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동 각 노회의 면직 공고
(‘지난 호 ☛http://kidokilbo.com/news/view.php?wr_id=321&id=mission)
∎ 글을 시작하며
한국교회 역사상 수백여 명의 목사들이 전도운동에 참여한다는 이유로 자기 교단으로부터 제명, 면직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초대교회 성경적 전도운동을 표방하는 다락방 전도운동에 참여했다는 이류로 목회자들을 참혹하게 내친 것이다.
이후 역사가 판단하겠지만 다락방 전도운동에 참가한 500여명의 목사들을 이단이란 굴레를 씌워 제명 면직 처분을 내린 것은 한국교회사에서 부끄러운 일로 기록될 것이다. 당시 합동측 총신대를 졸업한 목사만 1천여 명이 다락방전도운동에 참가했다. 이러한 사실은 다락방 전도운동이 신학적으로도 지극히 개혁주의 신앙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교회 마녀사냥식 종교재판으로 이단 누명을 씌워 무자비하게 ‘명예살인’한 전도사화(傳道士禍)였다.
∎합동의 핍박
예장합동은 앞서 게재한 ‘한국교회 전도사화(傳道士禍)(4) 합동의 다락방 확산저지와 이단 만들기’에서 설명한대로 다락방에 대한 이단 규정은 진행됐다.
(바로가기☛ http://kidokilbo.com/news/view.php?wr_id=314&id=mission)
1996년 제81회 총회에서 다락방전도운동을 이단 집단으로 규정한 이후 신학부가 1996년 10월 4일 임원회를 열고 ‘다락방은 이단으로 규정됐기에 이에 관련된 교역자 및 평신도를 사실해 조치할 것’을 각 노회에 시달했다. 또 대구중노회에 별도의 공문을 보내 이상강 목사를 중징계한 후 「기독신보」를 비롯한 교계신문에 공고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신학부(부장 김행천 목사)와 이단조사연구위원회(위원장 하구봉 목사)는 1998년 2월 12일 대전 홍인장에서 회의를 열고 아직도 다락방 그룹과 연계되어 활동하고 있는 교단 내 목회자와 교인들이 상당수 있다고 평가하고 이들에 대해 총회 결의대로 처리할 것을 각 노회에 시달했다.
이후 다락방에 대해서 수년간에 걸친 핍박이 진행이 되었고 이로써 많은 노회가 앞을 다투어 다락방 참여 목사뿐 아니라 장로, 평신도에게도 핍박을 진행했다.
합동은 한국교회 교단 가운데 가장 많은 목사에게 제명, 면직 처분을 내렸다.
∎부산노회: 가장 먼저 류광수 목사를 1991년 11월 26일 임시노회에서 면직 처분을 내린 바 있다.
∎함남노회: 1995년 12월 신현관 목사(선교제일교회)를 제명 처분했고, 이후 1997년 7월 22일 임시회(노회장 김기중 목사)에서 다락방 관련 조사처리위원회를 구성하고 전 재판권을 위임해 김철진 목사(남양주교회)를 제3차(1차 1997. 08. 03., 2차 1997. 08. 08., 3차 1997. 08. 11.)에 걸쳐 소환했으나 불응하자 여전히 다락방운동에 적극적이라는 이유로 조사처리위원회를 재판국으로 변경해 1997년 8월 23일 면직 공고했다.
▴신현관 목사
∎경동노회:
김주곤 목사, 이인기 목사, 이명호 목사(사랑교회), 이차영 목사, 김영택 목사등 5인에 대해 ‘제104호 정기노회 결의에 대해 불복종하고 면직자 류광수 씨와 계속 동역을 했다’는 이유로 1995년 12월22일 자로 당회장직 및 노회 모든 공직 박탈했음을 공고했다.
이후 1996년 10월 14일 제106회 1차 임시회(노회장 김재철 목사)에서 다락방운동 관련자 치리의 건은 전권위원회의 기소를 받고 치리회로 변경 후 이차영 목사(포항 은성교회), 정호규 목사(포항 반석교회), 이인기 목사(영천 두란노교회), 김주곤 목사(영천 안디옥교회), 김영택 목사(경주 안강중부교회), 이명호 목사(군위 서부교회) 등 6인을 면직했다.
▴이차영, 정호규, 이인기, 이명호 목사
∎ 남대구노회:
1995년 5월 18일 제18회 1차 임시회에서 다락방집회에 참석하지 않으며 류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지 않을 것을 결의한 바 있음에도 불구 하고 소속 일부 목회자들이 다락방집회에 교인들을 인솔해 참석하는 등 노회 결의를 불복하자 이후 제19회 정기회(노회장 이호일 목사)를 1995년 9월 5, 6일 양일간 명일교회에서 열어 노회 결의에 불복한 박지온 목사(송현교회), 이성만 목사(서문제이교회), 강외석 목사(월광교회), 배종도 목사(월배동부교회) 등 4인의 당회장권을 1996년 3월 정기회까지 정지시켰다.
이후 제20회 정기회를 남대구제일교회에서 열어 다락방전도운동과 관련을 맺지 말라는 노회 결의를 불복했다는 이유로 위 4명의 목사직을 정직하는 한편 다락방 관계자 처리위원회를 9월 총회 때까지 존속시키기로 했다. 이후 1996년 9월 30일 임시회(노회장 김영태 목사)열고 다락방 관계자 처리위원회를 재판회(재판국장 이영대 목사)로 변경하고 기소위원을 선정해 기소위원회 기소 내용을 받아 박지온 목사(송현교회), 이성만 목사(서문제이교회), 강외석 목사(월광교회), 배종도 목사(월배동부교회)등 4인에 대해 다락방운동 이단 집단에 깊이 빠져 수차례의 노회 권면과 치리도 불복하고 교파 형성을 선동하며 이단 집단에 계속 가담한다는 이유로 면직 공고했다.
▴박지온, 이성만, 강외석, 배종도 목사
특히 박지온 목사가 시무한 송현교회의 부목사와 장로, 안수집사들에게도 1996년 11월까지 기간을 주고 돌아오지 않을 경우 시벌하기로 결의했고, 이후 돌아오지 않자 1997년 3월 4일 제22회 봄 정기노회에서 송현교회 부교역자인김태균 목사, 박광호 목사, 박창복 목사, 탁정식 장로를 면직했고 김석원 장로,김운섭 장로, 유성목 장로, 이상서 장로, 이세균 장로 등을 1년간 수찬정지 시벌했다. 또 이한호 목사(동서교회)를 면직시켰다.
또 1988년 6월 15일 김희식 목사(송현제4교회)를 면직했다. 당시 노회장은 남양희 목사다.
당시 판결문은 노회장 김영태 목사(남대구제일교회), 재판국장 이영대 목사, 서기 김용태 장로, 재판국원 임태득 목사, 조정호 목사, 이호일 목사, 황정심 장로, 배창수 장로 명의로 공표했다. 이듬해인 1998년 3월3일 제24회 정기회를 대명교회에서 열고 다락방전도집회 광고를 게재한 「국민일보」와 모 주간신문에 대해 불매운동을 결의했다.
∎ 경청노회:1997년 3월 4일 제70회 정기노회를 경산중앙교회에서 열고 서삼현 목사후보생을 제명했다. 또 같은 해 9월 9일 제71회 정기회(노회장 박정규 목사)를 자인제일교회에서 열고 다락방 관련자 강승수 목사징계 처리를 구미노회에 통보키로 했다.
∎ 서울남노회: 제42회 정기회를 10월 21, 22일 양일간 창신교회에서 열고 다락방사건 특별전권위원회(재판권 부여)를 구성하고 1996년 12월 6일 정은주 목사(강서로교회), 박지회 목사(강서로교회 부목사), 이호근 목사(강서로교회 부목사), 이재덕 목사(삼일교회), 강삼석 목사(은평교회), 등 5인을 류광수 다락방운동에 가담하지 말기를 수차례 권면했으나 불복하고 노회를 탈퇴하므로 면직공고했다.
▴정은주, 박지회,이호근 이재덕, 강삼석 목사
∎ 대구중노회; 대구동신교회에서 1996년 6월 5일 임시회를 열어 다락방문제는 노회 신학부에 맡겨 연구하도록 처리했다. 이후 제21회 정기회를 1996년 10월 15, 16일 양일간 대동교회에서 열고 다락방운동에 가담하고 노회 탈퇴를 선언한 김언수 목사(주암교회), 임도수 목사(달서중앙교회)2인을 면직했다. 또 총회 다락방 확산방지 및 이단성 규명위원장이었던 이상강 목사에 대해 조사처리위원회를 구성하고 재판권을 위임했다.
▴김언수, 임도수 목사
그리고 1년 뒤인 1997년 4월 15일에 제22회 정기노회(노회장 신성균 목사)를 범어교회에서 열고 다락방 관련 조사처리위원회의 보고대로 다락방을 두둔·비호한 자로 전국교회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사유로 이상강 목사를 제명키로 하고 1997년 4월 23일 제명 공고했다.
이상강 목사는 다락방전도운동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다락방전도운동은 이단성이 없다고 주장하며 총회의 결의에 반발하고 다락방으로부터 금전수수 의혹을 받았다는 죄목으로 제명되었다. 그 후 이상강 목사는 수년 동안 재판을 거쳐 금전수수설이 무혐의로 밝혀지면서 복권되었다.
∎ 경북노회: 1996년 11월 15일 제139회 1차 임시회를 열고 다락방운동 관련자 치리의 건을 조사처리위원회의 기소를 받고 치리회로 변경한 후 조사치리위원회가 소환했으나 불응하고 또 몇 차례 권면했으나 개심하는 여지가 보이지 아니하며 본 노회를 탈퇴하는 성명서를 내므로 김복렬 목사(장막교회), 정원복 목사(봉산교회), 손태수 목사(충만교회), 김일환 목사(대구선교교회) 4인을 면직과 출교 가결했다.
▴손태수, 김일환, 정원복 목사
∎ 함동노회: 제21회 정기회를 1996년10월 8일 성북교회에서 열고 이단대책전권위원회(위원장 김동안 목사)를 구성하고 다락방운동에 가담한 교회를 실사해 처리토록 결의했다. 이후 1996년 11월 18일 이단대책전권위원회는 회의를 열고 노회 탈퇴를 통보한 최봉철 목사(평화교회), 조기철 목사(부천대양교회)를 1996년 11월 19일 면직 공고했다.
∎ 북부산노회:1996년 11월 9일 강호인 목사(기쁜교회)를 면직했다.
▴강호인 목사
∎ 동부산노회: 1996년 10월15일 제143회 정기회에서 조은택 목사를 면직하기로 하고 1996년 11월 7일 면직 공고했다.
∎ 서수원노회:제11회 정기회를 1996년 4월 15일 은광교회에서 열어 다락방전도운동에 관한 조사처리위원회를 구성키로 했다. 이후 제12회 정기회를 1996년 10월 14, 15일 양일간 수원영광교회에서 열고 다락방운동과 관련을 맺었던이귀열 목사(수원새힘교회), 허일 목사(충실교회)2인을 면직하고이기수 목사(수원화산교회 부목사)에 6개월 근신 조치를 1996년 10월 14일 자로 공고했다. 또 다락방운동과 관계를 단절하기로 한이인기 목사(수원화산), 강재언 목사(경천교회)는 「기독신보」에 이 사항을 공고하기로 했다.
∎ 구미노회: 1995년 10월 최만순 목사(형곡제일교회)를 면직했고, 또 제21회 정기회(노회장 이강성 목사)를 1996년 9월 3일부터 5일까지 원평교회에서 열고 다락방조사처리 및 재판전권 위원회를 구성했다. 1997년 9월 9일 제23회 정기회(노회장 김승동 목사)를 선산제일교회당에서 열고 다락방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류택승 목사(광평교회), 강승수 목사(구미제일교회) 2인을 1997년 9월 10일 자로 면직 공고했다.
∎진주노회: 제80회 1차 임시노회에서 다락방운동 관련자 조사처리위원회를 구성하고 1996년 12월 23일 배종기 목사(독산교회), 권재홍 목사(황금교회)를 면직 공고했다.
∎울산노회:제34회 정기회를 1996년 10월 14일부터 16일까지에 이어 29일 명성교회에서 속회를 열고 다락방관련자들에 대한 조사위원을 선정, 임시회 때 조사 결과를 보고토록 했다. 이후 1997년 3월 1일박용희 목사(충신교회), 한기성 목사(강서교회)를 면직, 제명 공고했다.
▴한기성 목사
∎수도노회: 제50회 정기회를 광현교회에서 열고 총회가 규정한 다락방에 소속 교역자들이 참여할 경우 강력한 제재 조치를 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1998년 7월 7일 노회장 우병락 목사는 다락방 관련자로서 노회를 탈퇴하고 공고까지 한 이유로 한상옥 목사(양평 송학교회)를 면직, 출교 공고했다.
∎ 북강원노회: 제14회 정기회를 3월 26일부터 황성중앙교회에서 열어 다락방 및 이단성이 보이는 성경 공부 모임의 조사를 위해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후 1997년 10월 13일 정기회(노회장 전상기 목사)를 남면교회에서 열고 다락방운동 연루자 심일보 목사에 대해 재판국을 설치해 처리토록 했다. 이후 1998년 4월 13일 제18회 정기회(노회장 김철환 목사)를 양구동면교회에서 열고 다락방 관련된심일보 목사(주동행교회)를 면직했다.
∎ 제주노회: 1996년 11월 26일 제61회 1차 임시회를 열고 구용옥 목사(시민교회)를 노회의 권면과 치리를 무시한 채 다락방전도운동에 계속 참여했다는 이유로 면직했다.
▴구용옥 목사
∎ 남중노회: 제54회 정기회를 1997년 4월 14일 소록신성교회에서 다락방전도와 관련된 이일향 목사(서광교회)를 정직키로 하고 김성호 목사(제일사랑교회), 황선권 목사, 양일승 목사를 면직했다.
▴이일향, 김성호, 황선권, 양일승 목사
∎ 함북노회: 1998년 4월 21일 남부중앙교회에서 제191회 정기회를 열고 다락방에 관련된 조승용 목사(산성교회)를 면직 제명하기로 했다.
∎ 동평양노회: 1996년 12월 28일 제139회 제1차 임시노회에서김동권 목사(안양동부교회), 정광수 목사(성남성지교회), 이승인 목사(수문교회)3인에 대해 노회 조사처리위원회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불복 탈퇴했다는 이유로 면직 제명했다. 한편 김동권 목사는 1996년 9월 15일 공동의회를 개최하고 류광수 목사와 함께 주님 오시는 날까지 다락방전도운동을 함께하기로 결의하고 노회 행정보류를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사실상 노회를 탈퇴했다.
▴김동권, 정광수 목사
∎ 대구노회: 1997년 3월 4일 제51회 정기회를 은평교회에서 열고 천세호 목사(평은교회), 한상훈 목사(내서교회), 김영배 목사(동양교회) 3인에 대해 조사처리위원회 소환에 불응하고 몇 차례 권면했으나 개심하는 여지가 보이지 아니하고 노회를 탈퇴하는 성명을 냈다는 이유로 1997년 3월19일 면직 공고했다.
또 1998년 6월 25일 제35회 1차 임시회를 열고 박광섭 목사를 다락방 관련자로서 총회 및 노회 탈퇴에 대한 내용증명을 보내온 사유로 면직했다.
이듬해인 1998년 3월 3일 제53회 정기회(노회장 신주희 목사)를 중리교회에서 열고 다락방 관련자 일본 강명주 선교사(달서교회 파송)를 면직하고, 케냐 김동길 선교사(성서중부교회 파송)는 임시회까지 보류하기로 했다.
▴천세호,강명주, 김동길 목사
∎ 서평양노회: 1997년 4월 15일 제140회 정기회를 삼광교회에서 열고 다락방관련자 김경태 목사, 손순기 목사(산성교회)를 면직하고, 이창섭 목사(관양제일교회), 김재순 목사를 정직시켰다.
▴ 순순기, 이창섭 목사
∎ 전주노회:1997년 2월 12일 이양로 목사(충현교회)를 3차에 걸쳐 등기로 우송해 소환 권면코자 했으나 이에 불응해 여전히 다락방운동에 협력한다는 사유로 면직했다.
∎ 한남노회: 1997년 4월 14일 제78회 정기회를 청농교회에서 열고 다락방관련자 공영길 강도사를 면직했다. 이후 2000년 봄 정기노회에서박왕재 목사를 면직 처분했다.
▴박왕재 목사
∎ 서울노회:
1998년 4월 20일 제53회 정기회를 운산교회에서 열고 다락방 관련자 정근모 목사(소망교회), 황상배 목사(양무리교회)2인을 다락방조사위원회에서 소화해 권고했으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아 제명하기로 하고 1998년 9월 5일 제명 공고했다.
▴정근모, 황상배
∎ 중서울노회: 1998년 10월 13일 박희창 목사(평화교회), 정병우 목사(송파로교회) 2인을 제명 공고했다.
∎ 황동노회: 제87회 정기회를 1996년 10월 14일 새한교회에서 열고 다락방과 관계된 자를 처벌토록 지시한 총회 결의사항은 정치부에 맡겨 처리하기로 했다. 이후 1996년 12월 30일 제87회 1차 임시노회에서 정현국 목사(만세반석교회), 박OO 목사(사랑의교회)에 대해 수차례 걸쳐 소환, 권면코자 했으나 이에 불복하고 노회를 탈퇴하는 성명을 했다는 사유로 면직했다.
이후 정성조 목사, 김성수 목사 2인을 면직했다.
∎ 서대전노회: 1998년 7월 13일 곽요섭 목사(혜광교회)를 다락방 추종한 자로 소환불응 등의 사유로 면직 공고했다.
▴곽요섭 목사
∎ 경기노회:1997년 6월이종훈 장로를 제명했다.
∎ 인천노회:2000년 봄 정기회에서 류광수 다락방사건과 관련해 송경삼 목사(안디옥교회)를 면직했다.
▴송경삼 목사
∎ 서울동노회: 1998년 10월 26일 다락방 관련으로 최학도 목사를 면직 공고했다.
∎회고: 이한호 목사(동서교회)
당시 임태득 목사가 시무하시는 대명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겼습니다. 1993년 5월경으로 여겨지는데, 당시 임태득 목사님도 류광수 목사님을 초청해 3박 4일간 다락방전도집회를 했습니다. 당시 박지온 목사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집회를 열었는데 제가 나흘 동안 부교역자로 류 목사님 가까이에서 섬길 수 있었어요. 참 복음에 대한 엄청난 도전을 받으며 메시지 속에서 충격을 받고 정말 영적으로 눈물다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목회는 덕도 필요하고 사랑도 필요하고 정치도 필요하고 행정도 필요하지만, 이것 가지고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복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담임 임태득 목사님도 다락방 현장메시지 교재를 가지고 구역마다 성경 공부를 할 만큼 다락방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습니다.
그해에 저는 하양 동서교회를 개척했고 전도운동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예장합동 측 안에서 다락방 이단 시비가 불거지면서 남대구노회에서 1차로 박지온 목사님을 비롯한 일부 목사님을 면직 처분하였고 이듬해 1997년도 봄 정기노회에서 저 역시 면직 처분 당했습니다.
당시 노회 하루 전날 임태득 목사님이 저를 불러 다락방에 참여 안 하겠다는 각서를 쓰면 없던 일로 하겠다고 제안해 생각해 보고 노회에서 입장을 밝히겠다고 했으나 노회에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궐석재판으로 면직 처분을 당한 것입니다. 한 번은 우리 교회(동서교회)에서 다락방 합숙의료전도팀이 의료전도 활동을 했는데 당시 이웃 하양교회의 김형국 목사가 자기 교회 청년을 시켜 의료전도활동과 현수막 등 사진을 찍어 남대구노회에 다락방 관련자로 고발했던 것이 발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다락방 이단 운운하는 바람에 보수적이고 좁은 지역에서 금방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80명의 교인이 14명 정도만 남게 되었습니다.
평생 커왔던 예장합동 측 배경도 중요했지만, 정말 복음 가진 전도자를 외면하는 것은 목회자로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 떠날지라도 다시 출발하자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5년 계약으로 있었던 교회 땅 주인이 마트가 들어설 예정이라며 나가달라는 겁니다. 설상가상이었던 셈이지요. 결국 빈손으로 나와서 농가 창고를 얻어 7년 동안 창고 교회로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참으로 어려운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 형편으로는 교회당을 건축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이 하시면 할 수 있다는 말씀 속에서, 중직자들이 먼저 교회를 짓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교회의 형편은 계약금도 없었는데 돈들이 만들어지고 건축업자들이 도움을 주면서 지금의 교회당을 짓게 된 것입니다. 대지 650평에 건평 250평의 교회당이 세워졌습니다. 교회 위치도 하양읍의 중심이고. 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복음전도 속에서 어려움 등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고 말씀의 응답 속에서 교회당을 마련케 하셨습니다.
∎회고: 김성호 목사(제일사랑교회)
당시 저는 예장합동 남중노회 제일사랑교회 담임목사로 목회중이였습니다. 물론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신학과 졸업을 했습니다. 1993년 저의 장인이신 이일향 목사님(소천)이 다락방전도운동을 먼저 접하신 이후에 사위인 제게 목사로서 평생 전도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함께 전도할 것을 권하신 후부터 다락방전도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예장합동 제81회 총회에서 다락방 참여 금지를 결정하자 노회 역시 다락방 참여 금지명령을 내렸습니다. 이후 1997년 정기노회에서 면직하려 하자 면직은 목사에게 사형(死刑)과 같으므로 최후진술(最後陳述)의 기회를 달라고 요청해 증언을 시작하는 중에 마이크를 끄라는 노회장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참석한 장로님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육성으로 끝까지 증언하자 단에서 끌어내림을 당하고 면직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모든 성도의 100% 동의로 다락방전도 운동에 참여하게 되어 피해는 없었으나 이후에 다락방 이단이라는 소리가 들려오자 성도 절반이 신앙생활하기 힘들다고 떠나갔습니다. 다락방 이단 정죄 당시 본인이 속해 있던 예장합동측 목사만 다락방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숫자가 약 1000명을 상회할 정도였는데 이 수많은 목사를 이단에 빠졌다고 정죄한 것은 예장합동 측의 ‘누워서 침 뱉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락방이 진짜 이단이 맞다면 그렇게 많은 목사가 이단도 분별하지 못하고 빠졌으므로 잘못 가르쳤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다락방이 이단이라면 잘못 가르친 책임이 예장합동 교단 측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회고: 배종기 목사(독산교회)
저는 1992년도에 총회신학대학원 목회학과를 졸업(85회)하고 이듬해 1993년 10월 4일 예장합동 진주노회 제85회 시 목사 안수를 받고 진주노회 독산교회 담임목사로 사역을 했습니다.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뭔가 새로운 도약과 함께 목회의 전환점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 있는데 1994년 8월경 김성윤 목사로 부터 경남 목회자 다락방 성경 공부가 있다고 해서 참석하게 되었고 참석할수록 힘을 얻고 매주 복음이 정리되는 은혜와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민되고 어려웠던 전도가 복음이 정리되고 나니 자연스럽게 현장으로 인도받게 되면서 대학 전도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은 누가 하라고 해서가 아니라 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뜻이며 소원이었고 바로 저의 간절한 기도제목이며 목회자로서 꼭 해결해야 될 부분에 대한 답이 나온 응답이며 축복이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다락방전도운동에 참여한 이후 6개월 만에 전도합숙을 받고 생의 답이 났다고 봅니다. 그러던 중 1996년 봄 노회 이후 노회 조사처리위원회의 호출로 면담하면서 목사와 주의 종의로서 양심으로 다락방훈련 이후에 일어난 전도운동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그러자 다락방 단체로부터 돈을 받느냐고 물었습니다. 전혀 그런 적이 없고 오히려 힘이 있다면 선교헌금으로 돕고 싶다고 했습니다. 가을 노회 이후 임시회를 열고 노회 자체 결정되었는지(?) 사전에 전화나 어떠한 연락도, 소명할 기회도 없이 노회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한 후 1996년 12월 25일 자에 일반 우편으로 통고해 왔습니다.
성탄예배 후 일반 편지 형식으로 우체부가 던져준 우편 속 한 장의 서류 ‘목사 면직 출교’선고를 받고 섬기던 독산교회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교회에 전혀 피해를 주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오기로 결심하고 주변 폐가로 짐을 옮기고 겨우내 추운 날을 가족과 함께 떨면서 보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이단으로 누명 쓴 상태라서 가족이나 집안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었고, 폐가 냉방에서 추운 겨울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오직 전도하며 지금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락방전도운동을 해오면서 느끼는 것은 그 시절 저는 한국교회의 보수 장자 교단이라는 착각 속에 신학교를 다녔지만, 실상 신학 공부 후에도 가장 중요한 복음에 대한 정확한 정리가 제대로 안 되었습니다. 기도응답과 전도와 성령인도받는 성경적인 방법을 모르고 목회하려니까 교회는 부흥되지 않고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니 성도들에게 제대로 복음을 심어주지 못해 성도들 역시 현장에서 영적인 힘이 없어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탁상에서의 신학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호: 예장 통합 편 / 한국기독일보 발행인 윤광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