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청년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사진)은 일제하 민족진영 모두가 인정하는 ‘큰 어른’ 이었다. 세계열강이 우리나라를 침탈하려고 각축을 벌이던 구한말 독립협회활동과 YMCA운동을 통해서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민족을 계몽하고 인재를 양성한 우리민족의 선각자이자 스승이었던 그가 1927년 오늘 3월 29일 소천했다.
그가 일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게 된 것은 바로 감옥에서다. 1902년 6월 정부의 무능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아들과 함께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른바 개혁당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이상재는 3년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는 감옥에서 우연히 감옥 벽 틈에 끼여 있던 마태복음 5장과 산상수훈을 발견하고 읽고 또 읽으며 그리스도를 만나 일평생을 기독교신자로 살게 된다.
1904년에 풀려난 그는 YMCA를 통해 구국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한다. 1913년 한국인 최초의 YMCA 총무가 되어 기독교적인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이 당시 이상재 선생은 젊은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는데 이 사실은 성결교 서울신학대학을 만든 성결교의 어른 이명직 목사가 자신의 자서전 ‘은혜기’에 이상재 선생으로 부터 성경공부를 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명직 목사의 자선전 '은혜기'
그 은혜기에는 YMCA에서 일가 할아버지 이상재 선생에게 처음으로 성경공부를 한 내용이 나온다. 일가 이상재 할아버지에서 이어진 신앙의 꽃이 이명직 목사에게 이어진 것이다.
▲서울신학대학교 100주년 기념관
1907년 만국평화회의 밀사사건 때도 투옥 되었으나 1919년 3 .1운동 때도 배후인물로 지목돼 또 옥고를 치렀다.
그는 조선교육협회 회장과 소년척후단(보이스카우트 전신) 총재를 역임한 그가 언론인으로서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것은 1924년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하면서였다. 그가 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조선일보>는 우리나라 최초로 조석간을 발행하고 신문만화 「멍텅구리」를 연재했으며 최초의 여기자 최은회를 채용했다. 그 덕에 <조선일보>는 재정난과 일제의 거듭된 탄압을 이겨낼 수 있었지만 세금을 제때 못 내 가산을 전부 강제 차압당한 적이 있을 만큼 그는 언제나 가난했다.
1927년 2월에는 신간회 초대 회장을 맡았으나 그로부터 1개월이 지난 1927년 3월 29일 결국 노환으로 눈을 감았다. 한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에는 무려 20만 명이 몰려들 정도로 그의 죽음은 온 국민의 슬픔이었다. /윤광식 기자(kidok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