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연합 바른신앙수호위원회는 류광수 목사가 사탄결박권을 주장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이단이라는 것이다. 류광수 목사가 주장한다는 사탄결박권의 실체는 무엇인가?
류광수 목사는 어떤 의미로 사탄결박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가?
과연 사탄결박권은 성경에 반하는 사상인가? 그리고 사탄결박권을 주장하면 이단인가?
사탄결박권, 그 용어에 담겨진 문제는 과연 무엇인가?
1.사탄결박권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이단규정의 잣대가 될 수 없다.
사탄 결박권을 류목사는 사탄 추방권, 사탄 퇴치권, 사탄 제어권의 의미로 사용하였다고 말한다.
비판하는 분들이 주장하는대로 사단을 결박하는 권세는 전적으로 예수님께 있다.
예수님은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12:29)고 하셨는데 전후문맥상 이는 사단과 귀신에 관한 언급이 분명하다.
이상근 박사는 그의 <마태복음 주해>에서 여기 강한 자는 사탄, 집의 세간은 고통을 받는 사람, 강한 자를 결박한 더 강한 자는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귀신을 쫒아내신 것은 사탄을 힘입은 것이 아니라 사탄을 결박하고 그에게 괴롬 받은 자를 구원하신 것이요, 그리스도는 이미 사탄을 이기신 것이라고 주해하였다.
그리스도는 사탄을 결박하신 것이다. 그것을 바울은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혹 폐하여 = 결박하여)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2:15)고 했고, 복음의 원형인 창세기 3장 15절에서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리라.”고 하였다.
분명히 사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으로 인하여 결박을 당한 것이다.
존·번연은 그의 역작 <천로역정>에서 기독도가 장망성을 떠나 천국의 순례길을 갈 때에 수많은 고초와 연단을 겪는 가운데 앞서간 사람들의 얼굴이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되돌아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유약이와 겁쟁이였다. “왜 그냥 돌아오는 거요?” 하고 기독도가 묻자 “가지 마시오. 가지 마시오. 가다보면 공포의 문이 나오는데 그 문 옆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오. 우릴 잡아먹으려고 포효를 하는데 혼쭐이 나서 도망쳐 나오는 길이라오.”한다. 이 때 전도자가 나타나 기독도를 향해 “염려하지 말고 들어가시오. 그 사자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발들이 쇠사슬에 묶여 있을 것이요. 그들은 겁을 주기는 하지만 묶여 있기 때문에 길 한 가운데로 들어가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요.”한다. 과연 기독도는 믿음을 가지고 길 중앙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담대히 정로로 나아가 그 문을 무사히 통과한다. 두 마리의 사자는 포효를 하고 겁을 주지만 그 두 다리는 이미 쇠사슬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단의 실체와 실상에 대한 메타포다.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의 사건 이후 분명히 결박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그 권세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겁에 질린 유약이와 겁쟁이처럼, 두려워하는 소심한 신자들이 있다.
류광수 목사는 그리스도에 의해 사단이 이미 결박되었음을 강조한다.
예수 십자가의 권세가 죄와 사망, 사단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신 사실을 밝히 드러낸다. 사탄 결박권이란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권세다. 우리는 그 권세를 누려야 한다. 그 권세를 누리라고 말하는 것이 성도에게 주어진 사탄 결박권의 실체요, 류광수 목사는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사탄결박을 믿음으로 확인하고 누릴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이가 비평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고유한 사역을 침범한 것도 아니요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체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세로서 우리가 누려야 할 권세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결박권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을 이단으로 모는 것은 그 용어의 진정한 의미를 잘못이해했든지 아니면 성경신학적인 이해가 부족한 이들의 주장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류광수 목사가 사탄결박권을 주장하였으므로 그가 이단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한 결 같이 그 주장이 김기동 씨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사탄을 결박하고 사탄을 축출하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 사상이다.
김기동 씨에 대한 한국교회의 이단규정은 성경과 악령론에 대한 총체적인 견해가 성경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악령론에 대한 김기동 씨의 주장은 성경을 벗어난 경우도 있고 그 의미가 모호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류광수 목사는 성경에 근거한 귀신의 실체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권세와 능력을 강조한 것이지 특정인의 사상을 수용한 것이 아니다. 성경이 이단시비의 핵심근거가 되어야지 특정인의 사상이 이단판단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탄결박권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권세로서 우리는 그것을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2.류광수 목사의 신학에 대한 고려 총회의 비판과 이에 대한 나용화 박사의 평가
이제 여기서는 고려 총회가 주장한 내용에 대하여 나용화 박사가 변증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나용화총장은 본 교단 신학위원장으로서 류광수 목사의 천사결박권 문제에 대한 고려총회의 비판에 대하여 <전도총회 류광수 목사에 대한 이단성 심의 보고 및 신학적 문제 에 대한 평가> 보고서에서 이를 심도 있게 변증하였다.
1)고려총회신학부는 류광수 목사가 사탄에게서의 해방을 구원으로 주장한다고 말한다.
“사람을 살리는 길이 있다. 살려줘야 되고 사탄에게서 풀어줘야 되는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는 예수를 영접해야 한다. 사탄의 권세,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지금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날마다 해방 받아야 한다”(서울 전도신학원 강의).
“그리스도 메시지만 계속 말하면... 사탄이 꺾이고 하늘의 군대(천사)들이 동원되고 그렇습니다”(아비멜렉이 본 여호와).
2)류 목사의 주장에 대한 고려 총회 신학부의 판단:
류 목사의 구원관은 인간의 죄와 불행의 원인을 철저히 사탄과 연관 짓고 있다. 류 목사에 의하면, 죄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요, 그 원인 제공자가 사탄이므로 사탄에게서 해방되는 것,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것이 구원이다. 사탄의 문제만 해결되면 구원을 얻는다고 보는 류 목사의 구원관은 종말론적인 미래적 구원보다는 현세적 능력과 은사 체험을 강조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개혁주의와 거리가 멀다.
개혁주의 구원관에 의하면, 주님을 영접할 때 사탄이 쫓겨 나가는 것이지, 사탄을 쫓아내므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어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동참하여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구원을 사탄에게서 해방 되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 같은 개혁주의 구원에 비추어 볼 때 류 목사의 구원론은 개혁주의가 아니다.
3)고려 총회 신학부의 판단에 대한 나용화 박사의 평가:
류 목사의 「복음편지: 현장 메시지 1」(도서출판 예수생명, 1993년)과 「복음편지」(도서출판 생명, 2002년)에 나타나 있는 그의 구원론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구원은 단순히 예수를 믿고(입으로 고백하고) 모든 일이 형통하게 잘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p.16).
“하나님께서는 죽음에서 건져내신 당신의 백성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빌 1:6) 친히 완성시켜 나가십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p.17).
“구원은 흑암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내신 주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세계까지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p.18-20).
“구원 받는데는 우리의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구원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의 능력으로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는 순간, 흑암과 지옥, 운명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 받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영혼이 해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법적으로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죄에 매여 종노릇할 이유가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p.48-49).
구원은 첫째, 죄인된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와 더불어 사는 것이다. 둘째, 구원은 생명이다. 하나님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다. 셋째, 구원은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의 해방이다. 넷째, 구원은 율법의 저주에서의 해방이다.(p.121-123).
구원 받은 자의 특권은 첫째,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 둘째, 복음전파의 특권, 셋째, 예수님의 권능으로 사탄의 권세를 결박하고 이길 특권(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권세를 완전히 꺾으셨고, 신자들에게 모든 흑암의 세력 곧 악한 영들을 이길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 넷째, 기도 응답의 특권, 다섯째,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특권, 여섯째,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어 우리가 도움을 얻게 하는 특권, 일곱째, 천국시민권 등이다(p.121-125, 206-207).
이상에서 살펴본 류 목사의 구원관을 고려 총회 신학부의 개혁주의 구원관과 비교해 보면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고려 총회 신학부의 구원관이 류 목사를 판단하는 것에 국한된 까닭이겠지만, 성경적으로나 개혁주의적으로 빈약하다.
류 목사의 구원관에 대한 고려 총회 신학부의 판단을 살펴보면, 류 목사가 인간의 죄와 불행의 원인을 사탄에게 전적으로 돌리고 연관 짓는 것을 문제 삼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사탄 마귀가 모든 사악과 불의의 창시자로서(「기독교 강요」Ⅰ. xiv. 15) 아담을 미혹하여 타락케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떠나게 함으로 인류 전체가 저주를 받아 불행과 비참에 빠지게 되었다고 말했다(「기독교 강요」Ⅱ. i. 1). 칼빈의 주장대로, 죄는 사탄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는 것이요, 그로 말미암아 인류가 모든 불행과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여 전투해야 하는 것이다(「기독교 강요」Ⅰ. xiv. 14). 칼빈의 신학을 반영하고 있는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은 제 1문답과 2문답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 가운데서 복되게 살기 위해서는 첫째로, 우리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 둘째로, 우리의 모든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셋째로, 그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하고, 우리가 누리는 유일한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값을 다 치루셨고 우리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 구해낸 것이다 라고 진술해 놓았다. 또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도 우리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간계와 시험에 유혹을 받아 범죄하였고,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었으며, 영적 육체적 그리고 영원한 모든 불행들을 당하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제 6장 1항, 2항, 6항).
이 같은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의 가르침들에 비추어 보면, 류 목사가 인간의 죄와 비참함과 불행을 우선적으로 거론하고(참고, 「복음편지」의 첫마디, “왜 인간에게는 행복이 없는가?”), 그 원인을 사탄 마귀와 연결지은 것은 개혁주의 신학과 완전히 일치한다.
고려 총회 신학부는 류 목사의 사탄 결박권과 관련하여 주님을 믿어 영접할 때 사탄이 쫓겨 나감으로 사탄 마귀를 구태여 쫓아내려고 마귀와 대적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주장했다. 그러나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밝히 말한 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깨어서 마귀를 대적하여 전투해야 하는 것이다.
구원과 관련하여 성경도 마귀와의 싸움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