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아바드 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을 아바드 하는 자는 하나님의 Win-Win 을 이루는 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사랑’ 위에 집을 짓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사랑’이 무너지지 않는 반석입니다. 이 중 하나를 빼놓게 되면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산업도 마땅히 하나님의 ‘공의×사랑’ 위에 세워야 합니다.”-본문 중에서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책입니다.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이스라엘이 반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요?” 하나님은 약 400여 년 후에 대답하셨습니다. 그 대답은 하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십자가 대속의 사건을 계획하셨을까요? 이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딜레마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이해를 돕는 예화가 있습니다.
“옛날에 아주 어진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 임금에게는 매우 사랑하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러자 남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고 급기야 도둑이 늘어나서 나라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임금은 고민하다가 도둑질을 막기 위해 법령을 선포하였습니다. 내일부터 도둑질을 하는 자는 다시는 도둑질을 못하도록 두 눈을 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그 다음 날 그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왕궁에서 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이틀 후에 형을 집행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임금이 아들을 사랑하니 용서해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외아들이여서 왕권을 이어야 하니 두 눈을 빼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공의로운 분이니 반드시 법대로 시행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임금이 자신이 만든 법을 지키지 않으면 공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재판장에 모였고 아들이 임금 앞으로 붙들려 나왔습니다. 임금은 참으로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습니다. 그 상황에서 임금이 명령했습니다. “먼저 아들의 오른쪽 눈을 빼라, 그 다음에는 나의 왼쪽 눈을 빼라.” 이로써 도둑질 한 자의 두 눈을 뺀다는 법은 지켜졌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한쪽 눈을 뺌으로서 아들을 향한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진퇴양난에 놓였던 임금은 한쪽 눈을 빼는 것으로 공의와 사랑을 실현했습니다. 이에 더하여 예수님은 두 눈을 다 빼는 것으로 공의와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충돌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이 Win-Win 하는 십자가 사건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Win-Win이 가진 특성이 있습니다. 다음의 사분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옳다/그르다’와 ‘선하다/악하다’의 조합입니다.
위 사분면의 특징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약하고 서로 의존적입니다. 하나님의 Win-Win은 하나를 잘하고 동시에 다른 하나도 잘해야 합니다. (a)는 옳지만 선한 것의 제약을 받고, 선하지만 옳은 것의 제약을 받습니다. 이를 ‘옳다’와 ‘선하다’의 곱으로 정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를 벗어나면 모두가 zero 입니다. (b)와 (c) 역시 zero입니다. 하나가 온전해도 다른 하나가 그렇지 않으면 전부가 쓸모 없게 됩니다. 마치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가죽부대가 터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즉 (a)>(b)=(c)=(d)=0입니다. 하나님의 Win-Win은 All or Nothing이고 중간이 없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예수님이 들리신 사건은 (a)에 속합니다. 그외는 하나님의 성품과 배치가 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추구하는 Win-Win은 하나님의 Win-Win과 어떻게 다를까요?
위 사분면의 특징은 하나와 다른 하나가 상호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독립적입니다. 그러므로 (a)는 옳은 것과 선한 것의 곱이 아니라 합입니다. 그러므로 (f)주1)와 (g)주2)도 zero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f)는 그르지만 선하기 때문이고, (g)는 악하지만 옳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Win-Win은 하나님의 Win-Win 보다 여유가 많습니다. 즉 (e)>(f)=(g)>(h)=0입니다.
이후부터 하나님의 Win-Win은 하나님의 ‘공의×사랑’으로, 사람의 Win-Win
은 사람의 ‘공의+사랑’으로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사랑’의 관점에서 공의는 사랑을 필요로 하고, 사랑은 공의를 필요로 합니다. 사람의 ‘공의+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공의를 말할 때 사랑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무방합니다. 또는 사랑을 말할 때 공의가 있으면 좋고 없어도 무방합니다.
사람은 치우치기 때문에 (a)와 같은 하나님의 ‘공의×사랑’을 이룰 수 없습니다. (a)의 ‘공의×사랑’이 아니면 하나님을 설명하기가 곤란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사랑’은 하나님의 동시적인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사랑’은 분리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공의만을 설명하고 또는 하나님의 사랑만을 설명하면 이는 사람의 ‘공의+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칫 하나님 전부를 놓칩니다. 하나님의 ‘공의×사랑’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의 화목제물 사건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Commands), 규례(Decrees), 법도(Laws)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나타냅니다. 사람이 그 속에 거하면 하나님의 ‘공의×사랑’은 자연스럽게 Win-Win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괴롭힘과 학대 가운데 부르짖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일어서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출애굽의 계획을 알리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야 할 이유를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
하나님이 이끄신 출애굽의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어 ‘아바드(דבע)’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아바드에 대한 고대의 의미는 노예로서 주인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또한 신하로서 왕을 따르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겪었던 비참한 ‘일’(아바드)은 출애굽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출애굽의 목적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예배’(아바드)를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사랑’이 사람의 ‘예배×일’와 함께 갑니다. 다시 말하면 ‘공의×사랑’ = ‘예배×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 아바드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민족의 격동기에 복음으로 민족의 운명을 바꾸시고자 민족 복음화를 꿈꾸셨던 영원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대학생들을 세워 세계선교의 비전을 품게 하셨고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열정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바로 김준곤 목사입니다. 그 분의 위대하고 절절한 기도는 ‘하나님을 아바드 하라’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머니처럼 하나밖에 없는 내 조국, 어디를 찔러도 내 몸 같이 아픈 조국, 이 민족 마음마다 가정마다 교회마다 사회의 구석구석 금수강산 자연환경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고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땅에 태어나는 어린이마다 어머니의 신앙의 탯줄 기도의 젖줄 말씀의 핏줄에서 자라게 하시고, 집집마다 이 집의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는 민족, 기업주들은 이 회사의 주인은 예수님이고 나는 관리인이라고 고백하는 민족, 두메마을 우물가의 여인들의 입에서도 공장의 직공들 바다의 선원들의 입에서도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시고 각급 학교 교실에서 성경이 필수 과목처럼 배워지고 국회나 각의가 모일 때에도 주의 뜻이 먼저 물어지게 하시고 국제시장에서 한국제 물건은 한국인의 신앙과 양심이 으레 보증수표처럼 믿어지는 민족,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삼으며 신구약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는 민족, 예수의식과 민족의식이 하나된 지상 최초의 민족, 그리하여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예수의 꿈을 꾸고 인류 구원의 환상을 보며 한 손에는 복음을 다른 한 손에는 사랑을 들고 지구촌 구석구석 누비는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아바드 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을 아바드 하는 자는 하나님의 Win-Win 을 이루는 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사랑’ 위에 집을 짓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사랑’이 무너지지 않는 반석입니다. 이 중 하나를 빼놓게 되면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산업도 마땅히 하나님의 ‘공의×사랑’ 위에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사랑’은 추상적이거나 뜬구름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주신 명령과 계명을 따라 살면 하나님의 ‘공의×사랑’을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사는 생명의 길이 앞에 있어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합니다. 목이 곧아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즐겨하지 않습니다.(신 9:6,24)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삼상 3:1)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명령을 받드는 사람들이 희귀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바드 할 때만 사람에게 복이 됩니다. 하나님을 아바드 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바드 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을 아바드 합시다.
주1) 서부 활극영화 중에 나온 장면입니다. 한 총잡이 아버지가 자기 아들과 아들의 적수가 싸우게 되었는데 공평을 기하기 위해서 규칙을 정했습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다가 열발자욱째 돌아서서 총을 쏘는 것이 규칙입니다. 그 규칙을 어기면 그 아버지가 총으로 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열을 세기 전에 자기 아들이 돌아서서 총을 쏘려고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권총으로 쏴 죽이고 아들의 적수를 살려 보냈습니다.
주2)자기 친구를 죽인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재판을 받게 되었고 배심의 판결은 유죄였습니다. 그때 판사가 말하기를, "그 어머니에게 판결을 맡겨 보기로 합시다." 어머니의 슬픔의 눈물은 환희의 눈물로 바뀌었으며 아마도 아들을 껴안고는, "여러분, 얘는 이미 교훈을 얻었으리라고 믿어지니까 나와 함께 가서 내가 돌볼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말합니다.
(다음호: 거룩이 뭐예요?)
글 김태구 박사 (노무라금융투자 CRO, 경제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