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복음 전도운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단회적인 전도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전도의 불길이 시작된 전도운동의 뿌리를 한국교회사에서 찾아보고자한다. 이번 호에는 한국 부흥의 아버지로 불리었던 하디 선교사와 원산지역 전도운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 하디(Robert A. Hardie1865-1949) , 의료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다.
▲ 사진 CGNTV 영상캡쳐
하디(Robert A. Hardie1865-1949)는 1865년 6월 11일, 캐나다의 온타리오 주 칼레도니아에서 출생했다. 그는 1886년 토론토 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요나단 에드워드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18세기 미국의 대부흥 운동(대각성 운동)은 19세기 중엽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의 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1806년에 미국 윌리엄스 대학(Williams College) 안에 신앙 동우회가 조직되었고, 1810년에는 미국 외지 선교회가 조직되었으며, 남북전쟁이 끝난 뒤 1886년에는 매사추세츠 주 마운트 허먼(Mount Hermon)에서 제1회 하령회(夏令會, Summer Conference)가 열렸다.
이 하령회의 주도자는 유명한 부흥사인 동시에 시카고 YMCA 지도자이던 무디였으며, 미국과 캐나다의 87개 대학에서 251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들이 외친 구호는 “모두 가자, 모두에게로(All should go, and go to all)”였다. 이 학생 하령회가 있은 지 3년째 되는 해(1888~1889)에는 ‘학생 외지 선교단’(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이 발족되었으며 그 구성원은 각 대학 YMCA, 미국 신학교 선교 연맹, 캐나다 대학 선교 연맹 등 4개의 초교파 학생단체들이었고 이때에 학생 대표로 활약했던 모트(John R. Mott)와 라이언(D. Willard Lyon)은 한국 YMCA 창설의 결정적인 구실을 한 인물들이었다.
이때 아시아 여러 나라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모두 119명으로 그 중 69명은 중국에, 46명은 일본에, 7명은 한국에 파송되었다. 한국의 초대 선교사들은 거의 모두가 이 “외지 선교 자원단”의 영향 하에서 성장한 인물들이었다. 그중 캐나다 토론토 대학 YMCA 파송으로 온 게일(J. S. Gale)은 마운트 허먼 학생 하령회에 참석하여 무디의 설교를 듣고 한국 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하였고, 게일의 학교 후배 하디도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서 대학 공부를 하였다. 하디는 1887년 켈리와 결혼하였으며, 1890년 9월 가족과 함께 한국에 와서 잠시 제중원에서 일하다가, 1892년 11월 원산에서 의료선교활동을 시작하여 1898년 캐나다 대학 선교회와의 계약기간(8년)이 끝나고 미국 남감리회 선교회에 소속되었다.
▪ 원산기도회와 하디의 회심,,,
▲ 사진 CGNTV 캡쳐
원산기도회는 1903년 겨울, 한국을 잠시 방문한 스웨덴의 프린스 목사와 중국에 체제중인 남감리교 선교사 화이트(Miss M. C. White) 여사와 함께 원산 감리교 선교사들이 기도와 성서 연구를 위해서 한 주간을 지낸 일이 있었다. 그 후에 이들은 장로교회와 침례교 선교사들과 교인들까지 연합하여 창전교회에서 한 주일 내내 밤 집회를 하면서 보냈다. 이때 하디(R. A. Hardie)선교사에게 설교를 요청했고 그는 강원도 북쪽에서 몇 해 동안 애써 일했으나 결실을 못 맺은 사실을 고백하다가 선교사로 오게 된 자신의 동기를 반성하고 자책하던 중에 뜨거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 체험은 죄에 대한 깊은 강박관념이었다. 그는 비로소 구원에 대한 확실한 체험을 하게 되었고 이 구원의 감격을 혼자서 간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이 구원의 체험을 동역자 선교사들에게 간증하게 되었고 간증을 듣고 그의 동역자들도 은혜를 받았다. 그는 이번에는 한국 교인들 앞에 나가서 간증함과 동시에 자기의 죄를 부끄러움 없이 공공연히 고백하였던 것이다. 외국인으로서 피선교지의 한국인 앞에서 이런 공개적인 자기 죄의 고백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성령의 강권으로 하였던 것이다. 그의 깊은 신앙 체험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3년 동안 강원도에 교회가 처음 세워진 곳에서 애써 일하였으나 선교 사업에 실패하였다. 이 실패감은 나에게 헤아릴 수 없는 타격을 주었고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기진맥진의 상태에 이르렀다. 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 첫 주일 아침 예배 시에 우리 원산 교인들 앞에 섰을 때 얼굴에 부끄러움과 혼돈을 띠고 나의 교만을 고백했다. 그리고 마음의 완악함과 믿음의 부족함과 그것으로 말미암아 빚어낸 많은 잘못에 대하여 고백했다. 이때 그들은 생전 처음으로 실질적 경험에 있어서 죄의 자각과 회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다.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또 다음 3주 동안에 내 경험과 내 생활에 있어서 분명한 변화가 일어난 것을 그들이 보았을 때 그들은 믿음에 대한 새로운 교훈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을 죄악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도 배웠다.”
▪ 전도운동과 부흥의 불길
1904년 봄에도 원산 집회는 반복되었다.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의 연합 사경회 중 장로교의 로브(A. F. Robb) 목사가 특별한 감회에 젖어 한국인으로서 역시 은혜에 접한 전계은과 함께 원산 거리를 누비며 가슴을 치면서 통회하며 전도했고, 감리교의 정춘수 역시 원산 거리를 왕래하면서 감격과 열의로 이 성령의 은사를 선포하였다. 평양의 오순절이 1906년 8월, 평양의 선교사들은 하디를 초청하여 집회를 가졌다. 시련의 때에 선교사 자신들의 선교 태도에 불명료와 주저의 기색을 스스로 자책하면서 진행된 이 집회에 웨일즈와 인도 지방에서의 놀라운 부흥의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북받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갈망이 평양 교회의 언저리에 짙게 깔려가고 있었다. 사경회의 영향, 국가의 비운에 통회하는 기독교인의 내성(內省), 하나님의 도움밖에는 기댈 곳이 없다는 신앙에서 이 부흥의 물결은 도도히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성령운동은 1907년 평양에서 열렸던 대사경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음호에 계속] / 윤광식 기자(kidok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