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버는 How가 넘치는 반면, 찾기가 매우 어려운 것은 돈을 벌어야 하는 Why이다.”- 본문 중에서-
애덤 스미스(1723-1790)는 영국의 경제학자로서 경제학의 창시자로 불립니다.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글래스고 대학에서 도덕철학 교수를 지냈습니다. 그가 한 유명한 말입니다.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존경과 우대를 받는 것이고, 가장 싫어하는 것은 무시와 경멸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혜와 덕이 아니라 부와 권세를 가진 사람을 존경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업신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와 권세를 얻으려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더더욱 돈이 사람의 위치를 결정하고 인격이 되는 시대입니다. 돈을 가지면 사람들의 존경을 얻습니다. 돈이 없으면 비천한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돈으로 대부분을 평가하고 돈이 성공 여부를 측정하는 기준입니다. 이웃들이 돈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우리도 그것에 익숙합니다. 돈의 위력을 일찌감치 간파한 유대인은 육체는 심장에 의존하고 심장은 돈지갑에 의지한다고 말합니다.
젊은 청년과 노인이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젊은이 참 똑똑하게 보이는 군, 그래 앞으로 어떻게 살 계획인가? 네, 저는 미국에 건너가 MBA를 전공할 예정입니다. 그래? 그 다음의 계획은 무엇인가? 미국 월가의 투자은행에 들어가 트레이딩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군, 그 이후의 계획은 어떤가? 돈을 많이 벌어 조기 은퇴를 하려고 합니다. 그 다음은? 바닷가에 멋진 별장을 지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별장에서 남은 평생 바닷가재 먹으며 사는 것이 꿈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돈을 버는 How가 넘칩니다. 인터넷 매체는 경쟁적으로 How에 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부업으로 집에서 20분마다 26,000원 버는 법, 방구석에서 무자본으로 돈 벌기, 스마트폰 하나로 방구석에서 월 천만원 버는 방법, 하루 30분 일하고 월 순익 2천만원 버는 방구석 직장인의 성공 공식 등, 그 진위를 검증할 수 없는 How가 쏟아집니다. 반면에, 찾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있다면 돈을 벌어야 하는 Why입니다.
최근 산업계의 화두는 단연 대화형 chatGPT(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계열사인 ‘오픈 AI’가 지난해 11월에 chatGPT를 출시하였습니다. 기존의 AI는 사람의 피드백을 지속적으로 필요로 하지만 chatGPT는 그것이 없어도 추론 또는 창작이 가능합니다. 사용자가 chatGPT에게 어떤 것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면, chatGPT는 그 요구에 맞춰서 결과를 만듭니다. chatGPT에게 데이터의 일부를 제공하고 나머지 부분은 예측하도록 부탁해도 됩니다.광고 카피 제안, 음식 조리법 추천, 프로그램 코딩, 영작문 에디팅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이 가능합니다.
▴chatGPT
심지어, chatGPT는 와튼스쿨 MBA의 필수 교과목인 '운영관리' 기말시험에 응시했고, 학점은 B- ~B를 받았습니다. 로스쿨 시험에서는 종합점수 C+를 받았습니다. chatGPT가 의사면허시험을 통과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2016년, 이세돌과의 바둑대국으로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AlphaGo의 등장이 지금은 chatGPT로 업그레드가 되었습니다. AI를 대표하는 chatGPT는 How의 혁명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AI는 이미 투자의 세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AI를 기반으로한 How의 업그레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투자자들이 목말라 하던 신기술의 목마름을 채우고도 남을 거대한 진보입니다. 혹시 버블이 조성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AI의 미래가 자못 기대와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이런 첨단의 시대를 살기 때문인지 Why에 대한 질문이 실종되었습니다. 홍수에 마실 물을 찾기가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돈을 버는 How만 가득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Why에 대한 질문은 없으면 어떤 현상이 발생할까요? 더 많은 돈을 소유하고자 경쟁이 치열해집니다. 동시에 돈을 둘러싼 병리적인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2019년 8월, 관악구의 빌라에 사는 여성과 아이가 침대 위에서 흉기에 찔려 참혹하게 살해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건 발생 50일만에 검거된 유력 용의자는 바로 피해자의 남편이자 아빠였습니다. 아내는 5건의 손해보험이 있었으며, 사망시 보험금 1억 7,500만 원을 수령할 수 있었습니다.
2022년 4월, 부산에서는 40대 여성이 주식 공동 투자자인 50대 남성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병원을 운영하던 의사는 이 여성을 믿고 주식에 공동 투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익금을 분배하지 못하고 수억 원의 투자가 실패로 끝이 나자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병리학(Pathology)은 인체의 비정상적 상태(Pathos)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질병이 어떤 요인에 의해 발생하며 어떻게 변화하는지 등을 연구합니다. 연구 대상이나 방법에 따라 인체 병리학, 실험 병리학, 임상병리학 등으로 나뉩니다. 병리학의 목적은 질병의 원리를 연구함으로써 질병을 예방하고, 적절한 치료 방법을 찾는데 있습니다.
경제분야의 주류는 아니지만 경제도 병리학적인 관점에서 관찰하고 처방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경제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경제공황, 금융위기, 외환위기, 경기침체 등의 다양한 경제 질병 현상을 그 발생 원인과 진행 과정 등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제 질병에 대한 다양한 ‘임상 경험’을 쌓다보면 각종 경제 질병을 예방하고, 이미 발생한 경제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경제정책을 강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병리적인 현상을 치유하기 위해 더 첨단의 How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돈을 벌어야 하는 Why를 찾는 것입니다. 돈의 병리학의 핵심은 Why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돈을 버는 How를 해결하면 돈을 벌어야 하는 Why가 절로 해결된다는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돈을 벌어야 하는 Why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Reference Point(참조점)의 문제입니다.
Good or God의 저자인 John Bevere가 대략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습니다.
▴John Bevere
“한 가족이 30평의 아파트로 이사 옵니다. 그들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흥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랫동안 15평의 아파트에 살다가 드디어 넒은 공간에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 가족이 동일한 30평의 아파트로 이사 옵니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은 죽을 상이고 불만이 가득차 보입니다. 그들은 60평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사업의 어려움을 겪고 30평으로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동일한 30평을 놓고 한 가족은 기쁨 가운데 있고 다른 가족은 불만 가운데 있습니다. 이는 Reference Point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입니다. 한 가족은 15평이 Reference Point이고 다른 가족은 60평이 Reference Point입니다.”
구원이란 Reference Point를 바꾸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골로새 교인들에게 분명하게 전달합니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
옛 사람을 벗어 버리는 것은 그 동안 살아왔던 Reference Point를 버리는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는 것은 하나님의 Reference Point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에는 옛 사람의 Reference Point와 새 사람의 Reference Point가 뒤섞여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눅 16:14) 우리도 돈을 좋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돈을 버는 How에 목말라 합니다. 그런데 정작 돈을 벌어야 하는 참된 Why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Reference Point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실 때 돈을 주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돈을 벌어야 하는 참된 Why가 있는 사람은 돈 때문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참된 Why를 가진 자에게 돈을 버는 How를 허락하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1~12)”
(다음 호: 이삭의 르호봇)
글 김태구 박사 (노무라금융투자 CRO, 경제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