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현장 르포/제 3의 종교개혁이 필요한 스위스 제네바

성령의 역사 속으로 들어갈 제자 기다려

2013-04-28 00:17:05  인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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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Switzerland)
스위스는 기원전 4~5세기경 게르만 켈트족 계통의 헬베타이안의 이주와 함께 스위스의 역사가 시작됐다. 스위스는 라틴어로 ‘헬베티아 연방’이라는 뜻을 가진 ‘콘페데라치오 헬베티카(Confederatio Helvetica)를 정식 국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약호는 CH를 사용한다. 스위스는 연방 차원에서 정해진 국교가 없으나 기독교 국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 분포를 보면 국민의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이고, 기독교는 약 3분의 1가량이며, 지금은 이슬람교와 동방정교회 신도가 더 많다고 한다.
스위스의 수도는 베른 주의 고도(古都) 베른이며 스위스 중앙에 위치해 있다. 스위스의 정치체제는 연방 민주제이고 23개의 주와 6개의 반주(半州)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주의 주 정부는 거의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다. 스위스는 다양한 인종, 종교, 언어에도 불구하고 약 700년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지리를 보면 국토 총면적은 약 4만 1,284 평방km이고, 국토의 70%가 산악지대이며 30%가 중부평원이다. 유럽의 동서로 뻗어있는 알프스 산맥이 국토의 60%를 차지하고, 프랑스와 국경에 펼쳐져 있는 쥐라 산맥이 10%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알프스는 유럽의 3대 하천이라고 불리는 라인 강, 론 강, 도나우 강이 발원하는 곳이다. 스위스에는 최대 규모인 제네바의 레만 호수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것을 포함해 약 100개의 호수가 있다. 스위스의 총 인구는 약 746만 명이며 이 중 20%가 외국인이 차지하고 있으며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가 공용어이고, 영어까지 포함해 5가지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500년 전 종교개혁의 중심지였던 제네바
오늘날 세계적 외교 전쟁과 세 단체의 활동 무대로 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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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2세대 종교개혁가라고 할 수 있는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말이다. 현장에서 선포된 ‘예수는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자!’ 2천년 만에 회복된 이 언약을 통해 우리는 제3의 종교개혁 운동 대열에 서게 됐다. 성령의 인도와 시간표에 따라 전국과 세계 현장에서 끊임없이 전도자들의 입술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이 증거되고 선포되고 있다.

생 피에르교회에서 내려다 본 제네바 도시와 140m로 솟아 올라 10km 밖에서도 보인다는 일명 제트 분수.

지금 전 세계에는 기근, 홍수, 전쟁, 재난이 빈번하고 인류는 정보와 지식의 홍수 속에 진리가 없어 자기를 잃고 방황하고 영적으로 고통 받는 시대이다. 유럽과 스위스 현장은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고 지속적으로 선포되어야 할 영적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스위스 제네바. 그곳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한국은 장로교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체계가 한국 장로교회의 뿌리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면에서도 스위스 제네바를 볼 필요가 있겠다.
교회사에 있어 두 말 할 것 없이 중요한 도시인 스위스 제네바. 특히, 제네바는 프랑스 구교의 박해를 피해 온 개신교도들의 피난처가 됐고, 칼빈을 통해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곳이다. 제네바 현장을 7월 2일부터 12일까지 10박 11일 동안 기자의 두 자녀와 함께 비전트립으로 다녀오게 됐다.
7월 2일, 우리는 악명 높다는 O항공에 몸을 실었다. 악명 높거나 말거나 우리는 ‘문화 정복할 세 가지 실현과 세 단체 살릴 현장 실현’이라는 원단 메시지 언약을 붙잡고 구름을 뚫고 오르는 짜릿함을 느끼며 모스크바로 향했다. 항공사 직원들은 두 렘넌트들에게 친절한 배려로 따뜻함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모스크바를 경유하면서 예원교회 우크라이나 전도 캠프팀을 만났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것이다. 함께 신분, 권세를 누리며 유럽의 큰 관문인 모스크바의 흑암을 꺾고 왔다는 생각에 기뻤다. 모스크바에 제자가 세워지길 기도하며 제네바로 향했다. 짧고도 긴 제네바에서의 여정을 보고하고자 한다.

◆제네바(Geneva)
제네바는 칼빈을 통해 종교 개혁이 일어났던 역사적인 도시이며 계몽주의 철학자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를 낳은 사상의 도시이기도 하다. 제네바는 국제도시로서 주민은 35%,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외국인이 75%이다. 사실, 종교 개혁이 일어났던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이 건물이 교회 건물인가?”를 알 수 없을 만큼 십자가가 달려있지 않았으며, 교회당과 성당은 하루에 10번 이상 시간마다 종을 쳐 정시기도를 할 수 있게 했다.
이슬람 사원 또한 세워져 있어 가는 곳마다 히잡(Hijab)이나 차도르(Chador)를 두른 여성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슬람교도들이 문 닫고 있는 유럽의 교회를 사들여 유럽으로 모여들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거리마다 보여 영적으로 예민해 질 수 밖에 없었다.
바울을 통해 합 2:4 말씀이 성취된 롬 1:17 말씀이 루터를 통해 500년 전에 회복되었던 현장에 전도운동이 지속될 수 없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스위스의 개신교 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은 보이지 않고 교회당은 관광지화 되어 있다. 시간마다 울려대는 성당의 종소리와 하루 5번씩 메카를 향해 정시기도하는 이슬람교도들이 정복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몇명의 노인들만 앉아 있는 스위스 UN 지구에 있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예배 모습.

그리고 숙소를 기점으로 며칠 동안 사방을 조금씩 걸어 다니며 살펴봤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할 것 없이 수준 높다하는 엘리트 의식과 교양으로 포장돼 ‘오직 예수’만 모르게 하는 근원적 무지로 인해 비켜갈 수 없는 영적문제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소매치기가 유독 많다며 조심하라던 한국 아저씨의 말과 도대체 의복의 계절과 스타일은 종잡을 수가 없었고, 제네바 거리 역시 거지나 알코올 중독자들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가는 곳 마다 왜 이리도 형상 우상이 그리도 많이 서 있던지…….
어쨌든 제네바는 기독교사 뿐 아니라 국제 사회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국제적십자위원회 본부를 비롯해 192개국의 대표가 모여 있는 국제연합의 유럽 본부 등 200개 이상의 국제기관 본부가 자리 잡고 있어 국제회의가 빈번히 개최돼 세계적인 외교가 펼쳐지는 무대이다.

프랑스 국경 인근에 있는 티벳불교, 이 건물이 내려다 보고 있는 곳은 제네바.

◆성 피에르(St. Pierre Church) 교회
7월 5일, 제네바에서 만난 홍창호 목사(참다운 교회)와 그의 일행과 함께 칼빈을 통해 종교개혁의 거점이 된 성 피에르교회를 방문했다. 1160년에 공사를 시작해 72년에 걸쳐 완성된 이 교회는 원래 가톨릭 성당이었으나 1536~1564년까지 칼빈이 사역해 세계 최초의 장로교회가 된 셈이다.
교회는 여러 세기 동안 보수, 증축을 거친 이유로 로마네스크, 고딕, 그레코로만 양식 등 다양한 양식과 시대적 역사가 있는 건축물이었다. 역사적인 건축물로 육중함과 위엄을 과시했으나 정작 전달되어야 할 복음의 능력은 과시되지 않았다.
교회를 들어서자 그 당시의 것으로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우리를 압도했고, 교회의 오른쪽에는 칼빈이 신학을 강의했던 예배당과 칼빈이 설교했던 강대상, 칼빈의 의자가 보존돼 있었다. 교회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뾰족한 녹색 빛의 첨탑이 인상적이었다.
관람하고 있는 동안 두 자녀가 “엄마! 이것보세요. 용이에요”라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1535년 개혁 당시 각종 성상을 파괴하고 덧칠했다고 하나 교회 내부에는 괴물 형상을 비롯한 형상 우상들이 버젓이 세워져있었다. 우리는 157개의 좁고 꼬불꼬불한 계단을 밟고 북탑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곳에서 제네바 시 전체가 한 눈에 들어와 소소한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우리 일행은 각자 흩어져 기도를 심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종교개혁 박물관, 종교개혁 기념비상
우리는 성 피에르 교회 옆에 위치한 종교개혁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1층은 종교개혁가들의 사상들을 나타내는 다양한 형태의 전시물들을 볼 수 있었다. 1층 관람을 마친 후 지하로 내려갔는데 전혀 다른 분위기와 형태의 종교 개혁자들의 모습을 보게 됐다.
이곳은 사진촬영이 금지됐으며, 딱 보자마자 “어라! 이거 뉴에이지 단체들의 작품이구만”하는 생각에 불쑥 의분이 올라왔지만 의분을 눈빛에 실어 주변 곳곳에서 뭘 말하고 있는지를 불꽃 튀게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뉴에이지 단체들의 마크 및 내용 전시에 대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것도 교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 가며 자신들을 나타내고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을 위한 자리에서도 뉴에이지 단체의 실체를 본 후, 걸음을 옮겨 제네바 대학 내 바스티옹 공원(Parc des Bastions)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종교개혁 당시 활약했던 인물들을 기념하기 위해 길이 100m, 높이 10m에 달하는 장대한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칼빈은 자신이 우상화 될까봐 묘비도 세우지 말라고 했으나, 이 기념비상은 거대한 돌 벽으로 칼빈 탄생 400주년이던 1909년부터 제작에 들어가 1917년 완성됐다.

종교개혁 기념비 - 사진 왼쪽부터 기욤 피렐(Guillaume Farel,1489-1565), 칼빈(Calvin), 데오도르 베자(Theodore de Beze, 1519-1605), 존 낙스(John Knox, 1513-1572)이다. 벽의 상부에는 ‘어둠 후에 빛이 있다(Post Tenebras Lux)’라는 제네바 종교개혁 운동의 표어가 새겨져 있다.

◆알프스 샤모니 몽블랑(Chamonix Mont Blanc)
7월 9일, 제네바에서 약 1시간을 달려 프랑스 샤모니 몽블랑에 도착했다. 몽블랑은 알프스 산맥의 최고봉으로 높이가 4,810.45m이며,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에 걸쳐있다. 몽블랑을 코앞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에귀 뒤 미디 전망대(Aiguille du midi, 3,843m)를 향해 우리는 두 번의 스릴만점인 케이블카를 탔다. 전망대에 오르니 머리 바로 위에는 손에 닿을 듯한 구름들과 알프스 만년설의 세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곳에서 ‘영적 정상, 영적 상태’라는 메시지를 생각하며 실컷 복식호흡을 해 봤다. 두 자녀는 신기해 왔다 갔다, 이내 추워 몸을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고, 작은 녀석은 산소 부족으로 졸리다며 잠시 단잠까지 자고 내려왔다.

알프스 샤모니 몽블랑 에귀 뒤 미디 전망대

◆UN 제네바 유럽본부
우리는 제네바에 있는 동안 여러 차례 UN 앞 광장과 국제기구 주변을 놀이터 삼아 며칠간 매일 다녀갔다. 한 날은 두 렘넌트에게 관심을 보이며 졸졸 따라다니는 스위스 여자 아이가 있어 복음을 전했다. 그리곤 한국을 떠나오기 이틀 전 UN 유럽 본부 현장을 탐방하게 됐다.
먼저 UN 유럽본부에 대해 알아보자면 UN 제네바 사무소의 건물의 명칭은 펠레 데 나시옹(Palais des Nations)으로 통칭된다. 건물은 1929년~1936년, 7년의 시간이 걸려 건축된 대규모의 크기의 건물이다. 1,600여개의 사무실과 34개의 회의실, 35,000여명의 직원들이 종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경제, 사회, 인권 및 분쟁 해결을 위해 9,000번 이상의 크고 작은 회의가 개최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철저한 보완 검열을 지나 UN 투어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투어를 위해 문을 열자마자 정면으로 만난 것은 커다란 동상. 아들 건이가 뚜벅뚜벅 동상 주변을 맴돌며 “엄마! 우상숭배! 박살!”이라며 나름 권세 사용을 했다. 우리는 가이드의 안내로 UN 가맹국에서 선물한 기증품들이 전시된 것을 보았다. 대부분 그 나라의 특징을 잘 나타내 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전남 순천에 있는 송광사를 보고 만들어진 수묵화 그림이 기증돼 걸려있었다.
 

투어 중 관람객들로 하여금 입을 벌리게 한 곳은 다름 아닌 ‘인권과 문명 간 연합의 방(Chamber for Human Rights and the Alliance of Civilizations Room)’이었다. 회의실의 천장은 모든 관람객을 감탄케 할만 했다. 스페인 정부의 기부를 통해 약 13개월에 거쳐 만들어진 곳이라고 하는데 형형색색의 뾰족뾰족한 인공 종유석들로 아름다웠다.

’인권과 문명 간 화합의 방’으로 인권에 관한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회의실 관람.

그 외 회의실을 관람하고 우리는 UN 정문을 향해 나오는데 가만히 건물 형태를 보아하니 옛 고대 신전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뿐만 아니라 투어 내내 회의실마다 우상이 없던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영적 영향은 달마 도사 그림을 걸어놔도, 부적을 붙여놔도 사탄이 역사하는데, 이렇듯 각 나라의 대표적인 우상들이 전시돼 있는 이곳! 정말 복음의 비밀 없이 출퇴근 한다는 것이 애굽의 노예생활이며 매일 신전에 제물이 바쳐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최고의 일이라 자부하며 이곳에서 근무하는 엘리트들이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인 이 복음을 몰라 각 나라의 우상과 영적 문제를 다 뒤집어쓰고 일을 하고 있는데 얼마나 안타까운지…….
어서 복음가진 우리 렘넌트들이 이 현장에 들어와 빛을 발할 것을 생각해 흑암 꺾는 기도를 팍팍하며 또 그 기도가 성취될 그 날을 생각하며 UN 사무소 문을 나섰다. UN 본부 앞 광장에는 커다란 조형물로 제네바의 명물이라 하는 ‘부러진 의자(Broken Chair)’가 지뢰 없는 세계를 열망해 상징적으로 설치 돼 있었다.

UN 앞 광장에 세워진’부러진 의자(Broken Chair)’

◆현지 전문인 전도제자의 유언
UN 투어를 마친 후, 이런 현장을 두고 기도했던 전문인 전도제자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방송통신위원회 고위공직자로서 2010년 1월부터 스위스 제네바 국제전기통신연합 개발도상국 IT지원국 전문위원으로 파견 근무해 오던 중 과로로 인한 장 폐색과 후유증으로 지난 5월 27일 소천한 故 김기권 안수집사(임마누엘 서울교회). 김 집사는 아시아태평양 정보통신교육원(UN APCICT) 부원장으로 있을 때 수도권 초등신학원과 몇 몇 지역의 렘넌트들을 초청해 UN 현장과 UN 공무원이 되는 길, 간증과 함께 엘리트 살리는 언약을 전달한 바 있다.
故 김 집사는 유럽 50개국, 아프리카 54개국의 복음화를 기도해오면서 근무기간동안 매달 한번 씩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오가는 장기간 장거리출장을 강행해왔다. 그는 개발도상국 어린이의 눈망울을 기억하며 가슴 아파했고 하나님께서 우상과 가난에 찌든 현장에 마음 깊이 구원의 손길이 그 곳에 미치기를 기도해왔었다.
렘넌트에 대한 마음이 특별했던 김 집사는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내게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개발도상국, 후진국 어린이들을 데려다가 복음을 주어 세계 살리는 Summit으로 키우고 싶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충분히 남기지 못한 것과 하나님이 주신 완전한 축복을 다 누리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UN 제네바 유럽본부 전경

◆현장 르포를 마치면서
스위스 현장 르포를 마치면서 몇 가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먼저는 유럽 각국에 흩어져 있는 60여명의 렘넌트들이 목회자 없이 홀로 살아남고 있다는 현실과, 비어있거나 타종교에 넘어가는 교회당 회복의 언약, 눅 14:23의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이 생각났다. 또한, 렘넌트 전도제자들이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영적 문제와 함께 영원한 멸망으로 가는 성공자들을 살리기 위해 세 단체 속에 들어가야 하는 시간표를 생각하게 됐다.
그리곤 다시금 칼빈의 말이 생각났다. ‘루터의 개혁조차 개혁 되어야 한다’던 그의 말을 빌려, ‘칼빈의 개혁조차 개혁되어져야 한다’고. 제네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전도제자, 오늘의 말씀·기도·전도를 누리며 시대적 언약을 충성되이 전달할 전도자를 기다리고 있다. 이 현장에 누가 갈 것인가.
/스위스 제네바 현장=신옥 기자


1. 생 피에르 교회 전경.
2. 종교개혁 박물관을 알리는 안내 표지.
3. 칼빈이 설교했던 강대상
4.종교개혁 박물관-신학 연회장에 놓여 있는 접시에 칼빈의 초상이 그려져있다.
5. 종교개혁 박물관 내부에 전시된 인도의 가네샤
6. 칼빈이 앉았던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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