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는 『세상의 틀을 바꾸는 CVDIP 리더십』의 기본 개념을 설명했다. 이번호 부터는 역사의 위인 7명을 통해 이들이 세상을 변화시켰던 CVDIP리더십을 게재한다. 첫 인물로 중세교회 개혁의 선봉에 섰던 ‘루터의 CVDIP 리더십’을 다루고자 한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원문과 달리 일부 편집한 점이 있음을 밝혀둔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
1. 마틴 루터의 언약의 여정(Covenant Journey)
“나는 너무 할 일이 많아서 아침에 기도로 세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생각 및 포럼
철옹성인 카톨릭에 저항하며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는 24시간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아래 영상처럼 너무 바쁘고 할 일이 많아서 매일 아침에 3시간씩 기도해야만 했다고 고백한다. 내가 그런 상황이라면 나도 3시간씩 매일 기도할 수 있을 것인가?
∎인생 스토리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독일의 가톨릭 신부(사제; 司祭, priest)이며 신학 교수로서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역사적 인물이다.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교수 였던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여러 잘못된 가르침과 전통을 강하게 비판했다.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대사(大赦)의 오용과 남용을 강하게 성토하였다. 특히 로마 교황청이 면죄부까지 판매하는 지경에 이르자 마침내 1517년 95개 반박 논제를 게시함으로써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이 타락하여 루터 전에도 종교개혁을 외치는 선각자들이 있었다. 존 허스(John Hus; 1369경∼1415)가 대표적이다. 그는 콘스탄스 종교회의(종교재판의 법정 역할을 함)에 의해 이단으로 재판을 받고 콘스탄스시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루터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보름스 제국의회장 카를 5세 황제 앞에 섰다. 주님이 바울에게 하신 말씀인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리라(행 27:24)”는 말씀처럼 루터는 황제 앞에 당당히 섰다.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을 언약(Covenant) 으로 굳게 잡았다. 루터는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굳건한 언약의 바탕위에서 교황청과 황제의 협박과 파면에도 굴하지 않았다. 루터는 라틴어로 되어있는 성경을 번역하여 모든 성도가 볼 수 있게 하였다. 결국 타락한 로마 가톨릭의 비진리에 항거하여 진리의 횃불을 높이든 루터의 CVDIP 리더십은 중세 암흑종교를 복음으로 바꿨다.
∎루터의 출생과 학창시절
말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아이스레벤(Eisleben)이라는 마을에서 출생했다. 루터의 부모(한스 루터; Hans Luther와 마가레타 루터; Margaretta Luther)는 처음에는 농부였다. 후에 그의 부모는 맨스필드(Mansfield)에서 구리 광산업을 경영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했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엄격한 가톨릭 신앙의 소유자였고 경건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학창시절 루터는 마그데부르그(Magdeburg)와 아이제나하(Eisennach) 라틴어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중세 수도원적인 공동생활의 영성과 프랜시스 교단의 영성을 배우게 되었다. 특별히 그는 에르푸르트(Erfurt; 1501~1505)대학교 예술대학에서 인문과학 학사과정(예술사 학위)을 마쳤으며, 문법, 수사학,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윤리학과 형이상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어거스틴과 신비주의 저서들을 접하면서 인문주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루터는 1505년(22세)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에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다.
2. 루터의 CVDIP 리더십
∎COVENANT: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롬 1:17)”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대로 사는 목회자”
사실 루터가 이 말씀을 언약으로 붙잡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있었다. 1510년(루터 27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이에 대한 교황의 자문을 받으러 루터가 선발되어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다. 루터는 교황의 자문을 받는 사무를 마친 후 모든 시간과 정력을 성자의 공로를 힘입어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바쳤다. 성당에서 매일 미사를 드리고 카타콤과 유적들, 로마에서 유명한 곳은 미친 듯이 찾아 다녔다. 그는 라테란 성당을 찾아가 28계단으로 된 ‘빌라도의 계단’을 손과 무릎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빌라도의 계단
빌라도 계단은 콘스탄틴 황제의 모친 헬레나가 예루살렘 계단을 본 따서 로마에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어, 누구든지 맨 무릎으로 그 계단을 오르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맹신하게 하였다. 중세교회가 빌라도 앞에서 그리스도가 올라섰던 이 계단을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 연옥에서의 형벌이 감해진다고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세에는 천국에 이르는 길을 사다리처럼 생각했다. 신앙의 입문은 사다리 맨 밑이고, 신앙이 깊은 이들은 사다리 윗 편에 있었다. 그들은 한 계단씩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신앙의 수준은 앞에 나열한 선행들을 통해 한 단계, 한 단계 쌓여져 갔다. 그러나 루터가 계단마다 주기도문을 외우고 입을 맞추면서 피로 얼룩져가며 맨 무릎으로 28계단을 다 올라갔으나 그의 마음에는 아무런 평안이 없었다. 예수께서 심문받기 위해 끌려 나오실 때 빌라도가 서있었다는 계단을 성인들의 이름을 부르며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애써 기어올랐으나 그에게 남는 것은 구원의 기쁨과 평안함이 아니라 허탈감과 강한 의문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구원에 대한 번뇌가 커다란 깨달음으로 찾아왔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이 그의 가슴을 때렸다. “믿음이 중요하지 도대체 이런 행위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날 빌라도 계단에서 루터에게 강하게 각인된 로마서 1장 17절의 복음 성구는 루터의 평생 ‘언약(Covenant)’이 되었다. 이 언약은 종교개혁의 제일 모토인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나타났다. 로마서 1장 17절의 복음성구가 각인되어 로마에서 돌아온 그는 그 복음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서 뿌리 내리고 기도로 체질화하였다. 로마서 1장 17절의말씀은 종교개혁가 루터가 잡은 ‘언약(Covenant)’으로 유명한 성구가 되었다.
∎ VISION: “비진리에 항거하여 오직으로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드는 종교개혁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영광”
[가톨릭 교회 및 교황의 타락과 루터의 저항]
시대를 올바르게 바라보면 참된 비전이 보인다고 당시 중세 교회의 타락과 부패는 루터로 하여금 개혁의 횃불을 들도록 강요했다. 큰 깨달음을 얻고 로마에서 돌아 온 루터는 바뀌고 있었다. 그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묵상하고 각인시켰으며 기도로 뿌리내렸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고 참된 은혜의 복음을 각인하게 되었다.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가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며 선물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루터가 로마서를 연구하고 강해를 시작 했을 때 이 문제는 더욱 분명히 부각되어 왔다. 루터는 로마서 강해를 통해 구원이 어떤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며,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인한 죄 용서를 약속해 주신 데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하여 죄인을 의롭게 여기신다(롬 1:17, 4:5)는 깨달음이 왔다. 루터는 마침내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에서 죄인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됐다. 즉 대가없는 용서의 복음인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의존과 신뢰에 의해서 의롭게 됨을 알게 됐다. 그는 이 본문을 읽고 또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무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 대신 우리를 용납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 말씀은 루터에게‘ ’이신칭의’(以信稱義;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음) 사상이 되어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는 ‘언약적 비전(Covenant Vision)’이 되었다.
그 후 루터는 1511년(28세)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옮겨 1512(29세)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수도원 부원장이 되었다. 1513년(30세) 성서학 교수가 되어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등 주석 강의를 시작하였다. 이때 루터는 새로운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얻고 은혜와 신(神) 앞에서의 의로운 신앙을 새롭게 정립하게 된다. 루터는 이미 비텐베르크 대학의 그를 지지하는 모든 교수들의 선두주자이었으며 명실상부한 대표자가 되어 있었다. 루터가 강의를 시작한 1513년(30세) 이후 그는 점차 스콜라주의 신학에 반대하면서 스콜라주의 신학의 기초가 된 펠라기우스주의, 곧 인간의 선천적 본성인 자유의지의 결단과 노력과 선행의 열매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신학에 대하여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는 어거스틴 신학에 입각하여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받음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고 깨달은 루터의 눈에 비친 당시 로마 교회의 모습은 성경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명상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새로운 발견과 깨달음을 통해서 당시 로마교회를 바라보니 로마 교황청이 행하고 가르치는 것들이 성경말씀과 너무나 괴리감이 있었다. 루터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Solus Christus)’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오직 은혜(Sola Gratia)’를 베풀어 구원하신다는 놀라운 진리를 재확인하게 됐다. 이제 루터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벼락을 때리는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었다. 루터는 후에 기록하기를 그때 이태리 사제들의 무식함과 경박함과 부도덕과 불신앙을 목격하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했다.
실제로 로마 교회의 시대상황은 이러한 루터의 깨달음과는 전혀 반대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 당시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여 이미 100년 이상이나 공사하여 왔지만 아직도 완공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교황 레오 10세(Leo X)는 이전 교황들의 뜻을 계승하여 성당을 신속히 완공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 때 부터 성행하던 면죄부(免罪符, indulgence)가 성당 건축 재원으로 활용되었다. 면죄부란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 만큼 선행을 쌓지 못했다면 교황이나 로마 교회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선행을 사는 것이다. 그 선행을 사면 내가 천국 가기에 모자란 선행이 더해지기에 천국에 갈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 많은 돈을 거둬들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돈으로 구원과 천국 가는 표인 면죄부를 사는 것이다.
한편 독일에서는 할베르슈트와 마그데부르그의 감독인 부란덴부르그의 알버트가 관습에 어긋나게 그 당시 공석이 된 가장 큰 교구인 마인츠 (Mainz)의 감독직까지 겸직을 받으면서 교황 레오 10세에게 10,000 두캇(ducats)을 상납했다. 알버트는 그 돈을 은행에서 빌려서 교황에게 상납했고 교황은 8년 동안 면죄부를 팔아서 반은 은행 빚을 갚고 반은 성당건축헌금 내도록 했다. 알버트 감독은 면죄부 판매와 수금을 위해 도미니칸 교단의 수사이며 웅변가인 텟젤(John Tetzel)을 선정했고 그는 면죄부의 효력을 지나치게 과장했다.
로마가톨릭의 그 말로 다 할 수 없는 거짓과 속임수와 그리고 온갖 위선을 알게 된 루터는 결코 침묵할 수 없었다. 그는 많은 무지한 사람들을 어두움의 길로부터 빛의 길로 돌이키게 해주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는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가톨릭교회의 비성경적인 요소들을 들추어내기 시작했다. 갈수록 심해지는 교황청의 악폐에 대하여 반대의사를 표명해야만 하는 거룩한 부담감이 루터에게 쌓여가고 있었다. “비진리에 대항하여 진리의 횃불을 기필코 들어야 한다”는 ‘언약적 비전’(Covenant Vision)이 루터에게 분명해 지고 있었다. 이 언약적 비전은 마침내 거룩한 소명과 사명감으로 불타고 있었다. 아니 천명(天命)이 되어가고 있었다.
∎ DREAM : “비진리에 항거하여 오직으로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드는 종교개혁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영광”
▲95개조 반박문
루터는 특히 성경을 연구하고 강의하고 번역하면서 성경에 대한 커다란 깨달음을 갖게 된다. 루터가 성서학 교수로 시편(1513 ~ 1515년), 로마서(1515 ~ 1516년), 갈라디아서(1516 ~ 1517년), 히브리서(1517 ~ 1518년)에 대한 연속적인 주석 강의에 착수하였는데, 이러한 일들은 장차 종교 개혁 사상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성경 연구와 성경 강해는 루터에게 다메섹 도상과 같았다. 성경 말씀을 통한 은혜의 확신은 스콜라주의자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의 저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리의 빛을 비쳐 주었다. 그래서 루터는 다른 어떤 주석서적 보다도 성경을 구원과 은혜와 신앙생활의 유일한 기초로 삼게 되었다. 성경을 정확히 묵상하면서 진리를 깨달은 루터는 이제“오직 믿음 (Sola Fide),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은혜 (Sola Gratia), 오직 하나님의 영광 (Soli Deo Gloria)”이라는 5오직의 기치를 내세우고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 준비를 하게 하였다.
마침내 루터는 분연히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면죄부의 판매는 참고 있었던 루터를 격분시키는 방아쇠(trigger)가 되었다. 결국 루터는 1517년(34세) 10월 31일, 비텐베르크의 성곽 교회(Castle Church)의 문에 95개 조항(The Ninety-Five Theses)의 논제를 게시하였다.
비록 이 논제들이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으로 어둡고 불안한 독일의 정황에서 면죄부의 악폐에 대해 반대하는 개혁의 목소리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사실 루터가 교황청을 상대로 도전장을 낸 행동은 조직적이지도 계획적이지도 않았다. 그 내용도 온건했다. 이 대자보의 주제는 '형벌면제 권한의 선포에 대한 논쟁'이었다. 그리고 이 대자보에 루터가 쓴 초대장은 겸손하기도 했다.
“다음 제안들이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토론될 것입니다. 루터 신부가 토론을 진행합니다. 토론을 할 수 없는 분들은 서면으로 의견을 제출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95개조 반박문 문서는 공개 토론을 위한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매주 금요일마다 신학자들이 모여 신학적 문제에 대하여 토의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때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95개조 논제에 대해 아무도 그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아무런 토론도 없었다. 비텐베르크의 교수와 학생들은 그 문제에 대해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95개조 반박문이 공개 된지 2주 만에 복사되고 번역되어, 전 독일에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혜성같이 등장한 금속활자 인쇄술로 인해 4주 만에 전 유럽전역에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마치 갑자기 핵폭탄이 터져 버린 것처럼 로마 교황청을 향해 종교개혁이라는 큰 폭탄이 터지고 말았다. 이 사건은 유럽과 세계사를 진동시킨 역사적인 대사건이 되었다. 결국 기독교 2천년 역사에 있어서의 일대 전환과 함께 교회사의 이정표가 된 16세기 종교개혁(Reformation)이 일어나게 되었다.
루터는 인간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인해 갖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를 천명하였다. 그가 95개조 논제를 내걸고서 공개 토론하자는 반박문 내용의 핵심은 면죄부 판매였다.면죄부 사건은 루터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의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죄 용서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죄인들에게 요구되는 죄책을 제거하거나 감소시키는 면죄부에 대해 루터는 당시에 교회의 가장 큰 죄악 중에 하나라고 반대했다.
루터는 “말씀으로 돌아가자. 기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asic)”고 외쳤다. 진실로 루터는 중세말의 타락한 교회를 새롭게 개혁하여 갱신하고자 했다. 루터와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영적 전쟁으로 인해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언약적 비전(Covenant Vision)’위에 그려진 그의 ‘생생한 꿈(Vivid Dream)’이 되었다. 이 생생한 꿈은 유럽과 세계를 진동시켰다. 루터의 진리의 횃불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행동이자 용기였다. 오직 그 한 사람의 분노와 정의감이 촉발시킨 변화였다.
∎IMAGE : “비(比)진리에 항거하여 오직으로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드는 종교개혁가(사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영광”
루터의 95개조 토론 논제 제시 이후 교황을 옹호하는 신학자들과 루터와의 신학적 논쟁이 이어졌다.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쟁(Heidelberg Disputation)’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의 대조가 핵심 논제였다. 루터는 인간의 부패와 노예 의지에 대한 교리를 옹호했다. 이 논쟁으로 루터의 추종자들이 늘어나는 한편 요한 엑크(Johann Eck)같은 극렬 반대론자가 등장했다. 결국 에크가 루터에게 도전하여 1519년 7월 4일부터 10일간 ‘라이프치히 논쟁(Leipzig Debate)’으로 이어졌다. 에크가 먼저 교황의 수위권(Primatus Romani Pontificis; 敎皇首位權)과 공회의 권위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강력하게 변호하였다. 에크는 루터를 화형에 처한 전 종교개혁자 존 허스 곁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루터는 콘스탄츠 공회가 정죄한 존 허스의 모든 사상이 이단시 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존 허스의 사상이야말로 아주 그리스도적이며 복음적이라고 말하였다. 루터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 통하여 볼 때, 교황의 수위권은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신앙문제에 있어 교황과 공회가 최고의 권위를 갖지 않으며, 오직 성경만이 최종 판단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 루터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루터의 사상은 결국 로마교황청과의 단절로 이어졌다. 1519년 라이프치히 토론은 종교개혁자 루터의 사상 형성과 퍼짐에 있어 결정적이었고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라이프치히 논쟁 이후 루터는 독일 국민의 영웅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1520년(37세) 교황청이 루터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루터는 눈 깜짝 않고 용기를 내어 반격을 시작한다. 그는 독일 민족이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독일어로 작성해서 돌렸다. 이 글에서도 그는 독일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자극했다. 당시는 ‘독일 민족’이란 개념은 없었고 독일의 제후 국가들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우리 독일 사람들은 우리 재산이 교황들에 의해서 그런 강도질을 당하는 것을 어떻게 참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도둑을 목매달고 강도의 목을 벤다면서 어떻게 로마의 탐욕은 그대로 두어야 한단 말인가?” 루터는 교황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교황이 하나님만 갖고 있는 권능을 사칭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은 자신의 선행(베드로 성당을 짓는 데 기부하는 것 따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다. 요컨대 그는 유럽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거대한 권위로서의 교황청을 일종의 사기집단으로 본 셈이다. 그는 신부와 같은 사제(司祭; 신부) 직업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스도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모두가 사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예수)과 인간 사이에 사제가 끼여선 안 된다는 것이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이 억지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근거로 성경 말씀을 내세웠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이 말씀에 근거하여 루터는 ‘만인제사장설(萬人祭司長設)’을 주장하였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다 제사장의 자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루터는 성경이 교황보다 위에 있다고 강조했다.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편지를 보내 그 개인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했지만 교황청의 반(反)성경적인 요소와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사정없이 공격했다. “당신은 하인들 중의 하인이다. 당신에게 성경을 해석할 권한을 부여하는 사람들은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그대를 높이는 사람을 믿지 말고 그대를 낮추는 사람을 믿으시라”
루터의 주장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자 교황 레오 10세는 그 다음해인 1520년 7월 15일 루터에게 파문장을 발송하게 된다. “60일간의 여유를 줄 테니 그 주장을 철회하라”고 협박을 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그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12월 10일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교황이 보낸 파문장을 불사르게 된다. 수도사가 교황을 파문한 격이었다. 루터는 1520년에 출판된 그의 『개요(槪要)』라는 제목의 소책자에서 교황을 정면 공격한다. “로마는 자주빛 옷을 입은 바빌론이요, 로마 교황청은 악마의 회당이다. 우리가 도둑을 교수대로, 강도를 칼로, 이단을 불로 처형하면서 어떻게 이들 추기경과 교황, 그리고 로마라는 소돔의 온갖 하수구를 공격하지 않는단 말인가?”
독일인들은 루터의 개혁 사상과 민족주의를 지지하였고,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곤 하였다. 루터의 영향력이 확산되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의 사절 알레안더는 카를(Karl) 5세에게 사람을 보내 종교개혁 운동을 탄압할 것을 요청하였다. 마침내 1521년(38세) 교황의 요청에 의해 새로 취임한 카를 5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보름스 제국의회를 소집하면서 루터를 출두시켰다. 그곳에 갔다가 체코의 존 허스처럼 화형 당할지도 모른다며 극구 말리는 동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길을 나섰다.
“존 허스는 불태웠을지 몰라도 진리는 불태우지 못했소. 보름스 회의장 지붕의 기와만큼이나 많은 악마들이 있더라도 나는 보름스에 가겠소.” 루터는 그 자신의 삶과 죽음을 하나님께 맡긴 역사적 결단이요 용기였다. 교황과 황제라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상대로 도전장을 냈던 한 수도사는 성경에 대한 확신에 차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용기를 발휘했다.
“취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소서. 아멘!”
1521년 4월17일(38세) 이날은 루터의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그날 오후 4시 루터는 보름스에서 개최된 제국의회에서 독일 황제 앞에 서게 됐다. 그는 21세의 젊은이였으나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위에 오른 카를 5세였다. 황제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독일의 선제후들과 여러 지역의 제후들, 교황청 특사를 비롯한 가톨릭교회의 주교(추기경)들이 의관을 갖추고 엄숙하게 앉아 있었다. 세속의 권세와 종교적 권위가 회의장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루터가 비록 독일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하지만, 그는 신설 비텐베르크 대학의 소장 학자이며, 교회의 신분으로는 사제요, 수도사에 불과했다. 그러나 루터는 황제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가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라는 확신과,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신다는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루터가 제국회의장으로 이끌려 들어가자 심문관은 루터가 쓴 책의 내용에 대해 취소할 것을 강압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까지 쓴 글들은, 모두 같은 내용이 아닙니다. 크게 세 종류의 글들입니다.” 회의장의 모든 사람은 숨을 죽이고 루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첫째는 기독교 신앙과 크리스천의 삶에 관한 글들입니다. 본인을 비난하는 사람들조차도 잘 썼다고 칭찬합니다. 이 글들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루터의 말은 계속되었다. “두번째는 교황과 교황추종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비판한 글들입니다. 이것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순간 황제의 입에서는 ‘노’(No)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루터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세번째는 개인을 공격한 글들입니다. 때로는 지나치게 가혹한 점도 있었지만, 이것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이때 심문관이 “간단히 대답하라! 당신이 저술한 책들과 그 안에 있는 잘못된 점들을 취소하겠는가? 못하겠는가?”하면서 루터의 말을 끊었다. 이 질문에 대해 루터가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루터의 많은 말 중에서 가장 루터다운 명언으로 꼽힌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습니다.… 건전한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는 것은 취소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취소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의 증거로, 또는 솔직하고 공정한 논증(論證)으로 나의 말을 반박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취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요, 또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나는 달리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루터의 말은 제국회의장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독일 황제도 이제는 로마교황청의 압력을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었다. 황제는 교황청 특사가 작성한 문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보름스의 황제 칙령’이었다. “루터는 이단자로 정죄 받은 자이다. 그의 책들은 모두 불살라 없애야 한다. 누구도 그를 보호해서는 안 되며,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루터와 같이 이단자로 정죄 받을 것이다.” 영국의 토머스 칼라일은 명저(名著) ‘영웅숭배론'에서 “용기를 특징으로 하는 튜턴 민족 중에서, 그보다 더 용기 있는 인물이 살았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썼다. 칼라일은 특히 1521년 4월17일 독일 보름스에서 열린 신성로마제국의 의회에서 루터가 교황청 비판의 자세를 견지한 것을 근대 유럽사상 최대의 명장면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자연과 사실의 진정한 아들 루터, 그를 보내주신 데 대해 작금의 수백 년, 그리고 앞으로 올 수백 년은 하늘에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고 했다.
[찬양과 기도의 힘]
당시의 종교재판의 결과는 화형식과 같았다. 많은 선각자들이 죽었다. 로마 교황청과 심지어 황제와 싸우는 루터도 약해질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럴 때 마다 그는 찬송과 기도를 쉬지 않았다. 종교개혁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찬양으로 루터가 직접 작사하고 작곡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 585장) 찬송에 그의 결의가 잘 드러나 있다.
찬송뿐만 아니라 루터는 기도를 중시했다. 루터는 아침, 저녁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 외의 시간도 역시 말씀 연구를 위해 묵상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루터는 '내가 아침에 2시간 기도하지 않으면 그날은 마귀가 계속 승리한다. 나는 할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매일 3시간을 기도하지 않으면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이 한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기도의 길이나 총량은 중요하지 않다. 짧을 수도 있고, 더 길 수도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기도는 성서의 말씀을 더 깊이 알아 가고 체험하기 위한 통로였고 영적 호흡이었다. 루터는 각인된 복음과 언약을 기도로 뿌리 내렸다. 다음 그의 기도문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기도는 실로 단순했다. 이웃에 대한 미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한 점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홀로 고뇌를 다 품고 헤매는 불안함 심정, 심지어 보통 오랜 기도 생활 끝에 가지게 되는 자기 확신은 온데간데없고 불안한 듯한 영적 딜레마가 보이기도 한다. 루터는 이런 연약한 모습들을 어린 아이처럼 그대로 투사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진솔함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루터의 기도문 하나를 싣는다.
“하나님 아버지,
삶이야말로 근심과 불행과 불안, 그리고 기만과 악함으로 가득합니다.
산다는 것에 환멸을 느낄 지경이기에 아무 고난도 겪지 않거나 감내할 필요조차 없도록 차라리 죽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버지,
주께서는 우리 약함을 아십니다.
갖가지 고난이 밀어닥칠 때에 우리에게 인내를 허락하시고
모질고 녹록치 않은 삶일지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감내하게 하시며
우리와 동행하사 온갖 악함과 해로움을 감당케 하소서.
그리고 때가 이르러 은혜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는
시간을 선사하여 주셔서죽음 앞에서 놀라거나
좌절치 말게 하시며 확고한 믿음으로
우리 영혼을 주님의 장중에 내어 맡기게 하소서.“
루터는 비성경적이고, 구원에 아무 효과가 없는 면죄부 판매를 강하게 비판했다. 왜냐하면 성경은 죄인 된 우리가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죄 사함 받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세교회는 죄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함 받는다고 가르쳐 왔는데, 가톨릭교회는 죄를 범한 인간이 신부에게 죄를 고함으로 인해 죄 용서를 받는다는 고해성사를 주장한다.
또한 교황은 예수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회의 최고의 통치자이기에 절대 오류가 없다고 한다. 이것이 ‘교황무오설’이다. 또 성체숭배 사상이 있다. 성찬식 할 때 성도들이 받는 떡과 포도주는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을 화체설이라고 한다. 화체설 숭배는 잘못된 것이다. 개신교는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임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종교개혁자 칼빈이 주장한대로 영적으로 임재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루터는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를 각인하였기에 여기에 반하는 로마 교황청에 대해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 수 있었다. 특히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무장된 루터를 30년 종교전쟁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언약(Covenant)적 비전(Vision)위에 생생한 꿈(Dream)을 그리면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로 무장하여 그려나간 이미지(Image)가 있었기에 루터는 담대할 수 있었다.
∎ PRACTICE: “비 진리에 항거하여 오직으로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드는 종교개혁의 리더”,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영광”
[나의 ‘밧모섬’으로부터]
보름스 의회에 굴하지 않은 마틴 루터는 이단자와 반역자로서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게 되었고 황제 카를 5세도 루터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추방되었고 그것은 결국 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보름스 회의장을 떠난 루터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을 만큼 상황이 급박했다. 그런데 곧 이상한 소문이 독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루터가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는 도중, 깊은 산속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돼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루터가 비밀리에 살해되었다는 풍문까지 떠돌았다. 루터의 생사를 알 수 없이 흉흉한 소문만 무성해져 갔다. 보름스 의회에서 심문을 받고 난 루터는 황급히 마차를 달려 비텐베르그로 가고자 했다. 강행군으로 말을 몰아 아이제나하(Eisenach) 마을 가까이 숲이 빽빽하게 우거진 골짜기에 오게 되었다. 그 마을은 루터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4년 동안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했던 곳이었다. 또한 루터가 후일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곳이다. 이곳까지 무사히 온 것에 안도의 숨을 쉬고 있을 때 갑자기 무장 괴한들이 루터의 마차를 에워쌌다. 마차에서 루터를 끌어내린 괴한들은 루터의 눈을 가리고 말에 태워 숲속으로 사라졌다. 괴한들은 자정이 다 되어 12 km 정도 떨어진, 산 정상에 세워진 성채의 문 앞에 다다랐다. 밖에서 신호를 보내자 육중한 성문은 소리없이 열렸고, 일행은 성채 안으로 조용히 빨려 들어갔다.
이 성채는 아이젠나하 마을 근처 산 정상에 세워진 선제후(選帝候) 프리드리히의 영지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채였다.
프리드리히가 극비리에 루터를 안전한 장소로 피신시키라고 슈팔라틴에게 명령하여 납치극을 꾸민 것이었다. 독일제국의 범죄자로 선언한 ‘황제의 칙령’이 내려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성 안으로 들어서자 루터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고, 그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루터를 도운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여러 번 루터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보호자요 버팀목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나 이번 납치극은 그로서도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어느 누구도 루터를 보호해주어서는 안된다는 황제의 칙령이 내려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 반드시 돕는 자를 보내주시고 피할 길도 열어주신다. 위기에 처한 루터에게 하나님은 선제후 프리드리히를 통해 안전한 곳으로 피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 반드시 돕는 자를 보내주시고 피할 길도 열어주신다. 위기에 처한 루터에게 하나님은 선제후 프리드리히(사진, 우측)를 통해 안전한 곳으로 피하게 하셨다. 더구나 프리드리히는 열렬한 가톨릭 신도였지만 오히려 루터를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겨 주면서 보호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는 적을 사용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르트부르크 성은 루터에게 안성맞춤의 피신처가 되었다. 이 성은 가파른 산 위에 세워진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더구나 프리드리히의 영지에 있었기 때문에 루터는 안심하고 지낼 수 있었다. 그래도 루터가 이 성 안에 은신하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었다. 작센공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특별한 보호를 받으면서 루터는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길러 변장을 하고, 이름도 융커 외르크(Junker Joerg)라는 가명을 가진 귀공자로 변장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
루터는 위기의 시간일 때 오히려 더욱 왕성한 저술 활동을 했다. 그가 성에서 숨어 지낸 기간은 10개월 남짓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 그는 12편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무엇보다도 획기적인 업적은 이 기간에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는 번역 작업에 ‘집중’, 불과 12주만에 신약 성경 번역 초역을 끝냈다. 루터는 성경 말씀 한 자 한 자를 심사숙고하며 세심하게 번역했다. 생동감 넘치는 유려한 문체로 오늘날까지 독일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루터 성경’ 번역 작업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고난과 위기의 시간에 하나님은 루터에게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부어주신 것이다. 루터 당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성직자들만의 전유물이었고, 일반 평신도들에게는 ‘닫혀진 책’이었다. 루터 자신도 대학을 졸업하고 수도원에 들어갈 때까지 성경을 한 번도 읽어 본 일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루터는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제사장들이며, 모든 사람은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성경을 누구든지 읽을 수 있는 ‘열려있는 책’으로 만들어 준 것은 루터의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이다. 그 결과 성경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짐으로써 사람들이 올바른 신앙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루터를 따르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고, 로마 카톨릭의 낡은 체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신성로마제국의 중앙 통치 방식이 아직 독일에 강력하게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약 10개월 동안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城)에 숨어 지내면서 신약과 구약 성경을 차례로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루터에게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했고, 권위는 ‘오직 성경’에만 주어질 뿐이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쓰게 되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인해 마침내 구교와 신교가 갈라지는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이 후 종교개혁운동은 종교뿐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전통과 권위 사라지고 성경적 예배로 변화]
루터가 죽은 후에도 그가 일으켰던 신학적 운동은 계속 퍼져나가 16, 17세기 유럽 전역에서 꽃을 피웠다. 루터의 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칼뱅의 교리는 프랑스와 영국, 스위스 전역에 영향을 끼쳤으며, 프랑스의 위그노와 영국의 청교도의 시작을 이끌었다.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단지 기독교 역사뿐 아니라 근대 유럽의 정치, 경제, 문화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즉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의 봉건적 잔재를 떨어내고 근세를 구분 짓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으며, 근대 자본주의 기반이 되는 사상적 바탕을 제공했다. 먼저 교회 안에서는 예배의 변화가 일어났다. 중세 가톨릭교회 안에 남아있는 비성경적인 모든 예배의 요소가 제거 됐으며, 성경적인 교리와 예배를 회복하게 됐다. 종교개혁을 통해 중세 가톨릭교회의 인간적 전통과 권위가 사라지고 성경 중심적 신앙과 생활이 교회 안에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의 예배는 보다 단순해졌으며, 성만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즉 설교에 초점이 맞춰졌다. 성직자 중심의 화려한 색의 의복과 평신도가 이해하기 힘든 라틴어가 사라졌고 일상적 언어가 대신 사용됐다. 교회 건물 역시 급격히 변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신과 성인의 상이 우상 숭배적이며, 사람의 시선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성도들에게 영적 실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준다고 비판했다. 그로인해 많은 그림과 조각들이 파괴됐으며, 정교한 장식들도 하얀색으로 덧칠해 버렸다. 사제와 성가대원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중세 교회음악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루터는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강조하면서 회중의 찬송을 장려했다. 개신교는 설교를 보다 강조함으로써 제단이 아니라 강단이 교회의 중심이 됐다. 예배에 임하는 자세도 달라졌다. 예배를 하나님이 임재하는 거룩한 성전을 의미하는 예배당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 일터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으로 인식이 변화됐다. 루터는 가톨릭의 비진리가 지배하던 중세 암흑시대를 오직의 CVDIP 리더십으로 종교개혁을 이룩하였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는 죽음에 임박한 루터를 살리셨고,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보호하시고 지혜의 능력을 주셔서 종교개혁의 대업을 완성케 하셨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언약을 붙잡은 루터는 결국 세상을 바꿨다. 그 언약(Covenant)이 비전(Vision)이 되고 생생한 꿈(Dream)과 이미지(Image)가 되고 실현 및 성취되어 종교개혁이라는 불멸의 작품(Practice)이 되었다. 이것이 루터가 걸어간 CVDIP 리더십의 언약의 여정이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김기호 장로(대한예수교 장로회 예원교회 장로)
세계복음화 협회 세계군선교연합회 회장
렘넌트 신학연구원(RTS) 왜래교수(2022년도 2학기~)
강서대학교 국제교육교류원 초빙교수
육군사관학교 졸업, 대령 전역
전 국방대학교 안보대학원 교수
전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주요저서
세상의 틀을 바꾸는 CVDIP 리더십(2019)
나를 바꾸는 리더십(2019)
영화로 본 리더십(2018)
현대 북한 이해 (제1판~4판; 2016-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