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법 교수(총신대 명예교수)
코로나 바이러스(Corona Virus 19, 이하 ‘코비’)가 발발한 지(2019.12.12.) 벌써 1년 반 가량이 흘렀다. 그 동안 코비는 대유행[전염]병(pandemic)이 되어 온 지구촌에 확산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사람들의 일상을 빼앗아갔다.
백신을 맞고 있는 상황에서도 각종 변이가 나타나면서 여전히 보건체계(방역과 백신수급)가 불안하고 확산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 다소 풀려가지만 아직도 여전히 – 국가적 봉쇄와 함께 이동제한령까지 계속되고 있다. 코비로 인한 사회적 활동들은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와 ‘비-대면’(un-tact)과 ‘마스크 쓰기’,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경제적-문화적 활동들이 ‘금지 혹은 폐쇄와 감금’(rock-down)으로 인해 정상적(?)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거의 모든 학교나 모임은 중단(폐쇄?)되어 비-대면으로 강의나 모임이 진행되고, 경제활동이나 문화 활동, 여행 등도 유보되거나 중단(금지)되어 일상의 삶은 격리나 감금, 더 나아가 (잠정적) 폐쇄의 수준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들로 인해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사회적 상실감과 외로움과 소외감으로 슬픔과 근심과 불안과 염려에 빠지고 심지어는 짜증과 분노의 감정이 잦아 ‘코로나 불루’(Corona Blue)를 넘어 ‘코로나 레드’(Corona Red)라는 병적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특별히 교회는 신앙생활의 근간으로 여겼던 대면과 모임을 상실하면서 예배나 성경공부, 기도회와 구역모임 등을 하지 못함으로 신앙의 위기를 당하였고 심지어 한국에서는 일부 교회들이 방역수칙을 준수하지 않고 예배(모임)를 강행함으로써 다수의 확진자들이 발생하여 ‘코로나 전파자’로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처럼 교회(신자들)는 생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러한 삶의 변화 앞에 신앙적 위기를 직면하게 되었다. 그 동안 우리가 알거나 믿고 있었던 “모든 견고한 것들이 코비 앞에 무너지고/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최해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몇 가지 질문들, ‘코비가 무엇인가’(what), ‘왜 일어났는가?’(why), 그리고 ‘어떻게 이러한 코비의 위기에 대처해야하는가?’(how)라는 질문들은 의학적 또는 생태적 질문들이기도 하지만 또한 신앙적이면서도 신학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코비는 무엇이며 우리의 신앙(삶)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가?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대책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교단(신학교)과 신학자들의 발 빠른 움직임 가운데 코비에 대한 대응책들을 논의해 왔다. 외국학자들(J.Piper; T. Wright; W. Brueggemann)의 책들이 번역되고 각종 세미나와 포럼이 진행되며 여러 책들이 출간되거나 사이트가 운영되고 있다. 위의 질문들(what/why/how)에 대한 신학자들의 답변들로서 지금까지 제안되어 온 것들을 정리하자면, ‘질병(전염병)과 재난(팬데믹) 혹은 재앙’으로서의 코비를 만난 교회는 코비가 단순한 ‘자연적인/생태적인 재해’라기보다는 ‘언약의 시행방식’(transactional mode of covenant[Brueggemann 2020:22])에 비추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로 우리의 죄와 탐욕에 대하여 회개해야 할뿐 아니라, 두려움과 슬픔과 상실감과 외로움과 불확실성(불안)과 좌절과 분노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며 위로해야 하고 또한 그들을 복음으로 전도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사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코비의 상황에 비추어서 우리 모두는 이 위기를 생태적인 면과 함께 교회적(공동체적)인 면과 개인적인 면에서 신앙적인/도덕적인 ‘자기 성찰의 시간’(김영한 2020:37)으로 삼아야 한다. 확실히 코비의 위기는 신앙(복음전파)의 기회이기도 하다(빌 1:12 참조, “내가 당한 일이 복음(전파)의 진보(진전)가 된 줄을 알거니와”).
오늘 우리가 모여 논의하는 코비 혹은 코비 이후의 교회의 역할과 대응들은 방역적인 대비와 함께 역사적-신학적 이해(유럽의 흑사병 혹은 스페인의 독감과 초기 한국기독교의 전염병에 대한 교회의 대처)를 수반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그 답변(대응책)을 추구해야 한다. 이는 우리의 예배와 신앙과 삶의 기준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 발제자는 보다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교회의 역할과 책임을 살펴보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성경신학적인 관점에서의 제안은 우리의 예배와 신앙과 삶의 규범인 정경(Canon)으로서의 성경을 통하여 이해함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므로 발제자는 성경 신학의 기초가 되는 정경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이해를 먼저 서술할 것이다. 우리에게 성경은 신앙과 삶의 견고한 기반(반석)이기 때문이다(소요리문답 제2문).
1. 예배와 신앙과 삶의 기준(Canon)로서의 성경
우리(교회)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모든 견고한 것들이 무너져 보이는 현재의 팬데믹 상황에서 그 동안 과연 ‘우리가 믿고 의지한(의지해왔던) 견고한 것’이란 무엇이었는가?
우리의 일상이 무너져 내리고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며 실망과 근심과 상실감과 외로움과 불안(불확실성)이 찾아오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이러한 코비의 상황과 위기 속에 하나님도 없는 것 같고, 신앙도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예배는 동력을 잃고 기도는 메말라 가며 찬양은 식어져 가고 있으며 – 특히 언택트 상황에서 – 봉사와 선교도 위축되고 있다. 과연 그 동안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삶)의 견고한 토대는 무엇인가?
이러한 재난의 위기상황에서 무엇이, 어떤 견고한 터(반석)가 우리의 삶(신앙)을 지탱하고 세워주고 있는가? 파이퍼(J. Piper)는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터 혹은 반석(rock)이 코비에 처한 우리의 ‘현재적 희망’(present hope)이라고 말한다.
브루그만(Brueggemann) 역시도 “[지금]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가라(back to basics)는 압력을 받고 있다!”라고 서술한다(2020:126[57]). 그러므로 우리는 코비의 위기 상황에서 먼저 이 터 혹은 반석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다시 한 번 그 터(반석) 위에 우리의 신앙과 삶이 세워져 있는지를 반추하면서 그 터(반석) 위에 우리의 신앙과 삶을 굳게 세워야 한다.
우리에게 이 견고한 터를 전해준 종교개혁자들(중세)과 독일 경건주의자들(30년 전쟁), 그리고 청교도들은 중세의 위기와 더불어 세속화의 위기 속에서도 한 결 같이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성경으로 돌아가야 된다.’(Back to the Bible)라고 역설한다. 이것이 어찌 이들 만의 외침인가? 주님의 제자들 역시도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어려움에 직면하여 주님을 떠날 때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요 6:68)라고 하였고, 예수님 역시도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라고 하였으며, 누가 역시도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성경을 풀어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실망과 좌절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이 시점에서 우리가 잡아야 할, 딛고 서야 할, 아니 세우고 외쳐야 할 가장 견고한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성경을 파편화시킨 역사비평의 위기 속에 세워진 성경 신학은 성경의 터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성경으로 돌아간 운동의 일환이기 때문에 정경적인 해석의 한 모습으로 이해된다(심상법 2017:160-161).18) 사변적 교리신학으로부터, 파괴적 비평신학으로부터 성경 신학은 바로 이 견고한 터를 회복하고 이 터 위에 세워지기를 갈망한다. 진정한 교리학도, 건강한 비평학도 바로 성경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한다. 참된 교리학은 이처럼 성경으로 돌아가는 교리학일 때만 가능하다.
1)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ible, Again)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사 1:2)로 시작하면서,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와 같은 반복된 표현들로 묘사된 ‘하나님(여호와)의 말씀’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큰 재앙으로 여겼던 바벨론 포로생활(이방 땅에 나그네로서 디아스포라의 삶)의 위기시대를 만난 백성들에게 선지자 이사야가 전한 위로였을 뿐 아니라 죄와 탐심에 대한 회개의 촉구와 더불어 회복의 소망에 대한 제시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생이든 국가든 그들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설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거기에 순종할 것을 촉구한다.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사 1:10; 사 66:6).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8; 벧전 1:24-25 참조).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사 55:11, “내 입에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시편 기자 역시도 인생의 위기(어두움)의 순간에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다”고 노래한다. 복 있는 사람은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다(시 1편 2절). 특히 시편 1편, 19편, 그리고 119편은 토라 시편의 절정을 이루며 유대 경건의 속살을 잘 드러내고 있다(시 1:2; 19:7; 119:1). 이처럼 토라의 묵상과 토라의 실천(행함)이 유대인의 경건(삶)의 기초였으며 축복의 토대였다. 이점은 신명기에서도 잘 나타난다. 신명기는 하나님께서 광야(시험)를 지나 약속(축복)의 땅에 들어가는 그 백성에게 모세를 통해 두 번째 주신 명령이었다. 환란과 시험과 배교의 광야 길에서 다시 약속(축복)의 땅으로 들어가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신 30:10-20). 신명기의 축복(28장, 30장)은 바로 이 말씀(토라)의 토대(반석) 위에 세워졌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축복의 길로 나아갔고(창 12:1-2), 이 약속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이 길을 걸어가며 우리에게 이 복의 모범(복의 통로)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되었고 이 말씀은 생사화복과 역사를 좌우하는 것으로 회복(재창조=구원)의 토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와 구원(재창조)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어두운 세상(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걸어가야 할 축복의 길이다. 환란과 낙심과 배교의 상황에서도 우리가 붙들/일어설 확실한 반석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밷전 1:23-2:3).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과 삶을 쇄신시키며(시 19:7; 히 4:12) 우리를 참된 안전과 평화와 축복의 길로 인도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누구든지 나와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운[주추를 반석위에 놓은] 지혜로운 사람”(마 7:24[25])임이 분명하다. 우리 모두는 코비의 어두운/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종교개혁자들처럼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치며 그 길로 나아간다. 그리고 코비의 상황에서나 그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 모두는 이렇게 찬양한다. “굳게 서리 영원하신 말씀 위에 굳게 서리 굳게 서리 그 말씀 위에 굳게 서리라”(찬 399장).
2.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경이 말하는 이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월키(Bruce K. Waltke)와 휴스톤(James M. Huston)의 진술(2010:136)처럼, “성경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경을 성취하시고 성경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로고스(‘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즐거워할 것이다.” 성경은 이 예수에 집중한다. 구약은 이 예수를 바라보고 신약은 이 예수를 소개한다. 그리고 종말(기간)에 처한, 종말(끝)을 기다리는 우리는 이 예수를 고대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복음서 기자들은 한 결 같이 ‘이 예수가 누구신지’를 소개하며 그의 오심과 사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우리가 믿고 전하고 배우고 가르치고 지켜야 할 복음이라고 말한다(막 1:1; 마 28:16-20; 눅 1:1-4). 사도행전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케리그마(복음)가 세상의 희망(구원)임을 담대히 선포한다. 특히 부활 신앙은 모든 고난(재난)과 죽음을 이기는 신앙으로서 슬픔과 불안과 절망에서 다시 우리를 회복시켜 우리 모두를 ‘춤추게 하는 신앙’(Brueggemann 2020:30)이다.
바울은 세속화되어가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이 터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천명하였고(고전 10:4), 히브리서 기자 역시도 환란과 핍박의 상황가운데 배교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시험 당한 청중을 행하여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우리의 큰 대제사장,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신 “우리의 믿는 도리를 굳게/지속적으로 잡으라.”(히 4:14)고 권면할 뿐 아니라 “믿음의 주여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지속적으로 바라보자”(히 12:2)라고 권면하였다. 이 반석으로부터 멀어지거나 떠나게 되면 우리는 세속에 흘러 떠내려갈 뿐 아니라 환란(재난)으로 인한 배교의 침륜에 빠지게 된다(히브리서의 상황). 확실히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처럼, 구원의 근원이시며 환란에 처한 우리 모두의 위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코비상황]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히13:8) 분이시다. 이 예수를 깊이 묵상할 때 우리 모두는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다양한 형태로] 모이기”에 힘쓰는 공동체(히 10:23-25)가 될(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톰 라이트(2020:19-20)는 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 1:2)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가장 위대한 최후의 예언자”(Jesus as the last and greatest of the prophets)로 말하면서 이 말씀이 “성경을 우리 시대의 거대한 충격적인 사건들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 지에 대한 수많은 가정과 주장 배후에 있는 질문에 치명적인 답을 제공한다.”고 진술한다. 이어 그는 예수님이 빠진 해석 혹은 추론은 다음과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고 말하면서 코비의 재난에 우리는 ‘마지막 표적’(ultimate sign)이신 예수님을 상고하자고 권면한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상황[재난]의 중심에 두고 거기서부터 밖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는 채 주변 세상을 보고 하나님과 그분의 하시는 일에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순간,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 꽤나 ‘영적’이고 놀라운 영감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 실제로는 예수님을 그 상황에서 차단하는 ‘해석’을 강요하는 심각한 위험에 빠진다. 옛말에도 있듯이, 모든 것이 주님이 아니라면, 그분은 주님이 아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도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아 고향을 떠나 나그네로 흩어져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산 소망이 되시는 예수가 우리의 보배로운 산돌이며 모퉁잇돌로서, 우리 모두는 그 돌(산돌)에 기초하여 세워질 ‘신령한 집’(οἶκος πνευματικὸς)으로 살 것을 촉구한다(벧전 2:4-9). 확실히 교회는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집’임이 분명하다. 환란이나 역병이나 재난이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를 대적하는 불신 세상에서 나그네들로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인생의 재난(환란)을 만났을 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요 14:6)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이 반석 위에 굳건히 서야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예배와 신앙과 삶의 견고한 반석이다. 환란과 핍박에서, 재난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세속화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길은 바로 이 예수께로 돌아가 이 예수를 깊이 묵상하고, 이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 때 가능하다. 다시 반석이신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 예수 미드미, 예수 배우미, 예수 따르미, 예수 달므미가 되자. 이것이 사도들과 종교개혁자들(Solus Christus)과 청교도들이 외친 복음이다.
코비의 상황에서나 후기-코비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반석이신 이 예수를 묵상하고 이 예수를 전하고 이 예수를 배우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됨을 고백할 때 우리는 코비의 상황에서도 다음과 같은 찬양을 확신가운데 부를 것이다. “이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1절); 검은 구름 덮이고 광풍 일어도(2절); 괴로운 일 당해도 낙심 말아라(3절) …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찬 394장).
결과적으로 변함없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살아가는 신자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시며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며 온전케 하시는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행하시고 가르치신 일)를 지속적으로 묵상하고 바라볼 때 ‘현재적 소망’가운데 있게 되며 또한 코비의 역경(위기)속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가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십자가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고(요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죽음과 심판에 처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거짓(뻥?)이 아님을 입증하셨다(벵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우리는 서로 사랑할 뿐 아니라 적대적 세상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4:9-11). 그러므로 코비의 상황에서 우리의 반석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를 성경을 통해 지속적으로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죽음의 두려움과 관계의 상실감과 소외감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근심과 걱정과 불안과 분노에서 참된/견고한 소망과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 더 나아가 실망과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을 뿐 아니라 주변 세상(이웃)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는 세상 사람들(이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위로하고 돌볼 수 있다. 코비의 위기 상황에 세상 사람들은 믿음과 소망의 반석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와 불확실성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이 비록 우리를 비방한다 할지라도 그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요 3:16)이라는 사실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의 능력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위기가 지연되고 나이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과연 우리가 지치지 않는 힘의 근원을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성경은 한 마디로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이 일을 이루신다고 말씀한다.
3. 성령의 역사하심과 능력가운데
위기를 극복하고 능력 있는 삶의 비결은 한 결 같이 성경은 성령의 강림으로 인한 능력의 부여로 이루어 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존슨(D. E. Johnson)의 진술(1997:1)처럼, “우리의 열심이 시들고 우리의 중심이 희미할 때... 우리는 성령의 말씀 안에서 성령의 행하심을 서술하고 있는 누가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한다.” 주님의 승천을 앞두고 승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는 제자들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이기를 바라며 그 시기를 물을 때(“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주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염려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코로나의 회복?)의 시기(when)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강림하심이며 성령께서 오셔야만 그들이 권능을 받아 능력 있는 증인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승천하실 주님은 제자들(우리들)을 이 세상 가운데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요 14:16-18,26-28)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시고 능력으로 충만케 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지상명령인 증인의 삶을 살도록 하신다(눅 24:46-49). 주님이 떠나실 공백을 성령님께서 오셔서 그 공백을 메우시고 주님보다 더 능력 있게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도우신다(요 14:12). 성령강림 이후 세상이 그들을 핍박하고 그들을 비방해도 성령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에게 복음전파의 담대함(행 2:14-4:31)과 기쁨과 섬김(사랑)의 힘을 주셨다(행 10:38 참조).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가운데 그들의 기도를 도우시고 그들을 지혜롭게 하시며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낙심과 근심에서 평강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미하고 주변 온 백성으로부터 칭송함을 받았다(행 2:46-47). 비록 주변세상으로부터 핍박과 조롱을 당하였지만 그들은 약속하신 성령을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기도의 열정을 찾았고, 찬양이 회복되고 능력 있는 증인의 삶을 살았다(행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의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코비 상황에서 집에 갇혀서 두려움과 소외감과 외로움과 상실감, 낙심과 근심이 우리를 찾아 올 때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담대함과 기쁨을 회복하며 기도와 찬양이 살아나고 예배가 회복되고 능력 있는 증인으로서의 삶과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보혜사 성령으로 충만할 때만 가능하다(요 19:19-23 참조).21)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간절히 찬양한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찬 183장).” 이것이 절망과 낙심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한 선지자 이사야가 꿈꾼 새로운 세상(회복의 세상)의 모습이기도 하다(사 32:12-17; 44:3-4).22) 이사야는 종말론적인 성령의 도래가 새 세상(New Normal?)을 이루는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형성되고 교회가 어떻게 주님이 주신 지상명령(복음전파의 사명/’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는 오직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성령의 역사하심(능력)으로만 가능하다(행 1:8)는 것이 사도행전이 보여준 답변이기도 하다. 코비를 만나 위축된 한국교회의 문제의 해결 역시도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며 코비 이후 우리가 가져야 할 ‘새로운 일상’(New Normal) 역시도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임이 분명하다.
확실히 현재적 코비의 상황과 코비 이후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의 상황은 오직 ‘또 다른 보혜사’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거룩케 하시는 진리의 영, 위로의 영, 증거의 영, 거룩하신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담대함과 안전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살게 된다. 더 나아가 보혜사 성령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 아래에서 우리 역시도 지금 겪고 있는 코비의 상황에 대하여 빌 바를 알지 못한 채 신음/탄식(groan) 속에서 깊이/간절히 기도하게 되고(롬 8:26-27)23), 이러한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목적대로 부르심을 받은/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코비의 위기 상황을 넉넉히 이겨나가게 된다(사 40:27-31; 행 4:31; 빌 4:6-7; 롬 8:28-39).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성령님의 역사하심(능력)과 성령님의 탄식하심이 우리의 재난의 절박한 상황에서 역설적인 모습으로 함께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는 낙관적이면서도 현재에 대해서는 탄식(신음)하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은 보다 실제적이고도 진솔한 소망이 되며 이로 인하여 우리는 공동체 내에서 서로 깊은 공감 –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롬 12:15) - 속에 보다 진정성 있는 위로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4. 질서와 안전을 위한 방역수칙의 준수와 사랑과 선행의 실천
코비의 1-2차 감염과정에서 한국교회가 ‘수퍼-전파자’라는 비방을 받고 욕을 먹기도 하였다. 기독교 신앙생활의 중심인 예배와 모임이 금지되거나 폐쇄되었을 때 교회는 다소 우왕좌왕하여 예배와 모임을 강행함으로써 공중보건과 방역수칙을 무시하는 매우 이기적인 집단으로 매도되면서 불신사회로부터 엄청난(?) 비방과 욕을 얻어먹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과연 교회는 어떤 성경적 지침과 교훈에서 행동해야 하는가?
예배는 한국교회가 일제의 탄압과 공산주의의 위협 속에서도 지켜온 우리의 신앙적 전통이 아니었던가? 이 일에 교회가 물러선다면 이것은 선조들이 순교로 지켜온 신앙을 저버리는 행위이고 배교의 행위와 다름없다고 생각하였다. 일제의 탄압과 공산주의의 위협(6.25)에서도 신앙을 지켜온 한국교회였지만 코비와 같은 팬데믹의 위기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함으로써 이러한 신앙적 위기에 어떻게 대처해야할 지를 잘 몰라 우왕좌왕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대해 ‘비대면 예배’의 적법성(한시성?)이 논의되거나 유럽교회의 전염병(역병) 상황에서의 교회의 모습(역할)을 역사적으로 조명함으로써 그 길을 찾고자하였다. 여기서 발제자는 이러한 위기적 대응을 베드로전서를 통해 보다 성경적 전망을 얻고자한다.
신앙적 박해로 인하여 고향을 떠나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신자들(나그네들/거류민들)은 주변의 불신세상으로부터 자신들이 “불법을 행하고 악행을 한다.”거나 때론 자기들처럼 “세상가치를 따라 살지 않는다.”고 비방(욕과 모욕)과 박해와 배척을 받게 되었다(벧전 2:12, 20; 3:9, 16; 4:4, 14-15).그들은 외적(적대적 세상) 박해 혹은 비방(욕과 모욕)으로 인해 내적 긴장과 혼란이 야기됨으로써 정체성(공동체)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24) 여기에 베드로 사도는 교회가 비록 적대 세상 가운데 나그네들(거류민들?)로 비방(욕과 모욕)과 배척을 당하면서 살지만 불신 세상에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참된 소망(1:3-12)과 독특한 신분(2:1-10)이 무엇 인지를 다시 한 번 재확인해 보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라고 권면한다(3:15 참조).
이러한 신앙적 위기(‘불 시험’[4:12])의 상황에 처한 그들에게 베드로는 교회는 악행을 행하는 집단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령한 집’(2:5)25)으로서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2:9)으로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살아가야 함을 설파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불법을 행하는 악행 하는 집단이 아니라 세상의 법을 준수하고 인간의 모든 제도와 세상 권위에 순종할 것을 촉구하면서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비방)에 대해 변호할 것을 권면한다(벧전 2:13-15). 또한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공경과 사랑과 존중의 미덕을 실천하라고 말한다(16-17절). 더욱이 불신 세상의 적대적 상황에서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받고 참을 것을 언급하면서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습(본)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로 그 분이 보이신 발자취를 따라 살아야 한다고 권면한다(19-25절).
그리고 더 나아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벧전 3:8-9)고 권면한다.
적대적 세상 가운데 살고 있는 신자들을 항해 들려주는 베드로의 이러한 ‘새로운 일상’(New Normal)에 대한 권면을 기억한다면 코비의 위기 상황에서 비록 불신 세상으로부터 애매하게(?) 비방과 욕과 배척을 당한다 해도 우리 역시도 국가적 방역규칙을 적극적으로 준수함으로써 이웃의 생명과 안전과 평화(질서)에 기여할 뿐 아니라 특히 노약자들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약자들)을 위로하고 사랑으로 보살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나가면서 …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과 삶에서 배운 대로, ‘위기는 기회’임이 분명하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적 모든 경험이 하나님의 뜻 아래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롬 8:28), 복음전파의 진전을 이룰 줄(빌 1:12)을 확신한다.
중세의 암흑기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종교개혁자들은 근본으로 돌아갔다(Back to the Basics). 그들의 근본과 반석은 성경이었고 그 내용은 모두 5 Solas를 통해 잘 제시되어졌다.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이었다. 이 슬로건들이 종교개혁자들의 예배와 신앙과 삶의 근본이었고 반석이었다. 지금의 코비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포스트-코비 시대를 말하지만 언제 끝이 날지 불확실하다. 끝날 것 같은, 끝나야만 하는 이 재난의 끝이 확실하게 보이질 않는다. 국가적 면역이 곧 도래 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지만 아직도 방역체계가 불안정하며 변이는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와 함께 소외감과 외로움 더 나아가 걱정과 기쁨의 상실로 인해 이유 없는 짜증과 화가 치밀어 오르고 일상 또한 정상적이지 못한 상황에서 뒤죽박죽이 된 삶을 경험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회복하고 아니 더 나아가 ‘새로운 일상’(New Normal)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도 우리의 신앙이 확실함 가운데 예배가 보다 뜨겁게 활성화 될 수 있으며 사랑의 봉사와 복음전파의 삶을 보다 잘 감당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다시 한 번 우리의 반석인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로 돌아가 탄식을 통한 기도(침묵적인 애도[哀悼]의 기도)와 성령의 역사하심과 충만함 가운데 은혜가 메마르지 않는 교회, 믿음과 사랑이 충만한 교회, 소망으로 가득한 교회가 되기를 간구한다. 말씀만이, 그리스도만이, 은혜만이, 믿음만이 우리를 코비의 ‘어두운 일상’에서 ‘회복된 밝은 새로운 일상(New Normal)’로 인도한다. 성령님(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