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이영호 교수의 나의 연극 인생 이야기 "

장로로서 대학교수로서 그는 오늘도 대학로에서 공연을 한다.

2012-08-31 03:12:55  인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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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해적선’의 공연 모습이다.(왼쪽 이영호 교수)

◆고교 2학년 때 연극을 처음 만났다.
전국 중·고등학교 연극 경연대회에 출품할 작품 오디션에 70여 명이 참가했다. 다섯 명을 선발하는데, 그 중 한 명으로 합격을 했다. 여름방학 동안 더위와 싸워가며 열심히 준비를 한 결과였다.
전국 20여 개 학교가 경연을 했고, 우리 학교가 당당히 대상을 거머쥐었다. 개인 연기상 부분에서는 네 명이 수상을 했으나 나머지 한 명은 상을 받지 못했다. 그 한 명이 바로 나였다. 서운했다.
고 3때 선생님께서 부르시곤, “이번에 네게 잘 맞는 역할이 있는데, 주인공이다. 이 역할은 개인 연기상은 이미 따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상 받으면 특기생으로 대학을 갈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나는 군인이 되려했고, 육군사관학교에 원서를 내 놓은 상태였다. 인생의 기로에 있으니 당연히 망설여졌다. ‘일주일만 시간을 주세요. 고민 좀 하겠습니다’
일주일 후 결정을 했다. - 어려서부터 축구, 씨름, 태권도, 탁구, 체조, 스케이팅, 스키 등과 미술, 음악, 글짓기 등 두루 예체능 방면에 재주가 있어서 종합 예술인 연극에 인생을 걸어도 되겠다 싶어서 -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극과에 진학을 했다. 학교생활이 너무너무 좋았다. 고등학교 때보다 더 열심히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졸업 후가 문제였다.
졸업 후 교수님을 따라 처음 연극을 한 곳이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에 소속되어 있는 극단 ‘가족’이었다. 한 작품을 끝낸 뒤 극단 측에서 제의가 왔다. 같이 일하자고. 월급으로 백만 원을 제시했다. 엄청난 액수였다. 또 원하면 어느 나라든지 유학을 보내주겠단다. 선뜻 응낙을 했고, 다음날로 출근을 했다. 그런데 머리도 식힐 겸 2박 3일 어디 좀 바람 쐬고 오란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 갔더니, 산속에 갇혀서 먹는 시간 제외하고는 강의만 계속 들었다. 이름 하여 ‘원리강론.’
그 이후 6박 7일 동안의 수련회(?), 두 차례에 걸쳐 원리강론을 듣고, 마지막 날 입회원서를 내민다. 불신자이면서도 선뜻 내키지 않았던 건, 돈 백만 원에 내 영혼을 판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날로 박차고 나와 대학로로 뛰어들었다.
막막했다. 한 극단에서 작품을 했는데, 두 달간 준비, 그리고 공연. 그러나 돌아온 건 자장면 한 그릇으로 만족해야 했다.
또 다시 다른 극단을 전전하다 호암 아트홀에서 연구 단원을 뽑는다는 소리가 들려 오디션에 응했다. 그래도 작품 당 소정의 출연료가 지급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일 년 연봉이 백 만 원도 되지 않았다. 매일 형수님께 교통비 타는 게 부담스러워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연습실 구석에서 커튼을 이불 삼아 잠을 청하고, 식사는 하루 한 끼로 만족했다. 그러다 제작자가 회식이라도 시켜주는 날이면 고기로만 배를 채웠다.
그러면서 월급 주는 극단을 알아봤다. 대한민국에 단 한 곳, 국립극단 뿐이었다. 5개년 계획을 세웠다. ‘5년 후에는 남산 물이라도 한 번 맛을 보리라!’
다행히도 국립극단 단원들과 함께 공연 할 기회가 몇 차례 생겼다. 그들을 세심히 관찰했다. ‘저들은 무엇이 다르기에 국립극단에 들어갔을까?’
결국 4년 뒤, 4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국립극단 연수단원으로 입단을 하게 되었다. 연수 단원 2년, 준 단원 2년, 결국 5년 만에 정단원이 되었다. 이 후 23년을 국립극단에 몸담고 있으면서 운영위원을 지내기도 하고, 공연으로 세계를 순회하기도 했다.
하루는, 어머니 생신 날 저녁식사를 마치고 봉투 하나를 드리고 돌아서는데, “엄마가 살면 얼마나 살겠어. 이제 교회 좀 나가지?” 그 순간, ‘그래, 죽은 사람 소원도 듣는다는데 산 사람 소원 못 듣겠나’ 싶어서 ‘언젠가 때가 오면’ 하고 돌아섰다. 그 전만 해도 “어머니, 나 종교 있어요. 연극이 내 종교예요. 불교의 대자대비나 기독교의 사랑이나 깨달은 만큼 베풀라는 거 아닌가요? 난 연극 대본을 통해서 인생의 질고를 깨닫고요. 그 깨달은 만큼 무대에서 공연을 통해 베푸는 거예요. 그게 그거 아닌가요?” 그 때마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 날 내 입에서 나온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아내가 물었다.
“언젠간 때가 오면이 언제 일 것 같아요?”
“그걸 당신이 어떻게 기억해?”
“그냥…….”
“글쎄, 왜?”
“위층 살던 분 생각나요? 그분이 어느 교회 집사님인데 말씀만 전하고 가는데 만날 때마다 너무 좋아서. 당신도 한 번 만나 볼래요?”
“오시라고 해 봐.” 시큰둥하게 대답을 했는데, 며칠 후 진짜로 오셨다.
그 날 나는 주일학교 때부터 궁금하던 것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예수가 그리스도!’
1차 합숙에서 돌아 온 나는 연극이 너무나 시시해졌다. 그 당시 ‘거북선아, 돌아라’라는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아이들 병정놀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 나 연극 그만 둘래. 배추장사를 하더라도 복음 전하는 일만 하고 싶어.” 아무 말도 않던 아내가 한참 후에야 “기도 좀 해보지?” 한마디 던졌다. 그리고 기도 중에 ‘땅 끝’과 ‘예루살렘’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쳤다. ‘아! 그래. 예루살렘, 나의 현장!’ 그리고는 더욱 열심히 연극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후부터 국립극단 단원들의 영적상태를 들여다 보게 되었다.
26명 중 이혼 8명, 자녀 자폐 3명, 가족 중 자살 2명, 귀신을 보고 대화까지 하는 사람, 극장 안에 귀신이 사는 곳을 알고 그 곳이 편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서 그들 스스로 말한다. “우리는 무당이다”라고. 이유도 모른 채 그렇게 그 고통들을 운명이라 믿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 곳에서 흑암을 꺾으며 기도하던 중, 단장님께 담대하게 건의를 해 매년, 매 공연마다 있던 고사를 중단시켰다. 그 뒤로 국립극단이 없어 질 때까지 10여 년 동안 단장과 예술 감독이 교체 될 때마다 고사 얘기가 나왔지만, 고사는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렵사리 복음을 전하고 영접한 사람이 두 명, 복음만 받은 사람이 세 명. 그토록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어려운 곳이었다. 돌이켜보면 아쉽기만 하다.
대학 강단에 있지만, 지금도 대학로에서 공연을 한다. 예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는 현장이다. 오늘도 대학로에는 연극을 하는 사람들, 연극을 보는 사람들이 3만 여명 정도가 물결을 친다. 그 속에 ‘나’도 있다. 우리 ‘해적선’ 팀도 있다.

◆문화현장 정복을 꿈꾸면서……
“우리 팀이 마음껏 모여서 예배하고 기도하며, 아이템을 개발할 수 있는 공간을 주옵소서. 상시 공연 할 수 있는 문화예술선교센터를 세워 주옵소서.”
나와 우리 팀의 기도제목이다.

/이영호 (전 국립극단 단원 겸 운영위원·현 세명대학교 방송연예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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