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위해 빌리그렘함 재단이 출연
∎사도 빌립의 묻힌 기념교회, 전도자의 숨결 느겨
▴Jusepe de Ribera. The Martyrdom of St. Philip.
1639. Oil on canvas. Museo del Prado, Madrid, Spain.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골로새서 4:13)
사도 바울이 편지에 언급한 ‘히에라볼리’는 현재는 파묵칼레라고 부르는 히에라폴리스(Hierapolis)로 ‘거룩한 성읍’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히에라볼리스는 라오디게아에서 북동쪽 9㎞, 골로새에서는 북서쪽 18㎞ 지점에 위치한 소아시아의 남서부 브루기아 주(州)의 도시이다. 히에라폴리스(Hierapolis)는 석회온천이 유명해 치료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당시 매우 번성한 도시였다고 전해진다.
히에라볼리는 바울의 에베소 체류 기간 중에, 혹은 바울에게 복음을 들은 골로새 출신 에바브라에 의해 복음이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후에 빌립의 사역지가 되었고 사도 요한의 제자인 교부 파피아스(Papias, A.D. 70-130년경)는 이곳 출신이다. 빌립은 말년에 이곳에서 전도를 하다가 87년경에 도미티아누스(Domitian, Domitianus) 황제에 의해 이곳에서 십자가형으로 순교했다. 사람들은 그의 시체를 성 밖으로 내던졌다고 한다. 주후 5세기경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된 후, 빌립의 시체가 발견된 그 언덕 위에 빌립사도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교회가 세워졌다. 산언덕을 향해 웅장한 계단을 만들고 그 위에 공간구성이 독창적인 평면이 팔각형으로 된 훌륭한 건물이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무너져 형체만 남았고 빌리그레함 재단이 복원을 위해 출연해 복원이 일부되고 있으나 수십년이 걸려 진행될것으로 보여 안타까움을 금할길 없었다.
▲ 빌립교회의 복원 모형도
∎빌립의 순교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네로는 로마제국에서 최초로 발생한 기독교 박해자로 기록된 황제였다. 그 두 번째 박해자로 이름을 올린 사람이 바로 도미티아누스(주후 81-96년) 였다. 도미티아누스는 살아서 신이 되려고 한 철부지 황제였다. 서민적이고 소박했던 아버지(베스파시아누스)와 형(티투스)과는 달리 어릴 때부터 황궁에서 자라 사치스러웠고, 형이 일찍 요절한 탓에 30세의 젊은 나이에 얼떨결에 황제가 된 도미티아누스는 분명 여러 면에서 ‘준비되지 않은’ 황제였다.
그가 폭군의 길로 확실히 접어들게 된 것은 살아서 신으로 추앙받고자 한 그의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대단한 신성모독으로 여기겠지만, 고대 로마제국에서 황제의 신격화는 그렇게 혐오스런 일이 아니었고 옥타비아누스 황제 때부터 내려온 전통이었다. 선정을 베푼 황제들은 죽은 후에 예외 없이 신격화되었고, 충성스런 로마 시민들은 신전을 찾아가 죽은 황제를 위해 향불을 피우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자신을 신격화한 도미티아누스의 정책은 정복지마다 자신의 신상을 세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조건 절을 하도록 요구했다.
이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로부터 극심한 반발을 초래했다. 하나님을 섬기는 철저한 유일신 신앙을 특징으로 하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특성상 그들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반발에 도미티아누스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먼저 유대교 진영을 정조준한 반유대교 법령들을 발표했다. 이 법령들로 인해 로마 시민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해마다 예루살렘에 바치던 반 세겔의 성전세도 성전이 파괴된 것을 이유로 들며(주후 70년) 로마 시에 있는 쥬피터 신전의 유지비 명목으로 사용했다. 기독교에 대해서는유대교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분열주의자라는 이유로 내몰아 무조건 잡아서 처형했다.
도미티아누스 치하에서의 박해는 멀리 소아시아 지방에까지 미쳤다. 박해의 여파로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유배되었고, 이런 배경에서 씌어진 서신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사도 빌립 역시 이 시기에 십자가에 달려 돌을 맞고 순교했다.
도미티아누스의 기독교 핍박은 그가 갑작스레 암살당하면서 그치게 된다. 도미티아누스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사람은 도미틸라의 집사장이었던 해방 노예 스테파누스였다고 한다.
∎사도 빌립 기념교회
주후 5세기경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된 후, 빌립의 시체가 발견된 그 언덕 위에 빌립사도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교회가 세워졌다. 산언덕을 향해 웅장한 계단을 만들고 그 위에 공간구성이 독창적인 평면이 팔각형으로 된 훌륭한 건물이 세워진 것이다.
이 교회는 성 빌립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원형 극장의 건너편 산중턱에 지어진 교회이다. 5세기 무렵 그의 묘위에 순교를 기념하는 교회가 지어졌다. 중앙부는 2개의 십자가를 어긋나게 겹친 8각형 건물을 중심으로, 9개의 방이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빌립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다가 2011년 7월 말 고고학팀이 교회 건물 잔해에서 빌립의 무덤을 찾았다. 무덤 내부의 구조와 글 등을 통해 사도 빌립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원래 무덤이 있다고 알려진 곳에서 40m가량 떨어져 있다고 한다. 20M*20M의 정사각형의 건물터에 중앙에 8각형 형태의 큰 방과 그 면을 따라 8개의 중간 방이 건축되어 있어 이를 팔복의 의미를 담아 8개의 작은 예배당으로 보면서 팔복교회로 말하기도 한다.
한편, 파묵칼레 즉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에는 번영한 도시를 보여주듯 1만5천명이 들어갈 수 있는 원형극장이 있다.
▲ 석회 목회의 성으로 불리는 이곳에는 온천이 유명하다.
또한 수세기 동안 고원으로부터 흘러나온 석회수에 의해 형성된 솜 같은 순백의 평원(목화의 성 이라고도 부름)은 감탄을 자아낼만한 장관이다. /터키탐방단 윤광식 기자(kidok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