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최초 종교개혁운동 “신사불참배 교회 재건운동”

신사참배 수용한 한국교회와 맞선 최초의 종교개혁운동

2017-10-21 21:09:26  인쇄하기


16세기 종교개혁이 로마카톨릭에 대한 개혁운동이었다면 한국교회사의 신사참배 거부 운동은 사실상 신사참배 즉 우상숭배를 받아들인 한국교회를 향한 최초의 종교개혁운동이었다. 이들은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노회로부터 면직 제명, 출교를 당하고 일제로부터 온갖 수난을 겪으며 순교를 감내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이들을 배척하고 길거리로 내몰며오히려 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사실상 신사참배와 타협한 한국교회는 더 이상 초대교회 전통을 계승한 개신교가 아니었다.

  1930년대에 들어 일제가 대륙침략을 재개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사상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기독교계 사립학교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자 이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신도들이 서로 연대를 맺고 저항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광복 후 대부분의 신사들은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사참배를 거부한 자들 중에는 수감, 투옥되는 것은 물론이고 순교에까지 이른 이도 있었다.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고 거부자들의 결속을 강화하는 중심 인물로 국내에서는 평안남도의 주기철(朱基徹), 평안북도의 이기선(李基宣), 경상남도의 한상동(韓尙東), 전라남도의 손양원(孫良源) 등이 있었고, 만주지역에서는 박의흠(朴義欽김윤섭(金允燮헌트(B.F.Hunt, 韓富善) 등이 있었다.

 

신사참배 거부항쟁자들에 대해서 당국은 개별적으로 위협, 구금했던 때도 있었다. 1938년 장로회 총회를 앞두고 주기철·이기선·김선두 목사 등을 예비구금 형태로 검속한 것도 그 일례다. 당국은 이렇게 위협과 고문을 가해도 굴하지 않는 주동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영향력이 확산되지 않도록 했다. 이런 경우, 예비검속 형태로 구금하여 정식 재판에 넘기지 않고 고문하고 장기 구금했다. 때문에 장기구금으로 순교한 이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사건이 평양지방법원에서 취급했던 이른바 예수교도의 신사불참배 교회 재건운동사건이다.

 

이 사건의 관련자들은 모두가 조선예수교 장로파 교역자 혹은 독실한 신자들로서 19398월 이래 성서의 이른 바 말세론에 기초하여 머지않아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된다고 하여 궁극적으로 우리(일본) 국체를 변혁하여 천년왕국을 건설할 것을 목적으로 신사불참배 재건총회 조직 준비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이를 확대 강화하기 위해 활동하고 또한 여러 가지 불온언사를 함부로 한다고 했다. 일제는 이를 근거로 1940920일 새벽을 기하여 전국적으로 신사참배 거부항쟁자 193명을 검거했다. 평양지방 검사국은 1941515일에 이기선 목사 등 68명을 송치하고 그 1년 후인 1942512일에 그 중 35명을 기소, 예심을 청구하고, 8명은 기소 유예, 나머지 25명은 불기소 처분했다. 예심 심리는 3년간이나 계속되어 그 동안 최봉석 목사, 주기철 목사, 최상림 목사, 박관준 장로 등 4명이 순교하여 평양지법 예심종결 결정에서 제외되었고, 이기선 목사 등 21명에 대해서는 1945518일에야 예심종결 결정이 났다.

 

신사참배 반대 투쟁 전사 - 주기철

이들 중 주기철은 평양신학교 부흥회에서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제목으로 설교,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도화선을 당겼고, 이 때문에 참배 반대를 교사했다 하여 검거되었다. 19382월 초에 1차로 검속 투옥된 후 그 해 가을에 제 2, 19398월에 제 3, 19405월에 최후로 검속 투옥되어 1944421일 평양 감옥에서 순교할 때까지 전후 7년간 옥중에 있었다. 그의 신사참배반대투쟁은 전국에 산재한 반대투쟁자들을 격려했고 반대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주기철이 시무하는 평양 산정현 교회는 신사참배운동의 본거지와 같았는데, 갖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최후에 폐문당하면서도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신사참배 반대 순회전도사- 이기선

이기선은 19387, 8년간 시무하던 의주 북하동(北下洞)교회를 사면하고 신사참배 반대를 권유하기 위해 각지를 순회하게 되었다. 그 후 19394월 하순경에는 평양 채정민(蔡廷敏) 목사와 더불어 신사참배 결사반대 동지를 규합하여 신사불참배 신교회를 설립할 것을 다짐했고 그 뒤 김의창(金義昌) 목사와 함께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일대를 순방하면서 많은 동지를 얻었다. 19403월 중순경 이기선·김형락(金瀅樂박의흠·계성수(桂成秀김창인(金昌仁김화준(金化俊) 등과 신사불참배운동의 기본방향을 결정했다. 이같은 결정으로 신사불참배운동은 더 구체성을 가지고 조직적 운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고 만주와 평남·경남에 신사불참배 신도들의 교회 이탈과 그룹예배를 이끌게 되었다. 이기선은 그 뒤 계성수, 채정민, 김의창 등과 함께 여러 곳을 돌며 활동하다가 19406월경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신사불참배 노회 결성 운동- 한상동

마산 문창교회 목사로 시무하다가 1938년 사임한 한상동은 신사참배 반대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추진하지 않고 동지적 결합을 유도하여 조직적인 신사참배거부운동으로 전개했다. 그는 경남 거주 호주 선교사들(D.Hoking:許大是, M.Trudinger:秋瑪田 )의 협력을 구하고 주남선(朱南善:南皐최상림(崔尙林

이전글 | 한국교회, 종교인과세 탁상 행정 규탄 성명 발표
다음글 | 교회의 정통성 상실한 한국교회 종교개혁 기념할 자격 없다.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