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이 노래는 천사가 들려준 아름다운 노엘입니다. 이 첫 번째 들려준 노엘이 영원한 노엘이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 한 구절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며, 둘째 땅에서는 평화이고, 셋째 사람들에게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 부분은 서로 관계성을 가지면서 조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높은 곳과 낮은 땅이 대조되어 있고, 하나님과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 영광과 평화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서로 상응하면서,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됩니다. 즉 하늘의 영광을 무시하고 땅에 평화가 있을 수 없고, 땅이 평화를 잃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도 가리우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기뻐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聖誕)에서 시작되었고, 또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성탄절의 의미를 알며, 성탄절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성탄절은 이땅에 평화를 주시려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늘은 평화가 필요없습니다. 하늘은 싸움이나 전쟁이 없고, 오직 영광만이 필요한 곳입니다. 그 영광은 이 땅에 불화가 없어지고, 전쟁이 종식되고, 평화가 이루어질 때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쁨이 있을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이루어지기 위해 하나님은 사람이 되셔야 했고,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구유에 나셔야 했으며,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를 환영하셔야 했습니다. 또한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존중히 하고,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둘째, 주님은 평화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일시적인 불화가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진정한 기쁨을 주시기 위해 일시적인 슬픔을 주신 것입니다.
마 10:34-36에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햇습니다. 단순히 이 말씀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 구절만으로는 예수님이 싸움을 좋아하시는 선동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무조건적인 양보나 주관도 없는 타협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위해서 투쟁을 통해 얻어진 평화인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거짓을 진리로 바꿔놓기 위해서는 진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처럼 자신과 투쟁하여 참 평안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의가 이뤄지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바울은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도 자기 속에 있는 마음의 법과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과 투쟁을 해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기쁨과 평안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하는 아픔을 가지면서도 참된 기쁨과 영원한 평안을 누리기 위해 고난도 감수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은 수많은 싸움과 문제들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요 14:27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총회의 모든 지체들이 성탄절뿐만 아니라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생명의 주로 오신 예수님을 날마다 선포하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평화의 사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 윤광식 기자(kidok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