성공하고 있는가? 아니면 복음화라는 미명하에 새로운 기복집단을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물음은 미래의 한국교회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물음이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두 바퀴와 같이 믿음과 행함(신행:信行)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信)은 곧 무엇을 믿는가 하는 교리(敎理)의 문제이고, 행(行)은 곧 그 믿는 바를 어떻게 행하는가 하는 삶(生活)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신행이 일치된 삶이 곧 바른 신앙인 것이다. 믿는 교리는 바른데 그 생활이 그 교리대로 살지 못한다면 그 신앙은 '사이비' 신앙인 것이고, 생활은 흠잡을 데 없이 모범적인데 교리가 바르지 못하다면 그 신앙은 '이단'인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 형태는 어떤가? 대체로 그 교리는 성경의 근본주의와 개혁주의 신앙을 보수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신앙생활은 다분히 기복주의적이다. 불교나 민족종교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집안 식구들이 무병장수 하고 , 돈 잘 벌어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하나님의 빽(축복)을 빌리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모든 소시민들의 소망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기독교인의 삶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의 가치관을 가르치는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 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이다. 여기 어디에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말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신의 세속적 유익을 위해 이용하는 기복주의적 신앙생활은 사이비적인 것이다.
성경공부가 답이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어떤 상황에 처하든 교인들에게 성경을 바로 깨닫게 해야 한다. 성경에 생명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법칙도 신구약 성경에 간직한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한국교회는 참으로 신기한 기록을 많이 가진 교회이다. 교인들이 성경책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교회 약 1천만 명의 교인들이 가진 성경이 각 가정이나 교회에 줄잡아 3천만 권은 넘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매일 성경을 읽고 그 성경을 깨닫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뿐만 아니라 교회도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등한하다. 요즘은 설교 시간에 설교 본문을 스크린에 띄우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다보니 교회에 올 때도 성경을 굳이 들고 다닐 필요가 없게 되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육신을 쫓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쫓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일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느니라"(롬 8:5-8). 육신의 일은 무엇인가? 이것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쫓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쫓아 온 것이라"(요한1서 2:16).
성경을 바르게 깨달은 자는 세상과 인생을 보는 세계관이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다르게 된다. 삶의 가치관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그럴 때 비로소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사는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 19세기 덴마크의 그룬트비 목사처럼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도로 찾는 운동'을 성경공부를 통해 대대적으로 벌여가자.
그래야 한국교회 미래가 있는 것이다.. / 윤광식 기자(kidok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