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 엠이 부른 바빌론의 강(Rivers of Babylon)은 구약성경 시편137:1-4을 기반으로 만든 노래이다.
1970년대 말에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던 ‘Rivers of Babylon’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eah we wept, when we remembered Zion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eah we wept, when we remembered Zion
When the wicked
Carried us away in captivity
Required from us a song
Now how shall we sing the Lord's song in a strange land
When the wicked
Carried us away in captivity
Requiring of us a song
Now how shall we sing the Lord's song in a strange land
Let the words of our mouth and the meditation of our heart
Be acceptable in thy sight here tonight
Let the words of our mouth and the meditation of our heart
Be acceptable in thy sight here tonight
이 노래는 1972년 자메이카의 그룹 '더 멜로디언즈'(The Melodians)가 최초로 불렀습니다. 이후 1978년에 카리브계 독일의 혼성 4인조 그룹인 '보니 엠'이 리메이크하여 다시 불렀습니다. 그 당시 ‘Rivers of Babylon’가 수록된 앨범은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네덜란드에서 앨범 차트 1위를 차지 하였고, 프랑스, 뉴질랜드, 호주 등에서는 탑 10안에 들었습니다.
‘Rivers of Babylon’는 매우 경쾌한 리듬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사의 내용은 정반대입니다.
이 노래는 시편 137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그때가 BC 6세기경입니다.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의 노래를 부르라는 강요를 받습니다. 포로로 끌려와서 바벨론 사람들의 기쁨을 위해 노래를 해야한다니 이런 비참함이 어디 있을까요? 도저히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 땅에서 시온을 그리워합니다. 그들은 황폐한 예루살렘을 마주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 장소가 바벨론의 강변입니다. ‘Rivers of Babylon’는 고국에 대한 애절함을 이기지 못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노래입니다.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입니다.
이에 못지 않은 절절함으로 기다림을 노래하는 시가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오리다.
두 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던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
▴심훈(沈熏.1901.9.12∼1936.9.16) 시인ㆍ소설가ㆍ언론인ㆍ영화인. 서울 노량진 생. 경성 제일고보 4학년 재학시 3ㆍ1운동에 참가, 4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1932년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33년 장편 <영원의 미소>, 1934년 장편 <직녀성(織女星)>을 발표했으며, 1935년 <상록수>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었습니다.
이 시는 심훈의 ‘그날이 오면’입니다. 일제의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그는 조국이 해방되는 날을 열망합니다. 그날이 오면 그는 자신의 가죽으로 북을 만들어 기쁨의 행렬에 앞장서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Rivers of Babylon’과 ‘그날이 오면’은 닮은 꼴입니다. 그것은 나라를 잃어버린 아픔과 서러움입니다. 나라를 빼앗기면 삶의 터전이 없어집니다. 삶의 터전이 없어지면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생에 대한 소망도 끊어집니다. 일상이 그야말로 정글입니다. 정글에서는 모든 질서가 무너집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삶의 터전을 말하라 하면 첫째가 땅입니다. 둘째와 셋째도 땅입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의 역사도 땅을 빼놓으면 설명이 불가합니다.
레위기에는 땅과 관련된 하나님의 명령이 나옵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
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땅에서 농사 짓는 사람들은 세들어 사는 임차인이요 소작인에 불과합니다. 소작인이 땅을 판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유독 땅의 소유권을 강조하실까요? 한 때의 소작인이 땅을 영구히 팔면 어떻게 될까요? 후손은 삶의 터전이 없이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을 살았습니다. 요셉이 떠난후의 그들의 삶이 어땠을까요? 애굽에서 7년의 풍년이 끝난 후 7년의 흉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려 각기 토지를 팔았음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출 47:20)
흉년이 진행되는 동안 특이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애굽 사람들은 돈이 떨어지고 가축을 곡식과 바꾸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 몸과 땅뿐인데 곡식을 위해 땅까지 팔았습니다. 땅은 바로의 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하는 수없이 소작농이 되었습니다. 미루어 보건대 종살이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땅을 가질 리 만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땅을 나누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손에 잡지 않은 땅이지만 이스라엘이 자신의 땅을 갖는 것은 대단한 사건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 명수대로 땅을 나눠 주어 기업을 삼게 하라 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 것이요 수가 적은 자에게는 기업을 적게 줄 것이니 그들이 계수된 수대로 각기 기업을 주되 오직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누어 그들의 조상 지파의 이름을 따라 얻게 할지니라 그 다소를 막론하고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 나눌지니라”(민 26:52~56)
땅의 분배 원칙은 힘이 아닙니다. 지파의 명수를 고려하여 땅을 나눠야 합니다. 수가 많은 지파가 더 많은 기업을 갖게 됩니다. 어느 땅을 분배 받을 것인지는 제비 뽑기로 결정합니다. 땅을 놓고 형제 간에 전쟁과 다툼이 일어날 것을 아시고 이를 차단하신 것입니다. 땅은 이처럼 사람들을 민감하게 만듭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차지하면서 요단강 동편은 르우벤, 갓 및 므낫세(반) 지파가 차지합니다. 요단 서편 남쪽은 유다와 시므온 지파가 차지합니다. 요단 서편 중앙은 베냐민, 단 및 에브라임 지파의 몫이 됩니다. 요단 서편 북쪽은 므낫세(반), 잇사갈, 스블론, 아셀 및 납달리 지파의 소유가 됩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땅의 분배를 설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희년을 얘기하기 위함입니다.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갈지라”(레 25:8~13)
희년(Jubilee, יוֹבֵל)은 안식년이 일곱 번이 지나고 그다음 해입니다. 히브리어로 ‘뿔 나팔 소리’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뿔 나팔이 크게 울려퍼지면 자유가 선포됩니다. 종으로 살던 사람들은 종에서 해방되고,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대목이 나옵니다.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희년의 규례는 땅의 분배보다 약 50년 앞섭니다. 하나님은 각 지파에게 땅을 공정하게 분배하시고 동시에 희년을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이 희년을 강구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역사에 어떤 사건들이 있었을까요?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미 2:1~2)
힘을 가진 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땅을 빼앗습니다. 남자를 잡아가고 산업을 대신 점유합니다. 흉년에 곡식을 빌렸거나 돈을 빌렸는데 갚지 못하면 담보로 잡힌 땅을 빼앗깁니다. 더 이상의 땅이 없으면 자녀를 종으로 보내야 합니다. 심지어 자신도 종이 됩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는 학대를 당하며, 빚진 자는 저당물을 돌려받지 못하는 일이(겔 18:12) 있습니다. 애굽 땅에서 노예로 산 고통을 모를 리 없는데 형제를 노예로 삼습니다.
삶의 터전을 상실한 사람들의 삶은 비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종으로 살다가 자유를 얻어도 땅이 없으면 자유가 아닙니다. 땅이 없으면 흩어진 가족이 만날 수 없습니다.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는 그날이 있어야 모든 아픔이 해소됩니다. 그러니 그날에 대한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할까요?
그러나 땅을 빼앗은 사람들의 간절한 소원은 희년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각종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립니다.(삿 10:6) 더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는 바알을 섬기니 땅을 돌려주지 않아도 됩니다. 바알은 하나님과 달리 이러한 의무를 부과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1948년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농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농지개혁이었습니다. 이 당시 한국 전체인구의 80%가 농민이었고 그 농민의 70%가 소작인이었습니다. 소작료는 한해 소출의 50%~60%에 달하였습니다. 정부가 지가증권을 발행하여 땅을 유상으로 매입하고 소작인들에게 땅을 주었습니다. 그 땅에서 5년 동안 농사를 짓고 매년 30%의 소작료를 지급하면 땅을 가질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농지개혁이 1950년 3월에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3개월 후에는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2006년 세계은행은 한국이 가장 성공적인 토지개혁을 한 국가라고 평가 하였습니다. 대천덕 신부는 한국이 공산화되지 않은 것은 성경적인 토지개혁 때문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희년은 Reset입니다. 이스라엘 전 공동체가 50년 마다 한번씩 Reset되어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고를 치고 치명적인 실수를 한 사람도 인생에 한번은 새로 시작할 기회를 얻습니다. Reset은 부모의 비참함과 가난이 후손에게 대물림되는 것을 막습니다.
요즈음 시대에 희년을 얘기하면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가나안의 땅에서 오랜 세월을 살다보니 희년은 매우 급진적(Radical)인 것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중심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법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법은 곧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희년도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희년에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희년이 와서 땅을 회복한 사람들의 기쁨은 얼마나 컸을까요?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은혜의 해를 말씀하십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희년이 오면 포로 된 자가 자유를 얻습니다. 눈 먼 자는 다시 보게 됩니다. 눌린 자는 자유롭게 됩니다. 이 희년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희년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우리 역시 희년을 고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희년을 성취하는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 각자에 주신 희년의 몫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이 몫을 감당하는 것일까요?
큰 성공을 이루고 기업을 경영하는 것 이전에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인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동행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의 특권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분의 명령과 법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안에 거할 때 오는 것이 희년의 복입니다. 이렇게 희년의 복을 누리는 자가 세상에 빛이 됩니다. 희년의 복은 또다시 희년의 복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희년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그날을 기다리는 자를 성령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2:5~6)
(다음 호: 콜 옵션을 사세요)
글 김태구 박사 (노무라금융투자 CRO, 경제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