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이 있다. 동생들을 봐주느라 나의 초등하교 입학은 일이년이 늦었다. 당시는 새 학년이 4월에 시작되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나의 고향은 섬진강이 끝나는 곳에 있는 오백여 호 남짓한 다섯 개의 마을로 구성된 작은 섬이다. 생활은 마을마다 조금은 다르지만 동일하게 겨울이면 김을 하는 것이 주업이고, 김이 끝나는 늦은 봄부터 초가을까지는 마을의 특성에 따라 농사를 짓거나 조개를 캐거나 고기를 잡는 일을 하며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을 하는 작업은 4월 중순이면 끝이 난다. 4월 초순의 이른 아침이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마당에서 김을 뜨는 작업을 하고 계셨고, 나는 학교 등교 전에 부모님의 일을 돕고 있었다. 그런데 동네 이장이 낯선 사람과 함께 마당으로 들어와서 몇 마디 말을 아버님과 주고받더니 그대로 아버님을 데리고 나갔다. 아버님의 그때 나이가 우리 나이로 서른아홉, 어머니는 서른셋이었다. 어머니가 스물하나에 나의 바로 손위 형을 낳고 그 때 벌써 5남매를 두고 있었다.
그날 아침 아버님이 보국대에 끌려가신 것이다. 인터넷에서 ‘보국대’를 찾아보면 일제가 정신대와 함께 남성들을 강제노역에 끌려간 것을 말하고, 홍천 출신의 소설가 석도익이 쓴 ‘사람책④’에 한국 전쟁 당시 피난 중에 아버지가 보국대로 전선에 투입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가던 중에 붙들려간 것을 말할 뿐, 전쟁 이후의 보국대에 대한 설명은 인터넷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 민간인을 아무 기준도 없고, 영장도 없이 끌고 가서 6개월 씩 노역을 시켰던 기록은 아무 곳에서도 찾지 못했다. 4월에 잡혀간 아버지는 10월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보국대에 끌려가신 이후 딸이 귀한 우리 집안에 외동딸이었던 일곱 살짜리 여동생이 홍역으로 죽었었다. 차마 이 사실을 아버지께 알릴 수도 없었던지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시면서 코가 있는 여동생의 꽃신을 사오셨고, 미군 큰 타월을 가져오셨는데 역시 동생이 베개로 애기 없는 놀이를 하는데 보자기로 가져오신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또 한 번 가슴으로 통곡하셨을 것이다. 나는 우리 가족과 내가 겪은 고초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이런 역사에 대한 기록이나 반성이 없고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은 채 70년을 지나온 것에 대하여 피가 끓는 분노를 느낀다. 아버지가 보국대에 가신 것을 잡혀갔다거나 끌려갔다거나 붙들려갔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이는 정말 무작위로 붙들려간 것이다. 당시 동네로 배당이 오면 이장은 아무라도 만만하고 자기에게 밉보인 사람을 찍고, 면서기와 동행해서 집결지로 보내면 끝인 것이었기 매문이다. 우리 동네에서 보국대에 끌려간 사람은 가장 가난하고 힘이 없었던 김정원씨 형제 그리고 우리 아버지로 기억하고 있다. 나이의 기준은 사십대 이전, 건강한 남자였다. 다른 기준은 아무 것도 없었다. 무슨 근거로 어떤 법에 의해서 어렵게 살아가는 일곱 식구의 가장을 끌어다가 반년이 넘게 보수도 없고 대가도 없이 힘든 일을 시키며 부려 먹었는가? 나는 그동안 정신대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한국전쟁 이후의 보국대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고, 정부나 정치권에서 이 사안을 말하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다행히도 미8군소속(정확한 부대인지는 아버님께 들은 것이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음)의 식당에서 일을 하셨다고 한다. 아버님이 보국대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셨을 때, 미군이 사용하는 커다란 샤워 수건과 아이디알 비누를 가져오셨으니 미군부대에 근무하신 것만은 분명하다. 아버지가 식당으로 배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신체검사가 있기 전 아버지는 손톱을 깎고 몸 매무새도 단정히 한 것 때문일 것이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객지생활을 많이 하셔서 그런 일에는 다른 사람보다 판단력이 뛰어나신다. 아버지는 자신이 식당일을 하는 쪽으로 배정을 받았기 때문에 고생을 별로 많이 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식당일을 하신 아버지가 다른 사람보다 고생을 하지 않았다는 말씀은 다른 노역을 한 사람들은 꽤나 많은 고생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몸이 힘든 것이야 어려서부터 익힌 것이니 오히려 편했을 수도 있지만, 가족을 생각하며 괴로워했을 아버지의 마음은 오죽했겠는가? 가장인 민간인을 끌어다가 그 고생을 시키며 빈민의 삶을 망가뜨리고서 아무런 보수도 보상도 없었다는 것은 선진 미국이나 자유대한에서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면 당시 아버지와 함께 끌려온 사람의 수효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버님과 같이 한 사람들만도 그 수효가 상당하였다면 그 전후 이렇게 끌려와서 부역한 모든 사람을 합치면 아마도 많은 수효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버님이 세상을 뜨신 지도 40여년이 다 되어 간다. 나는 아버님이 보국대로 끌려가셨던 그 억울함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힘이 없고 배경이 없고, 돈이 없어서 끌려갔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장, 면서기도 권력자라고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해야 했다. 이유도 물을 수 없었으니 따지는 일은 오히려 불이익만 돌아온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여섯 달 어머니에게는 6년 아니 60년과 맞먹는 세월이었을 것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내게만은 당신 겪었던 고초와 설움을 자주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동안 겪었던 고초를 잘 알고 있다. 특히 억울하게 보국대에 끌려가셨던 이야기를 할 때면, 특히 군대에 간 아들들을 생각하며 빠짐없이 면회를 다녀오실 때면 비록 민간인이고, 근무한 부대가 미군부대이긴 하지만 군대생활의 고초를 어느 정도는 알고 계셨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느 곳에 가서 보국대 얘기를 하며, 누구에게 이를 말하고, 그 때 보국대의 진실과 진상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인가 막막하기만 하다. 이제는 정말 보국대를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남아 있지 않으니 우리의 역사에 휴전 이후 보국대에 관한 기록이 역사에라도 남기를 간절히 바란다. / 글 조경삼 목사(개혁총회 증경총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