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부는 공짜가 아니라 상당한 위험을 감수한 덕분입니다. 여기에 등가교환의 원리가 작동합니다. 대단한 부는 상당한 위험과 균형을 이루는 등가교환입니다. 평범한 부는 적당한 위험과의 등가교환입니다. 이러한 등가교환의 원리가 금융시장에서 상품으로 구현되어 거래되고 있습니다. 이를 ‘스와프’라고 부릅니다.....예수님이 치르신 대가와 우리가 얻은 구원의 가치가 등가로 스와프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을 던지신 그 대속의 가치만큼 구원 받은 우리는 참으로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 본문 중에서-
∎동물학교의 우화
교육학자 리브스 박사가 지은 ‘동물학교’라는 우화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옵니다. 동물들이 모여 학교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달리기, 오르기, 날기, 수영 등의 교과목으로 커리큘럼을 작성하였습니다. 동물학교는 모든 동물이 똑같은 과목을 수강하게 했습니다. 오리는 선생님보다 수영을 잘했습니다. 날기도 그런대로 해냈습니다. 하지만 달리기는 낙제였습니다. 오리는 학교가 끝난 뒤에 달리기 과외를 받아야 했습니다. 다람쥐는 오르기에서 탁월한 성적을 냈지만 날기가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독수리는 날기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솜씨였지만 다른 수업은 아예 참석하지도 않아 문제 학생으로 전락했습니다. 결국 수영을 잘하고, 달리기와 오르기, 날기는 약간 할 줄 알았던 뱀장어가 가장 높은 평균점수를 받아 학기 말에 졸업생 대표가 되었습니다.
통계학에서 평균값을 의미 있게 다루어 세상의 현상을 설명하는 분포가 있습니다. 바로 정규분포(Normal Distribution)입니다.
예를 들어 학생의 신장을 보겠습니다. 2021년도 한국 고등학교 남학생들의 평균 신장은 173cm, 여학생들의 평균 신장은 161cm 입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평균 신장의 근처에 몰려 있고 해당 확률이 제일 높습니다. 평균에서 멀어질수록 그 숫자가 점점 작아지고 확률이 낮아집니다. 이것을 분포로 그리면 종의 모양을 가진 정규분포가 됩니다. 평균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둘러싼 대부분이 평균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균에 속하므로 안정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동물학교의 우화는 평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의 폐단을 얘기합니다. 오죽하면 우리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을까요?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튀면 평균의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사고 비난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혁신은 평균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혁신은 확률이 매우 낮은 극단(Outlier)에서 일어납니다. 삼성전자, 구글, 테슬라, 애플과 같은 기업의 창업자들이 이 극단에 속합니다. 최근 융성하게 일어나고 있는 네이버, 카카오와 같은 플랫폼 기업의 창업자들이 이 극단에 속합니다. 극단에 서는 것은 불확실성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불확실성은 상당한 위험을 동반합니다.
∎등가교환과 스와프
극단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엄청난 손실을 입기도 합니다. 또는 평균의 사람들을 발판으로 삼아 대단한 돈을 거머쥐기도 합니다. 대단한 부는 공짜가 아니라 상당한 위험을 감수한 덕분입니다. 여기에 등가교환의 원리가 작동합니다. 대단한 부는 상당한 위험과 균형을 이루는 등가교환입니다. 평범한 부는 적당한 위험과의 등가교환입니다.
이러한 등가교환의 원리가 금융시장에서 상품으로 구현되어 거래되고 있습니다. 이를 ‘스와프’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면 금리스와프는 고정금리와 변동금리를 교환하는 것입니다.
이때 고정금리를 주는 것과 변동금리를 받는 것은 동일한 가치를 갖습니다. 주는 가치만큼 받았기 때문에 교환으로서 양 당사자는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더 큰 시각에서 보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상거래는 모두 스와프입니다. 시장에서 100만 원을 지불하고 가방을 사는 것은 가방과 현금 100만 원을 스와프(교환)한 것입니다. 가방과 현금 100만 원은 서로 등가이기 때문에 교환은 공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스와프는 반드시 등가의 대가를 요구합니다. 대가가 상호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교환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스와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사건과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에도 등가교환의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스와프의 원리를 확장하여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예수님이 대속의 길을 만들기 위하여 친히 화목 제물이 되는 비용을 지불하셨습니다. 그 비용에 대한 보상으로 얻으신 것이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온전히 담당하신 대속의 가치를 과연 값으로 산정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치르신 대가와 우리가 얻은 구원의 가치가 등가로 스와프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을 던지신 그 대속의 가치만큼 구원 받은 우리는 참으로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이는 마치 만 달란트의 빚을 지고 있는 종이 그 빚을 탕감 받는 것(마 18:27)과 흡사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러서 그 은혜를 알고 예수님을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예수님이 보실 때 과연 무엇이 십자가의 피흘림과 등가를 이룰 수 있을까요? 우리가 구원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사는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과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은 등가로 교환되는 스와프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우리를 얻기 위하여 예수님은 기꺼이 죽음의 비용을 치루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으로만 예수님이 지불하신 비용을 상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신 것은 우리로 의의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길 원하노라”(빌1:11)
우리는 노력과 애씀으로 예수님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어야만 예수님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의 열매(Fruit of Righteousness)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가 맺는 의의 열매와 등가교환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살 때에만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맺어진 올바른 관계는 상거래를 하거나, 원수들을 대하거나, 궁핍한 자를 돌보는 중에 열매로 나타납니다. 일상에서 겪는 모든 사건과 어려움 속에서 끊임없이 예수님을 닮아 가면 의의 열매를 남기게 됩니다. 이 열매가 있어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스와프가 등가교환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방적인 손실로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등가교환이 될 수 없는 경우의 예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세상에 휩쓸리어 평균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전히 두개의 저울추로 장사를 하고, 원가에 리베이트를 더하여 거래를 성사 시키고, 적당히 물건 값을 속여서 이웃의 재물을 빼앗는 것이 곧 세상의 평균입니다. 세상의 평균은 일종의 피난처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이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튀지 않는 까닭에 정을 맞을 일이 없습니다. 세상의 평균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불의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갖고 사는 것이 세상에서는 튀는 것이요 극단에 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극단의 초 극단에 서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초 극단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역시 초 극단에 해당하는 사건입니다. 바울이 이를 알고 에배소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엡 4:1)
'합당하게'라는 말은 헬라어로 악시오스(ἀξίως)입니다. 이 단어는 저울의 균형을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저울 양쪽에 올려 둔 것이 무게가 같아야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품꾼에게 품삯을 지불하고 일을 맡겼을 때, 품꾼은 품삯에 맞게 일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렇게 하면 품삯에 합당한 품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지불하신 피 값은 얼마일까요? 그 피 값에 맞게 우리가 사는 것이 균형을 맞추는 것이요 악시오스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기억하십니다. 그에게 천 대까지 하나님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심지어 피조물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롬 8:19)고 선언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명하시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살아야 하는 성민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대가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나그네 길을 걸어가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위대한(Great) 자로 사는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스와프한 자입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 7:6)
[다음호: 하나님을 아바드(דבע)하라]
글 김태구 박사 (노무라금융투자 CRO, 경제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