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넌트(Remnant)’란 하나님의 언약을 전달하기 위해 남겨진 자를 말한다. 이들은 세상이 보기에는 버려진 자, 또는 아주 하잘 것 없는 존재처럼 보이나 하나님은 이들을 감추어 두시고 이들을 통해 언약을 전달하셨다.
수천 년 동안 영적 암흑의 땅, 한반도에 하나님은 렘넌트를 통해 복음의 빛을 비추셨다. 한국교회사에서 렘넌트를 찾아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하심,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를 되새겨 보고자 연재한다.
첫 번째 이야기 :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와 ‘렘넌트 최치량’
한국교회사 최초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는 27세에 조선 땅에 발도 제대로 붙여 보지도 못한 채 순교했지만 그가 전한 복음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한 렘넌트를 통해 흘러 동방의 예루살렘 즉 평양대부흥의 밀알이 되었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는 1840년 8월 영국 웨일즈에서 태어났다. 그는 1859년 런던대학교 뉴 칼리지에서 대학과정과 신학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부인과 함께 중국 선교를 떠났다. 그러나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부인 캐럴라인이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너무 큰 상처를 받은 토마스는 중국 선교사직을 그만 두고 중국 산동성에서 세관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러다가 알렉산더 윌리엄슨 선교사의 주선으로 한국에서 병인년 천주교 박해를 피해 중국에 온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다시 선교에 대한 꿈을 꾸게 된다.
한국에 갈 기회를 찾던 토마스는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의 안내자겸 통역자로 동승하게 되고 그렇게 염원했던 조선을 향해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가 번역한 한문성경 수십 권을 가지고 떠나게 된다.
그런데 셔먼호가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도착하여 계속해서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때 배가 머문 곳에 조선의 문정관이 와서 외국과의 무역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물러가라고 했지만 셔먼호의 선장은 이 말을 무시하고 대포로 조선을 위협하면서, 그리고 병졸까지 납치해서 감금하면서 계속해서 항진을 강행했다.
그런데 홍수로 불었던 대동강 물이 줄어들고 서해에 썰물 때가 되어 물이 급격히 줄어들자 셔먼호는 강바닥에 좌초되어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평양감사 박규수(연암 박지원의 손자_양반전, 허생전)의 명에 따라 화공작전으로 셔먼호를 불태우자 선원들은 강으로 뛰어 내려 강변으로 헤엄쳐 올라오게 되었고, 이 때 대기하고 있던 병졸들이 뭍에 오르는 선원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쳐 죽였다.
토마스 선교사도 더 이상 배에 있을 수 없어서 떠나올 때 준비한 한문성경 몇 권을 품에 품고 강으로 뛰어 내려 헤엄쳐 나왔는데 헤엄쳐 나온 토마스 목사를 퇴교 박춘권이 칼로 쳐 죽임으로써 그는 한국 초기 선교 역사에서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되었다. 이 때가 1866년 9월 2일로 그의 나이 겨우 27세였다. 그의 시체는 토막났고 이어 강변에서 불태워 졌다. 토마스의 선교는 그렇게 허무한 듯 끝나보였다.
▪렘넌트 최치량 그리고 박춘권
하지만 하나님은 렘넌트 선교사 토마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셨다. 토마은선교사가 배에서 뿌린 성경을 주운 사람은 정부 관원을 포함해 상당수에 달했다. 당시 20세였던 이신행이라는 여인도 성경 한권을 얻어 집으로 왔는데 그 후 그녀는 평양 최초의 여자교인이 됐다. 그녀의 아들 이덕환도 평양 장대현교회의 장로로 시무했다.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 당시 군중 속에서 직접 목격한 13세 소년 최치량은 토마스 선교사가 흘린 성경 3권을 주워 집으로 가져온다. 그런데 서양인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온 것이 무서워 그 책을 평양성 대동문을 지키던 박영식에게 주었다. 박영식도 이 성경을 불태우지 않고 집으로 가져와서 뜯어 벽지로 사용을 한다.
1891년 소년이었던 최치량은 성인이 된 후 널다리골에 있는 박영식의 집을 매입해 여관을 경영하게 됐다.
세월이 흘러 토마스 선교사가 죽은 지 27년 후인 1893년 이때 마펫 선교사가 평양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갔다가 최치량의 여관에서 성경으로 벽지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최치량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고, 최치량도 예수님을 믿고 1894년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최치량의 여관을 예배당으로 내어준다. 이것이 평양 최초의 널다리골 예배당이 된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박영식도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었다.
어느 날 널다리골 예배당 근처에 살고 있던 노인이 마펫 선교사를 찾아와서 울면서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데 바로 30년 전에 토마스를 죽인 박춘권이었다. 그는 토마스 선교사 살해 후 30년간 죄의식 가운데 살고 있었는데 몇 년 전부터 널다리골 예배당에서 주일마다 울리는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박춘권은 예수를 영접하고 독실한 신자가 되어, 안주(安州)교회 영수(領袖)가 되었다. 또 자신의 조카 이영태에게 성경을 전해주자 이영태 역시 그 성경을 읽다가 예수를 믿게 되는데 훗날 이영태는 평양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레이놀즈 선교사를 도와 성경번역에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그는 영주교회 영수가 되었다.
이 널다리골 예배당이 평양 최초의 개신교회인 널다리골교회가 되었고 이 교회는 후에 장대현교회가 되어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을 일으켜 평양은 한국교회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방 때까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 장대현교회는 조선 최초의 장로교 목사인 길선주 목사를 배출했다.
평양부흥의 그 시작은 렘넌트 최치량이 ‘남은 자‘로 ’남길 자‘로 언약의 여정을 걸어간 결과였습니다. /윤광식 기자(kidok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