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된 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은 무엇일까요? 더 오랫동안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며 그 즐거움을 함께 나누게 됩니다.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하나님의 소유를 관리하는 파트너가 됩니다.”-본문 중에서-
▴새벽인력시장에 모여든 인파
지난 6월, 서울경제신문에 "일감 4분의1로 줄어… 오늘도 허탕 쳤어요"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원자재 가격 급등, 금리 급등과 부동산 경기 침체가 맞물리면서 일용직 고용 시장에 한파가 몰아치고 일용직 근로자들의 하루 생계가 위협을 받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건설현장은 일용직 근로자들이 하루 일하고 일당을 받을 수 있는 현장들 중의 하나입니다. 일을 찾는 사람들은 새벽 4시를 전후하여 인력시장에 모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며 호명되기를 학수고대합니다. 경기가 좋을 때는 대략 100명 중의 80명이상이 고용됩니다. 경기가 좋지 않을 때는 그 비율이 50% 이하로 내려갑니다. 일거리가 부족하니 불가피하게 하루를 공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오전 6시가 되면 일거리를 얻은 사람들과 얻지 못한 사람들 모두가 떠나서 인력시장은 한산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일용직 근로자들의 일부는 일거리를 찾지 못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습관적으로 술을 마십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하니 삶이 팍팍합니다.
성경에 이러한 일용직 근로자들을 배경으로 하는 비유가 있습니다. 바로 ‘포도원 주인’의 비유입니다. 그 시대 인력시장의 고단함이 비유 속에 녹아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2,6~10,15~16)
이 비유의 일차 청중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와 무리입니다. 예수님은 우선 그들이 듣고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BC 37년 헤롯이 로마 군대와 함께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유대의 통치자로 헤롯 왕조를 열었습니다. 유대가 로마의 속국으로 있을 때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 당시 유대 땅은 경제적으로 매우 핍절하고 가난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약 70%가 하루에 한끼를 겨우 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직접 인력시장에 나갑니다. 그 이유는 품꾼을 포도원에 들여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종들을 동원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동이 트는 시간에 품꾼을 들여보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제 삼시(오전 9시), 제 육시(정오 12시), 제 구시(오후 3시)에 또 나가 품꾼을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늦은 시간에 품꾼을 고용하면 주인이 손해를 봅니다. 그럼에도 주인은 포도원에 들어가는 품꾼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의 일당을 약속합니다.
자세히 보니 이 포도원 주인은 여느 포도원 주인들과 다릅니다.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찾아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주된 관심사는 품꾼에게 일당을 주는 것입니다. 일당을 주는 기준도 특이합니다. 일당은 일한 시간과 관계가 없습니다. 일한 시간만큼 일당을 쳐줘야 하는데 그것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손해를 보기로 작정한 사람이요 제정신이 아닙니다.
심지어 제 십일시(오후 5시)에도 길거리에 나갑니다. 그곳에 여전히 사람들이 놀고 있습니다.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거리가 없어서 서성이는 것입니다. 이대로는 집으로 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혹시 누군가 자신을 써줄까 하여 종일토록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도 포도원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한 데나리온을 약속 받습니다. 정작 일할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밖에 없는데 말이지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 드디어 품꾼들이 일당을 받습니다. 포도원에 들어온 순서대로 품꾼들을 불러 일당을 주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무슨 영문인지 포도원 주인은 순서를 거꾸로 주문했습니다. 제 십일시의 품꾼들이 먼저 삯을 받습니다. 이를 먼저 온 품꾼들이 지켜봅니다. 자신들은 더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나중 온 순서대로 일당을 준 까닭에 주인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포도원에 들어간 품꾼들의 시간이 다양합니다. 몇 시에 들어간 품꾼들의 감사와 감격이 제일 컸을까요? 당연히 제 십일시에 들어간 품꾼들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코너에 몰렸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포도원에 들어간 품꾼들은 어땠을까요? 아마도 자신들의 탁월함 때문에 포도원에 들어갔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러니 수고에 합당한 보상을 요구한 것입니다. 무엇이 없었나요? 제 십일시에 들어간 품꾼들의 감사와 감격이 없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은혜에 대한 감각이 없었습니다.
이 포도원 비유에 앞서 예수님은 부자관원을 만났습니다. 그는 재물에 대한 근심 때문에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묻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는데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마 19:2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28~30)
베드로의 질문이나 포도원에 먼저 들어간 자들의 불평 –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다”(마 20:12) – 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받을 축복이 있으나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 있다(마 19:30)고 토를 다십니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포도원 비유를 주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포도원 비유가 동일한 결론 –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리라”(마 20:16) – 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포도원 주인의 긍휼을 놓친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버리고 종일 수고했어도 헛됩니다.
포도원에 먼저 들어간 자들의 입에서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졸지에 포도원 주인이 몰상식하고 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포도원에 먼저 들어간 그 감격이 분명 있었을 텐데 사라졌습니다. 그들 안에 탕자의 형이 앉아 있습니다. 아버지는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으나 형은 분노하여 집에 들어가기를 거절(눅 15:28)했습니다. 포도원에 먼저 들어간 품꾼들이 나중 들어온 자들을 끌어안고 기뻐하였다면 어땠을까요? 그들은 여전히 먼저 된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제 십일시는 절망의 시간입니다. 누군가 나를 써줄까 하는 희망을 접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제 십일시의 사람들은 삶의 터전이 없는자요 극빈자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자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포도원 주인이 친히 찾아와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이제는 포도원 주인 때문에 제 십일시의 사람들이 소망을 갖습니다. 순전히 포도원 주인의 긍휼 때문에 일당을 받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참으로 계산이 어두운 사람입니다. 일당은 품꾼의 수고에 근거를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설명하고자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시는 분(눅 15:4)입니다. 하나님은 늦었다고 하는 시간에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의로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간 것이 결코 아닙니다(신 9:5). 그렇다면 먼저 된 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은 무엇일까요? 더 오랫동안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며 그 즐거움을 함께 나누게 됩니다.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하나님의 소유를 관리하는 파트너가 됩니다.
먼저 된 자가 있고 나중 된 자가 있습니다.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모두 나중 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모두 먼저 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언약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 언약에 신실하게(Faithfully) 반응하는 것이 먼저 된 자입니다.
먼저 된 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생명을 거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분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제 십일시에 포도원에 들어간 것은 복된 일입니다. 더 복된 일은 먼저 된 자가 되고 거기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2~13)
(다음호: 내 곳간을 헐자)
김태구 박사 (노무라금융투자 CRO, 경제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