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의 속성(1)

국제크리스찬학술원장 예영수 박사

2013-11-24 14:50  인쇄하기


최근 한국교회에서는 억울하게 이단으로 내몰린 자들에 대한 재심과 이단해제에 대한 노력들이 엿보이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성경적 이단이 아닌 개인의 신조와 교단의 교리와 어긋난다는 이유로 또는 교인을 빼앗긴다는 이유로 이단이 된자 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는 일은 제2종교개혁과도 같은 혁명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에 반하여 과거 자신들이 이단으로 주장한 것에 대한 집착으로 조직적인 반대와 공격을 서슴치 않는 이단연구가들의 행보도 만만치 않다.  이 시점에서 한국교회에서 그동안 한국교회 이단문제를 쥐락 펴락한 자들 소위 이단사냥꾼에 대한 속성을 살피는 일은 의미있는 일이다.

전에 논필객 방개정씨는 이들을 '가다밥통'이라고 불렀고 그 다음부터 병아리 감별사와 같다고 하여 통칭한 것이 '이단감별사'였다. 현재까지는 수십 명의 이단감별사가 이단설에 대한 글을 썼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여 다른 입장의 글을 쓰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 대구 태생의 예영수 박사가 용감하게 이들 이단사냥꾼 즉 이단감별사의 속성이라는 글을 쓰고 이를 2011년에 통합측 총대 전원에게 그리고 중요 교회의 담임목사와 노회장들과 총회 임원들에게 배부하였다.

이에 본보는 저자 예영수 박사의 승락을 받고 그의 저서 이단사냥꾼 이단감별사의 속성을 게재한다.  

예영수 박사(사진)는 경북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미국 오리곤대학원에서 문학박사 영문학 및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퍼시픽국제대학에서 신학박사, 페이스신학교에서 교육학박사 학위 등 5개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효성여대, 계명대학교, 경북대학교에서 교수로, 외국어대학교에서는 사범대학 학장으로, 한신대학교에서는 대학원장을 지냈고 현재는 국제크리스찬학술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편집자주)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의 속성

한국의 이단사냥꾼은 이단을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특히 영성 있는 목회자들을 사냥하고 있음을 보아왔다. 이단사냥꾼의 잘못된 이단사냥 때문에 수많은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고뇌에 찬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아왔으며, 그 종들이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까지 고난과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보아왔다. 그래서 필자는 이단으로 송사당하고 정죄받은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정죄한 이단사냥꾼에게 더 문제가 있는 것을 보아왔다.

이단사냥꾼은 싸워야 할 상대를 잘못 선택했다. 진짜 공격해야 할 적(대상)은 사탄과 그의 졸개들과 그들을 따르는 배교자들과 영적 전쟁을 해야 하고, 거짓된 사교들, 거짓된 종교들, 뉴에이지, 세속적 인도주의, 안티 기독교, 예수의 처녀탄생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구속의 진리를 부정하는 저주받을 이단들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했다.

이 글을 쓰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이단사냥꾼과 그의 똘마니들이 터무니없는 사악한 활동을 중단하고 회개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며, 그래서 이단사냥꾼 자신이 남을 정죄하는 죄의 잔의 분량이 넘쳐서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내리게 되는 일이 없도록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이단사냥꾼의 속성을 앎으로써 이때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들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에 대해 자행한 이단 송사와 정죄를 믿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며, 그리고 오히려 이단사냥꾼의 저주받을 이단 사상을 조심하고 규탄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쓰면서 두려워하는 것은 이단사냥꾼들이 다른 사람들을 송사하고 비판하면서 범하는 오류와 동일한 죄를 나도 범하지나 않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광의 하나님께서 필자에게 선한 마음을 주시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고, 감동 주시기를 기도드리면서 이 글을 쓴다.

이 글을 쓰도록 격려해 주신 많은 목회자들과 기자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그리고 이단사냥꾼의 속성을 정신분석학적인 면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신 전우섭 박사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변증자'와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 

1.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의 명칭 

서구 교계에서는 자칭 이단 전문가라고 뽐내며 자신만의 편협한 신학 잣대로 무차별 돌을 던지면서 이단 정죄를 업으로 삼는 자를 '인격 살해자(character assassinator)'라고 부르기도 하고, '이단사냥꾼(heresy hunter)'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단 정죄를 업으로 삼는 자를 '이단사냥꾼'이라 부르는 것은 그 속성이 마치 동물을 전문으로 사냥하듯 ─ 미국에서 청교도 신정정치(Theocracy)시대에 마녀 사냥꾼(witch-hunter)이 종교적 편견과 거짓된 조작과, 교권의 엄격성과, 지능적인 공포심 유발로 마녀를 사냥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단 정죄를 업으로 삼는 자를 '인격 살해자'라 부르는 것은 이들이 내던진 이단 시비의 돌에 얻어맞으면, 즉 이들에 의해 교계 신문에 이단성이 있다고 그 이름이 한 번 오르기만 하면, 실제 이단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단으로 정죄된 자는 변명할 여지없이 인격적인 살해를 당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이들을 '이단감별사'라 부르기도 한다. '이단감별사'란 명칭은 이단을 감별하는 전문가로 자처하는 자에게 붙인 냉소적 풍자적 명칭인 것 같다.

 

2. '변증자'와 '이단사냥꾼'

 

먼저 '이단사냥꾼'과 '변증자'를 비교하여 차별화함으로써 '이단사냥꾼'의 정의를 극명하게 이해한 다음 '이단사냥꾼'의 속성을 구체적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제임스 스펜서(James R. Spencer)는 「이단사냥꾼들」(Heresy Hunters)이란 책에서 '이단사냥꾼'과 '변증자(apologist)'를 구별한다.

'변증자'는 교리의 문제점과 논쟁점을 제시하고, 어떤 교리는 잘못된(혹은 이단적일) 가능성이 있다고 교리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필요하다면 논쟁까지 하지만, 결코 자신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형제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비판하지 않는다.

변증자는 어떤 목회자가 논쟁의 대상이 될 때, 만일 문제된 교리가 영원한 구원에 필수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먼저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문제를 덕스럽게 해결하도록 노력하고 서로가 논란된 문제에 대해 새로운 통찰력을 갖도록 노력하며, 동시에 서로 다른 주장도 있음을 인식하도록 노력한다. 많은 경우 문제된 신학사상에 관한 사항을 진지하게 토론을 함으로써 서로의 다름이 어디에 있는가를 인식하게 되고, 새로운 통찰력을 갖게 됨으로써 문제가 덕스럽게 해결된 경우가 상당히 많다.

반면에 이단사냥꾼은 어떤 목회자의 작은 잘못을 발견하거나, 자신의 신학 노선이나 교리나, 성경해석이 다른 것을 발견하면, 자신은 심판관의 입장에서 그 문제를 과장해서, 필요하다면 왜곡해서, 심한 경우 거짓말로 조작하여 발표하고 공격의 대상이 된 자의 이름을 무차별 거론하면서 마녀사냥꾼처럼 인격 살해를 자행한다.

이단사냥꾼은 언제나 자신은 심판관의 입장에서 공격의 대상이 된 자를 계속 채찍질하며, 정죄하며, 온갖 동기를 다 찾아내어 TV나, 방송이나 신문이나 잡지 등을 이용하여 무자비하게 영적, 정신적, 심리적 화형에 처해 버린다. 그리고 난 다음 인격적인 살해를 비참하게 당하여 신음하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희생자의 모습에 승리자로서의 환희의 미소를 짓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단사냥꾼은 자기도 모르게 일종의 '강박적 싸이코패스'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변증자는 어떤 목회자의 신앙과 신학 사상의 문제에 비록 결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형제에게 먼저 회개하고, 잘못된 신학(성경 해석)을 수정할 기회를 주도록 방어해 준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변증자의 태도를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17).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딤전 5:1).  

형제가 죄를 범하였다고(개인적인 행위나 신학적인 문제나) 의심되는 자에게 먼저 만나서 직접 그 진실 여부를 알아보고 권면하라는 것이다. 문제된 사항을 더더욱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다루기 위해, 온유한 심령으로 서로의 다름을 알기 위한 만남을 가져야 할 것이다. 특히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은 자신의 지극히 한정된 신앙적 체험의 바탕 위에서 자신의 편협한 신학적 잣대를 가지고, 대학자나 된 것처럼 우쭐대면서 사소한 일에도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어내어 공격하함으로써 대중의 심리를 유도하는 사악한 짓을 한다. 그리고 이단사냥꾼은 자신의 공격의 대상이 된 자를 단체의 이름을 이용하여 ─ 많은 경우 자신은 그 단체 뒤에 숨어서 조종자로 남아서 ─ 이단으로서나 혹은 이단옹호자로 먼저 규정을 해버리고 난 후에 잡지나, 신문이나 라디와나 TV 방송에서 공격해 버리곤 한다. 이단사냥꾼 자신은 하나님과 같은 심판관의 자리에 앉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을 화형에 처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의 이런 행태는 공격을 당하는 자의 마음과 심령을 쓰라리게 하여, 마음에 독을 품게 하고, 원한에 쌓여, 마음에 쓴뿌리가 나게 하며, 복수심에 차게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마음에 미움이 차서 살인의 죄를 지을 수 있게 한다. 그 결과 이단사냥꾼은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그 목에 연자맷돌이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눅 9:42)고까지 말씀하셨다.  

종합해서 정의한다면, '변증자'는 논쟁의 대상이 된 자를 분별력을 가지고 충고하고, 바른 신앙 사상을 갖도록 선도해 주는 성숙한 분별력의 은사가(고전 12:10) 있는 자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살리는 일을 하려는 것이다.

그 반면에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이란 이단 정죄를 업으로 삼는 자로서 다른 사람을 지배, 조종, 정죄하려는 자를 지칭한다. 다시 말하면 선량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냥하여 죽이려는 것이다. 가징 경건하고 가장 믿음이 있는 체하면서도, 가장 경건치 못하고, 가장 신앙심이 없는 자들, 즉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방해하는 자들을 말한다.  

3. 한국교계의 이상한 현실  

이상하게도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이단사냥꾼으로 인해 부당하게 이단이란 누명을 쓴 자들에겐 조금도 인내하지 못하면서, 이단사냥꾼에게는 모든 것을 허락하여 가장 악한 방법으로 조작하고 조종하는 일을 하게 하면서, 심지어는 그 귀한 교인들의 헌금까지 수백만원 수천만원 주면서 돕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이단사냥꾼의 무분별한 정죄 행위는 정죄받지 않고 있으며, 그들의 영적 지능적 심리적 폭력 수법과 폭력 행위는 눈감아주고 있다. 이상하게도 그들의 좁은 식견과 잘못된 신학 사상과 거짓된 횡포는 간단한 설명으로 넘어가거나 보호되고 있다. 그들의 위선적인 해동은 너무 교묘하여, 영적인 거룩함의 옷으로 치장하지만 않았다면 이들의 짓거리는 범죄에 해당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고 생산적이고 역동적으로 살아가야 할 수백만의 영혼들이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협박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며, 그렇게 위축되어 살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한국의 비극적인 현실이기도 하다. 정말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의 위력(권능)은 가히 전능자의 힘을 가졌는가? 어떻게 그 많은 한국 교계와 그 큰 단체들이 이단사냥꾼의 눈초리와 손아귀에서 놀라고 또한 놀아나고 있단 말인가? 그의 전능자에 가까운 권능에 찬양을 보내야 할 지경이다. 아양을 떨어야 할 지경이다.  

4. 참아야 하는 것과 방어해야 하는 것  

대부분 하나님의 신실한 목회자들은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으로부터 거짓말과 부당한 비방으로 공격을 당하고도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속상하긴 하지만 그 많은 시간과 정력을 부당하게 공격해 오는 자에 대항하여 짜증스럽고 울분에 찬 싸움질로, 헛되게 낭비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보다 많은 시간과정력을 성경말씀을 연구하고 전하고, 주님과의 교제를 위해 기도하고 목회자로서 성도들을 돌보는 일에 값지게 사용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느 목회자든 자신의 신앙사상에 이단성이 있다는 공격에 대해 ─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된 송사든 간에 ─ 그 공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단사냥꾼의 음험한 거짓말 섞인 비방으로 인해 자신의 목회에 큰(경우에 따라선 치명적인) 손상과 혼란을 야기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돌보고 있는 성도들의 삶과 신앙생활에까지 알게 모르게 큰 손상을 끼치거나, 회복할 수 없게 훼손해 버리는 일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정죄당한 목회자의 가족들과 후손들은 물론이고, 수만은 선량한 성도들의 삶과 신앙생활에도 너무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물론 부당하게 송사하는 자들에게 다른 뺨을 대 줄 수도 있다. 그러기에 어떤 목회자들은 부당한 공격을 당하고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자제와 믿음(?)으로 참고 있다. 그러나 이런 평화주의자들(pacifist)이 알아야 하는 것은 거짓된 정죄를 업으로 삼고 있는 이단사냥꾼에게는 자신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필요하며, 또한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거짓말과 불의한 비난을 당한 지도자의 영향 아래 있는 수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에 혼란을 겪게 되고, 삶의 부당한 불이익을 당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신앙심의 상실까지도 겪는 경우에, 그 엄청난 책임을 지도자는 져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5. 바울은 어리석은 말이나 담대하게 해야만 했다  

이 시점에서 지도자들은 개인이 갖는 수동자세(pacifism)와 복음을 방어하는 보다 광범위한 문제를 혼돈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고린도전서 4:12-13에서 '우리(바울과 아볼로)는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표준새번역)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21에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하면서, 고린도후서 11:21에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 나도 담대하리라'고 함으로써 담대하게 응답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있는 거짓 선생들과 비평가들로 인해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바울과 바울의 복음은 교회에 설자리가 없다고 함으로써 바울의 권위와 목회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자신들은 참 목회자요 바울은 거짓 목회자라는 것이며, 그들의 사상은 옳고 바울의 사상은 잘못된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참 권위를 가졌으나 바울은 자신의 권위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은사와 말하는 능력에 비추어, 바울의 볼품없는 모양과 형편 없는 말솜씨를 보아도(고후 10:10) 자기들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자신의 권위와 목회를 방어 해야만 했다. 만일 바울이 자기 방어에 실패한다면, 바울의 비판자들은, 바울의 침묵은 바울의 약함으로 해석할 것이고, 아울러 바울의 목회는 방어할 가지가 없는 것으로 취급할 것이고, 결국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가 아니라고 소문을 퍼뜨릴 것이다.

바울에게는 자신의 목회를 방어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고린도교회를 거짓된 지도자들과 선생들로부터 구해야만 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은 좀 자랑하며 어리석은 일을 할 터이니 어리석은 사람으로 용납하라고 말한다. 바울의 자랑해야만 하는 것은 비방하는 자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고, 거짓 선생들로부터 교회를 구하는 길임을 확신하고 있다. 비방자들이 육신의 일(지위와 하는 일)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처럼 바울도 자신의 사역을 좀 자랑해 보겠으니 용납하라는 것이다. 교회가 바보들(거짓 선생들과 지도자들)을 기꺼이 용납하는 것처럼, 바울이 바보짓을 하도록 용납하라는 것이다. 이들 거짓 선생들과 지도자들이 교인들을 종으로 부려도, 먹이로 삼아도, 골려도, 얕보아도, 뺨을 때려도, 교인들이 참는 것처럼 교인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바울을 참아달라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과거처럼 약하게 굴지 않고, 거짓 선생들과 지도자들처럼 자랑하며, 어리석은 말을 담대히 말하겠다는 것이다(고후 11:16-21).

이제 우리도 어리석지만 바울처럼 당당하게 자랑하며 우리 자신을 방어해야만 하겠다! 침묵만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격언에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Speech is silver, and silence is gold.)'라고 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침묵은 금이요, 말은 신성하다(Silence is gold, and speech is divine.)'라는 격언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6. 비방(slander)과 거짓말(lie)하는 자  

구약성경의 지도자들은 비방과 거짓말은 심각한 문제로 취급하고 있다. 그들 지도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거짓된 송사자들을 제거해 줄 것을 기도하고 있다. 다윗은 시편 35:1-3에 자신을 악의에 차서 비방하는 자들에 대응하여 기도하기를, "주님,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워 주십시오.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와주십시오. 큰 창과 작은 창을 뽑으셔서 나를 추격하는 자들을 막아 주시고, 나에게는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 하고 다짐하여 주십시오."(표준새번역)라고 했다.

구약의 지도자들은 그들을 비방하는 자들을 처리해 달라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거짓과 날조된 비방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이며, 그래서 성경에 반대되는 행위이기에, 이것은 하나님을 적대하는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지도자)들에 대한 거짓과 왜곡된 비방과 심각한 송사에 대항하여 방어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성도들의 마음에서 빼앗아 버리는 위험을 보고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탄의 전술은 신실한 목회자들의 온전한 인격을 음험한 수단으로 훼손을 가함으로써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성도들로 하여금 의혹을 갖게 하여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7. 예수님도 거짓 송사하는 자들에게 단호하셨다  

예수님도 자신을 거짓으로 송사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항하여 자신을 단호하게 방어함과 동시에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라고 했으며, '독사의 자식들'(마 12:34)이라고 맹공을 가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라고 하여 완전히 어둠의 자식으로 영원히 저주받을 자로 무시해 버렸다. 무서운 일이다.  

제자들도 로마서 16:17-18에 성도들에게 권면하기를 '배운 교훈을 거슬러서, 분열을 일으키며, 올무를 놓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영원히 멀리'하라고 하고는 '그럴 듯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속이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배를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8. 죄의 분량을 채우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리라  

바울은 갈리디아서 1:9에 복음이 왜곡되고 오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하는 한편, 지도자들은 설명을 듣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하여 온유와 두려움과 선한 양심으로 답변하라는 것이다. 그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지도자들의 선한 행실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비방한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벧전 3:15-16).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2:14에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들이 유대 사람에게서 고난을 받은 것과 같이, 고난을 받게 될 것이고, 유대 사람들이 주 예수와 예언자를 죽이고,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내쫓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고 사람들을 대적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방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여 구원을 얻게 하려는 일까지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죄의 분량을 채우게 되면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이르게 된다고 했다.  

9. 거짓말과 비방하는 자의 이름을 밝혀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거짓말과 비방으로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해야 한다(딤전 5:20). 바울도 공적으로 베드로와 바나바를 힐책한 사건이 있었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야고보가 안디옥에서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야고보가 보낸 예루살렘 교회의 정통 유대인 지도자들이 도착하자 이방인과 함께 식사했다는 비방을 듣지 않기 위해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또한 바울은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자신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났다고 이름을 밝히면서 말을 했다(딤후 4:10). 

하나님의 신실한 지도자들이 거짓말과 왜곡된 비방으로 송사당할 때는 자신의 목회와 개인적인 온전한 인격을 방어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도 그렇게 했으며,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신실한 지도자들은 공적으로 거짓말과 비방으로 공격하는 자를 알리고 공적으로 회개를 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보호하고 잘못된 가르침에 성도들이 속아서 그릇 인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그리스도인들 중에 중요한 지도자들이 거짓말과 의도적으로 왜곡된 비방으로 송사당하고 상처받고 있을 때, 더 이상 남의 일이라고 방관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만히 보고만 지나간다면 그것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가는 일이기에 우리는 적어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기질을 발휘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도리라고 생각된다. 

10. 우리에게 겁주는 자들은 이제 그만 

찰스 스윈돌(Charles R. Swindoll) 목사는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은 은혜를 소멸하는 자들로서 이들이 교계에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그들은 아주 조직적으로 사람들을 위협하여 우리가 당연히 누릴 자유(은혜)를 누리지 못하도록 갖은 방해를 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스윈들 목사는 자신이 과거에 그런 사람이었기에 그들의 내용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스윈돌 목사는 '율법주의는 나의 성(城)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이 내 구호에 맞추어 행진하게 하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라고 자백한다.

 

오늘날도 남의 인격을 살해하는 살인자들(이단사냥꾼들)이 횡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성경을 갖고 다니며 이들 대부분은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며 종교지도자들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설마 살인자라고 생각하는 이웃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남의 자유, 자발성, 창조성을 앗아가며 남의 기쁨을 말살하고 남의 생산적인 의욕을 죽인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로, 글로, 그리고 표정으로 남을 죽인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 않는 교회와 기독교 단체는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그들 종교 관료주의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이 자유(은혜)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은혜의 함성을 외치는 전사들이었으나, 중세 교회의 이단사냥꾼은 이들 전사들을 미워하고 이단으로 몰았다는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 초에 부흥의 물결이 영국과 미국을 휩쓸 때, 요한 웨슬레,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그리고 위험을 마다 않는 하나님의 대변자들이 열변을 토할 때, 이들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자유(은혜)에 대한 메시지에 눈살을 찌푸리며 강하게 대항하는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이 율법주의자들 즉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의 무리로서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규정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겁을 주는 자들이란 것이다.

스윈돌 목사는 이제 우리는 󰡒하라, 하지 말라󰡓 명령하는 종교적인 왕들에게 순복하는 것도 그만하면 족하다는 것이다. 은혜(자유)를 소멸하는 자들이 은밀히 활동하는 것도 이만하면 족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찡그린 이마나, 송사하는 손가락이나 진실하지 못한 정죄는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당한 고통은 지금까지 만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11. 한국교회는 '이단사냥꾼'의 이단 사상을 규탄해야 

오늘날 한국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은 남들을 거짓말과 왜곡된 비방으로 계속 공격을 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학 사상도 정통 신앙에서 벗어난 이단 사상을 펴고 있다는 데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이단사냥꾼은 예수님은 마리아의 피를 타고 났다는 소위 '마리아 월경잉태설'을 주장하여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으며, '삼신론'을 주장하여 기독교의 정통적인 삼위일체설에 혼란을 초래하고 있으며, 기적종료론을 주장하여 오늘날 성령의 역사하심을 제한해 버리고 있으며, 율법폐기론을 주장하여 예수님의 율법 완성에 대한 언급을 무시해 버리고 있으며, 자연계시는 모두 비뚤어졌다고 말하여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완전히 무효화 해버리는 등 자신의 비뚤어진 이단 사상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기독교연구원(Christian Research Institute)의 특별계획 편집인인 로버트 보우만(Robert M. Bowman) 목사는 말하기를 '자기들도 이단 짓을 하고 있으면서 남을 이단 짓한다고 거칠게 비판하고 정죄하는 자들을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자의 비판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이런 비판자가 단순히 이단 짓을 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보다 불쾌한 것은 그런 자는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이단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가장하는 위선자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런 위선자는 실제로는 의롭지 못하면서 의로운 체하는 것이다. 위선적인 판단은 그 판단이 거짓이기 때문에 나쁜 것만이 아니라, 그 판단이 위선적으로 되어졌기 때문이다. 남을 판단하는 위선자는 자기 스스로가 판단에 직면하고야 마는 것이며, 자기 자신의 죄를 먼저 심판받아야만 하는 것이 삶의 아이러니이다(마 7:1-5).

이런 위선자가 바로 바리새적인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으로서 철저히 종교적인 자로 자처하면서 무엇보다 전통과 질서를 철두철미하게 주장하고 옹호한다는 오만함을 나타내고 있다. 바리새적인 이단사냥꾼의 치명적인 잘못은 성령의 새로운 역사에 반대하기 위해서 합의된 전통의 진리를 수호하는 챔피언인 것처럼 과장하는 데 있다. 궁극적으로 바리새적인 이단사냥꾼은 교회 안에서부터 하나님의 역사를 반대하여,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들을 파괴하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따라서 성경도 이런 바리새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베드로후서 2:12은 이러한 자와 집단을 '멸망케 할 이단'이라고 부르고 있다.  

12. '이단사냥꾼'의 공갈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려야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그 풍성하고 자유롭고 은혜에 가득한 삶과 맑은 공기를 즐겨야 한다. 이제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과 그의 '졸병들(똘마니들)'이 벌이는 ─ 의도적이면서 거짓되고 헛된 ─ 따지고 분석하고 논쟁거리에 휘말려 피곤에 지친 나날의 삶에서 과감하게 뛰쳐나와 그리스도의 은혜의 날개로 하늘 높이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날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놀라운 자유를 누려야 하며 그리고 우리의 얼굴은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로 바뀌어져야 하리라! 그래서 우리는 성경학자 도날드 반하우스(Donald Barnhouse)의 '위를 향한 사랑은 예배요, 이웃을 향한 사랑은 자비요, 허리를 굽힌 사랑은 은혜다'는 말씀처럼 구김살 없는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변증자'의 말은 경청하고, '변증자'의 지도는 받아야 하지만, '이단사냥꾼'의 거짓된 비난과 왜곡된 송사는 단호히 배격해야 하며, '이단사냥꾼'의 이단성 있는 신학 사상은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결론 : 어거스틴의 '취소'를 본받아야 

고대 기독교의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은 자신이 쓴 93권의 책과 276개의 편지와 1,000편의 설교를 검열하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성나게(기분 상하게) 하도록 잘못 말했는지 자기 자신을 비판하였으며, 잘못된 내용들을 겸손하게 인정하여 「취소」(Retractations)란 책을 썼다.

어거스틴은 초기에 사도시대 이후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기적종료 이론의 인상을 풍기는 말을 했는데, 이제 그 말은 취소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신의 도시」와 「취소」에서 사도시대 이후에도 기적이 일어나고 있음을 극명하게 예증하고 있다.

그는 「취소」 2.7에서 󰡒과거에 내가 한 말은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미란시의 순교자의 유골들이 있는 근처에서 소경이 보게 된 것을 나는 최근에 알게 되었다. 이 시대에만도 기적이 너무나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모든 기적을 다 헤아릴 수도 없으며, 또한 우리가 아는 기적을 다 설명할 수도 없다󰡓라고 말함으로써 기적종료 이론의 인상을 풍긴 말을 취소한다는 것이다. 그는 「신의 도시」 22.8에서 사도시대 이후에도 수많은 기적이 일어난다는 실례를 들면서 󰡒세상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는 기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잘못까지도 진솔하게 고백하는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우리도 우리의 잘못을 인정할 때 ─ 그것이 신학사상에 관한 것이든, 자신의 윤리적인 행동이든 간에 ─ 우리의 인격이 손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대 사람들에게 돋보이게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만일 이단사냥꾼이든 이단사냥꾼의 공격 대상이 된 자들이든 어거스틴처럼, 자신들의 잘못된 신학사상을 진솔하게 '취소'한다면 정말 한국교회가 단결하여 다시 부흥을 이루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예영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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