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월교회는 전남 영광군에서 염전으로 유명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야월교회는 6.25 전쟁 당시 북한 괴뢰군이 퇴각 하면서 교회에 교인을 모조리 감금하고 불태워 단 한 명의 교인도 남김없이 학살했다. 교인 모두가 순교를 한 점은 한국 교회사에서 유일한 교회이다.
야월교회는 1904년 유진벨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전주, 군산, 나주로 하여 목포에 선교센터를 만들고 전라지방에 복음을 전하던 중 당시 육상도로가 열악하여 선박을 이용하여 서해안으로 북상하며 복음을 전하다가 법성포 인줄 알고 들어온 것이 야월도(당시는 섬이었다)였다. 야월도에 교회를 세움으로 이 지역에 복음이 들어왔다. 야월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해 문을 닫고 각 교인들은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과 더불어 곧 재건된 야월교회는 조양현 허숙일 두 영수가 교회 강단을 지켜왔다.
그러나 곧이어 불어 닥친 6.25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은 이 조용한 마을을 덮쳤다. 북화 괴뢰군이 야월리를 점령하면서 야월교회에도 들어왔다. 교인 이래봐야 고작 65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교회였지만 야월교회는 초대 교회처럼 사랑이 넘치는 교회로 소문나 있었다.
6.25 전쟁직후 전남도 야월리까지 점령한 인민군은 야월교회를 접수하고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했다. 결국 교인들은 가정으로 뿔뿔이 헤어져서 각각 예배를 드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민군과 죄익활동자들의 교인색출활동에 그들은 숨을 조려야 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며 9.28 서울 수복이 될 때 기독교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국군과 UN군을 환영했다 하여 북한 괴로군과 좌익들은 마지막 철수 직전 교인들을 대거 학살했다.
야월교회 김성종, 조양현 영수와 최판섭, 최판원 집사는 염산 설도 수문 앞에서 개별적으로 끌어다 물에 빠뜨려 수장 처형하였고 그의 가족들과 수많은 교인들은 밤에 두우리 쪽 큰 북재 넘어 공동묘지에 직경 6m 넓이의 구덩이를 파서 손과 몸뚱이를 묶어서 구덩이에 생매장시키어 죽이기도 했다. 후에 한 구덩이에서 80구의 사체를 발굴하기도 했다.
▲ 순교자 명단, 자녀중에는 어인아이들도 있었다.
이어서 그 해 10월 어느 날 인민군이 철수 직전에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마을의 좌익 청년들은 밤에 몰래 모여서 예배하는 이들을 색출해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교회로 모이게 했다. 교회에 감금한 채 북한 괴뢰군은 교회당에 불을 질러 모두 순교했다. 결국 교인도 교회건물도 없는 마을이 되었었다. 야월 교회 성도들은 하나같이 값진 신앙을 지키다가 한 분도 남김없이 살해되어 순교제물이 되어진 것이다.
▲재건된 야월교회 현재 모습
북한 괴뢰군이 물러가고 교회에는 3년 만에 안창근 전도사가 부임하였고 현재의 교회건물을 재건했다. 광주선교부의 도움으로 교회는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기독교인 순교기념관은 2006년 6월 전국 교회의 헌금과 영광군청의 지원으로 연건평 2백50평 규모로 건립되었다. 기념관은 야월교회 순교자 뿐아니라 영광군의 기독교인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있다. /윤광식 기자( kidok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