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카톨릭의 종교개혁의 서막을 연 발도파교회가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부터 지난해 6월22일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중세에 이단으로 정죄되어 카톨릭으로부터 탄압과 잔인한 박해를 받았던 것에 대해 사죄를 받았다. 이는 로마 교마교회가 700년만에 참회와 사죄를 한 것이다.
▲ 프란치스코 교황이 발도파의 목사 에우제니오 베르나르디니를 발도파 교회에서 포옹하고 있다.(사진 출처 = CNA)
카톨릭프레스 보도에 따르면 교황은 이탈리아 북부 도시 토리노 방문 중 중세에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당하고 이단으로 몰렸던 발도파 교회를 직접 찾아 “역사를 되돌아볼 때, 믿음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폭력 앞에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며 "하느님께 모든 죄를 인정할 수 있는, 서로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시기를 간청하다“고 밝혔다.
교황은 이어 "가톨릭교회가 보인 비기독교적이고 심지어 비인간적인 태도와 행동에 대해 가톨릭교회를 대표해서 사과한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요"라고 간청했다.
이에 대해 토리노의 발트파 교회 베르나르디니 목사는 “무엇이 발도파의 죄란 말인가?”라며 “그것은 평신도들에 의한 복음화 운동이었다”고 규정했다며 당시 로마카톨릭의 탄압과 박해는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발도파 교회는 1170년대 프랑스의 한 부유한 상인 피에르 발도(사진)에 의해 창설됐지만, 그는 파문되고 교인들은 이단자로 규정돼 박해를 받았다.
역사신학자들은 발도파가 종교개혁의 서막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발도파는 중세 부패한 성직자들과 말씀이 빈곤한 교회에 대한 평신도 복음운동이었고 이는 중세카톨릭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발도파는 초대교회 신앙형태를 추구한 신앙운동이었다. 로마카톨릭이 사제이외에 설교를 금지시켰으나 발도파 사람들은 예수의 사도들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설교할 수있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로마카톨릭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발포파의 복음적 신앙은 사제가 아닌 사람도 성찬을 베풀수 있으며,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성자숭배, 성자유품숭배, 성상숭배가 성경적이지 않다고 거부했으며, 부패한 성직자들이 집행하는 성례의 효용성을 의심했다.
또한 발도파는 모든 종류의 살인을 거부했다, 법적인 살인, 북지를 위한 살인 이든 간에 일체 살인 행위를 반대했다. 로마교회의 금식과 축일에 대한 규례를 거부하고, 교부들의 가르침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비판했다,
사제에게 참회고백을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직접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나님 만이 가졌다고 믿었다. 또한 연옥교리를 잘못된 것이며 죽은 자를 위한기도는 무의미하다고 했다.
발도파교회의 수는 급속히 증가했다. 이는 중세교회에 대한 불만의 반증이었고 변화와 개혁을 갈망하고 있었다는 입증이었다.
발포파 신앙은 특히 하층계급에서 번졌다. 처음에는 납부 프랑스와 스페인, 그 다음에는 독일, 알프스, 롬바르디 지방에 확산되었다.
이러한 발도파의 급속한 성장은 로마카톨릭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자 위협이 되었다.
1487년 교황 인노센트 3세는 칙서를 발표해 이 교파의 근절을 명령하는 등 가톨릭교회는 무자비한 박해를 계속했다. 군대를 동원해 많은 발도파 신자들을 살해했다. 그이후 프랑스와 스페인 지역의 발도파 신도수는 점점 감소되었지만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서는 여전히 상당수 사람들이 발도파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고, 또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 이 교회의 신자는 약 4만 5,000 명으로, 대부분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에 분포돼 있으며, 본부는 토리노 지역에 두고 있다./윤광식 기자(kidok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