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일행 5명은 조선족 자치주 연길에서 새벽 5시30분에 버스를 탔다. 의자에는 이미 사람들이 먼저 자리를 다 잡아 앉아 있었고 버스의 뒷부분은 절반이 자리가 없이 짐이 실려 짐짝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이 버스는 연길과 장백현(우리나라 읍 단위)까지 오가는 버스로 이틀에 한번 있는 버스였다. 몇 시간 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여름의 무더운 날씨에 버스는 비포장도로를 계속 달리고 달려갔다. 가다가 사람들이 계속 탔고 짐을 버스 천정위에 얹어 달리기도 하였다.
밤 11시경에 장백현에 도착했다. 좌석에 앉지 못하고 짐짝위에 걸터앉아 먼지를 뒤집어쓰고 19시간가량 왔으니 파김치가 되다시피 했다. 우리 일행은 어느 호텔에 들어갔다. 말이 호텔이지 시설은 너무나 낡아있었다. 온 얼굴에 흙먼지로 가득한데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채 씻지 않고 잠을 자야하니 너무나 답답했지만 아침이 돼야 물이 나온다고 해 어쩔 수 없이 씻지도 못하고 잠자리에 들 수밖에 없었다. 아침 8시경 호텔에서 제공하는 조반을 먹기 위해 1층의 식당으로 갔다. 손님 80~90%의 사람들이 김일성 수령 배지를 옷 왼쪽 가슴 에 착용하고 있었다. 숙소 옆방에 북한사람들로 가득했던 것이다.
오전에 우리 일행은 장백현의 조선족학교에 도서(책)를 기증하고 압록강 건너편 북한의 해산시를 바라보며 속히 평화통일, 복음통일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장백현 근처 어느 산속에 탈북자가 있다고 해 일행은 산속으로 탈북자를 만나러 갔다. 산속으로 걸어서 2 시간가량 들어갔더니 60여세 된 목발 짚은 한족 장애자와 함께 산다는 30여세의 탈북자매가 있었다. 언제 넘어와서 이곳에 살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1년 전 건너와서 아버지 같은 남편과 살고 있다고 했다. 그 한족은 산속에서 소와 짐승을 키우는 농장을 하고 있었는데 북한에서 건너온 딸 같은 자매와 같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자매에게 조국에는 언제 가느냐고 물었더니 화를 내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나는 조국이 없습네다. 너무나 굶주리다가 식량을 구하려고 이곳 장백현에 왔다가 해산으로 도로 들어가는데 변방부대 군인에게 붙잡혀 식량은 다 빼앗기고 죽도록 얻어맞았습네다.”라는 얘기를 한이 맺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면서 성토하는 것이었다. “자기 동족을 병신이 되도록 때리고 고문하며 가진 것, 구한 것을 다 빼앗는 저곳이 무슨 나의 조국입네까? 나는 조국이 없습네다. 나는 북조선이 나의 조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네다.” 그 여인은 하염없이 울부짖으며 조국을 원망하는 한의 소리로 절규했다. 여인은 몸에 지닌 것을 찾는다며 여러 남자 군인들이 여인을 옷을 다 벗기고 때리고 온갖 고문을 다하며 자신이 몸에 병을 얻어 병신이 되었노라고 흐느끼며 “나에게 먹을 것을 주고 나를 살게 해준 이곳 중국이 나의 조국입네다.” 하는 것이었다.
그 여인은 북한에서 결혼도 하였고 자녀도 둘이 있었다고 했다. 남편은 굶주림으로 결핵이 걸려 앓다가 죽었고 자녀들은 꽃제비가 되어 이리저리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구걸하는 아이들이 됐다고 한다. 그는 그런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식량을 구해 강을 건너 들어가다가 변방부대의 군인들에게 붙잡혀서 옷이 다 벗겨져 구타당하고 은밀한 부분에 숨겨놓은 돈이 있으면 좋은 말로 할 때 내놓으라며 맞았다고 했다. 결국 옷 속에 숨겨놓은 것은 다 빼앗겼고 군인들은 항문이나 자궁 속에 숨겨놓은 돈이 나오도록 자신들 보는 앞에서 300번에서 500번 정도 앉았다 일어났다 하기를 계속 반복시켰다고 했다.
그렇게 계속 앉았다 일어났다 하면 은밀하게 숨겨놓은 돈이 다 밖으로 나오게 되고 돈이 나오면 또 때린다고 했다. 또 돈을 비닐에 밀봉하여 먹어버린 경우를 대비하여 일주일에서 열흘가까이 가둬놓고 대변을 보게 해서 자기 손으로 대변을 다 파헤쳐서 돈이 몸속에 없었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했다. 만약 대변 속에 돈이 나오면 또 기절할 만큼 매를 맞고 발로 걷어차인다고 했다.
지금도 국경지대에서는 붙잡혀온 탈북자를 상대로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 내가 만나본 수많은 탈북자 여성들이 처음부터 탈북한 것이 아니고 처음에는 굶주림에 죽어가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국경을 건너왔다가 양식을 구해서 들어가다가 붙잡혀 다 빼앗기고 몸은 병신이 될 만큼 얻어맞고 그리고 수용소 생활 하다가 나와서 재탈북을 하는 것이다.
계절이 바뀌어 추운 겨울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택시를 타고 연길에서 장백현으로 달려갔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압록강변으로 나왔다. 강은 얼음으로 완전히 얼어있었고 강 중간에 얼음을 깨고 아낙네들이 빨래거리를 대야에 이고 와서 빨래를 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중국에서도 빨래를 담은 아낙네들이 오고 북한 해산에서도 빨래를 담은 여인들이 와서 빨래를 하는 척, 옷을 걷으니 담배와 밀수품들이 가득했다. 서로서로 주고받으며 물물교환을 하고는 옷가지 한두 가지를 빨래해서 대야로 이고 돌아갔다. 그곳은 이른 아침부터 어두운 밤까지 하루 종일 밀수가 성행하는 물물교환 장소였다.
장백현에는 한국의 어느 교단에서 지어준 장백현 교회가 잘 지어져있고 십자가의 불을 밝히고 있다. 그곳의 목사님과 오랫동안 교제해 왔는데 그 목사님이 나를 안내하여 국경지대의 어느 농촌마을의 가정교회에 방금 북한에서 넘어온 탈북자가 있으니 가서 만나보자고 나를 안내했다. 택시를 타고 20여분 달려가니 북한과 마주보고 있는 조선족 마을에 있는 가정교회에 탈북 청년이 와있었다.
그는 19세(당시)였고 다리가 한쪽 없는 장애자로서 목발을 짚고 있었다. 몇 달간 씻지 못했던지 얼굴은 새카맣고 온몸에는 한겨울인데도 악취가 진동하였다.
일단 가정교회 집사님이 가마솥에 나무로 불을 피워 따뜻한 물을 한 솥 데워 청년을 씻겨 주었다. 그리고 옷을 갈아 입혔다. 그리고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이는데 며칠을 굶었는지 몇 그릇을 단숨에 비웠다. 청년은 가족들이 다 굶어죽고 배우지 못했고 일거리도 없는 그래서 꽃제비가 되어 이곳저곳에 구걸하며 지내다가 먹을 것이 풍성한 중국을 자주 넘나든다고 했다.
그는 돈이 없어서 국경지대인 해산까지 오는 기차를 무임승차하여 타고오고 있었는데 차표를 검사하는 차장이 차표를 보자며 접근해오기에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그때 걸치고 있던 외투가 기차바퀴에 감기면서 자신의 왼쪽 다리가 기차바퀴에 잘려 나갔다는 것이다.
오늘도 눈이 무릎까지 쌓인 국경지대를 목발을 짚고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건너와 장백현에서 무조건 택시를 타고 그곳 가정교회까지 와서는 돈이 없다고 하자 택시기사가 화를 내며 몇 차례 빰을 때렸다고 했다.
나는 다리 한쪽이 없는 그 청년에게 내가 가지고 간 옷을 입혀주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했고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살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가지고간 선교헌금을 그에게 전달하고 처소교회에도 약간의 현금을 전달하며 저 형제를 돌봐주라고 부탁하고 그들과 헤어졌다. (다음호에 계속)
/북한선교국 제공
조선족 가정교회에서 탈북자가 입고 온 옷을 불 태우고있다.(사진 왼쪽), 기차에 다리가 하나 잘린 김영철(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