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한국 기독교 여성교육의 선구자 스크랜턴

이화학당 창립, 크리스천 여성 지도자의 산실 역할

2021-06-10 22:12:19  인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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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이화학당과 스크랜턴 선교사

지난달 531일은 이화학당(지금 이화여대) 창립 135주년이 되는 날 이었다. 135년을 거슬러 올라가 1886531일은 조선에 파송된 미국의 선교사 스크랜튼이 단 한명의 여학생과 수업을 시작하게 된 날이다. 그 한 명의 학생은 이름도 없이 김 여인이라고만 기록된 젊은 기혼여성으로서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관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여성이었는데 여전히 조선시대의 남녀차별적인 교육제도가 적용되고 서양인에 대한 조선인의 거부감과 배타심이 만연하던 때에 그토록 기다리던 한국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의 첫 학생이었다. 그날이 바로 1886531일이다. 531일은 현재에도 이화의 창립일로 영원히 기념되고 있다.


1884년 스크랜턴(Mary F. Scranton, 1832-1909)은 미 감리회 해외 여선교부의 한국 파견 첫 여선교사로 임명됐다. 스크랜턴은 52세라는 나이 때문에 한국행을 쉽게 결정짓지 못했다. 그러나 신앙심이 그를 움직였다. 스크랜튼은 의료 사업을 담당할 한국 파송 선교사로 임명된 그의 외아들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과 함께 한국으로 향했다.

1885620일 서울에 도착한 스크랜턴은 한 달 먼저 서울에 자리 잡은 아들의 집에 거하면서 선교사업 준비를 했다.

그러나 양인들을 불신하고, 서양을 두려워하던 한국인들은 파란 눈의 이방인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우리가 부녀자가 있는 집에 가까이 가기라도 하면 그녀들은 창문을 닫고 커튼 뒤로 숨어 버렸고 어린이들은 울부짖으며 달아났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서양인들이 한국 아이를 살찌워 피를 빨아 먹는다는 등의 괴 소문이 횡행하고 있었다.

1886년 서울 정동에 여학교를 세웠지만 학생은 모으기 쉽지 않았다. 한국에는 여자는 교육할 필요가 없다.”라는 인식이 확고했고, 여성들의 외출은 밤에만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콜레라까지 퍼졌다. 학교 건물이 완공되기 전인 5, 스크랜턴은 아들 집에서 첫 학생을 만

났다. “영어를 배워 황후의 통역관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관료의 소실(小室, )이었다. 그러나 첫 학생은 병으로 석 달 만에 학업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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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여의사 김점동

6, 두 번째 학생으로 꽃님이라는 열 살배기 소녀가 찾아왔다. 가난한 여인이 딸을 부양할 수 없어 맡긴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처음에는 좋은 음식과 옷을 주지만 나중엔 미국으로 데려갈 것이라며 겁을 주자 곧 여인은 아이를 도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꽃님이를 미국으로 데려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한 후에야 아이를 두 번째 입학생이자 이화학당 최초의 영구학생(permanent pupil)으로 삼을 수 있었다.

1886년 여름 서울에 만연한 콜레라로 서대문 근처에 버려진 별단이라는 아이를 아들 의사가 치료했다. 별단이는 두 번째 영구학생이 됐다. 네 번째로 이화학당을 찾은 학생은 훗날 조선 최초의 여의사가 된 박 에스터(김점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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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학생들이 늘어, 1887년에는 학생이 11명이 되었다. 18862월 고종 23년에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았다. 이는 국가로부터 교육기관으로 인정됐다는 의미다.

스크랜턴은 교육이념을 가부장적 굴레 속에 고통 받는 여성들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진정한 한국인으로 당당하게 서는 것을 제시했다. 이런 여성교육 목적은 파이크(L. G. Paik)의 저서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 in Korea’(1929)에서 볼 수 있다. “우리의 교육 목적은 한국소녀들이 우리 외국 사람의 생활이나 의복, 환경에 적응하도록 변화시키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오로지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 사람이 되게 하는 데 만족한다.”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있는 스크랜턴 비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턴 여사가 이화의 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

/출처 개혁신앙 28,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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