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고논문] 다락방 전도 운동에 나타난 ‘회개론’ 고찰

오수영 박사( RTS 기독교철학, 변증학교수, Ph.D)

2024-03-25 00:10:19  인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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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전도 운동에 나타난 회개론고찰

-개혁주의 회개론의 연속과 확장으로서의 전도신학적회개론 구상-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인의 삶은 회개의 삶이다-

 

회개는 교회 역사에서 신학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져 왔다, 그래서 교회사를 통해서 거의 모든 신학자들은 회개가 구원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가르쳐 왔다.본격적으로 신학이 등장했던 속사도 시대부터 중세와 종교개혁,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회개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이 제시되었다. 특히나 개혁주의 신학에서 회개는 구원의 서정에서 하나의 필수적인 과정으로 다루어진다는 점에서 회개개념이 갖는 신학적 의의는 크다고 하겠다. 실제로 회개는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간주된다. 개혁주의 표준문서중 하나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서는 회개가 없으면 죄 사함을 기대할 수 없다(2:38)”는 점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본 논문은 다락방 운동에 나타난 회개론을 규명하는 것이다. 혹자는 다락방전도운동에는 회개가 없다고 비판하고 다락방전도운동에서의 회개 비존재론을 펼친다. 눈물을 흘리고 참회하는 것만이 회개라고 보고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주장을 반대할 이유는 없겠다.그것은 회개에 대한 순전한 오해에서 비롯된 무지의 산물이겠기 때문이다. 필자는 다락방 전도운동에는 건전한 회개론이 있음을 논구함으로써 그러한 비판이 매우 부실한 신학적 근거 위에서 비롯된 오해임을 밝히고자 한다. 또한 다락방 전도운동에 회개가 없다는 비난과는 반대로 다락방 전도운동은 개혁주의 신학에 나타난 회개론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더 나아가 개혁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회개론을 확장할 수 있게 해주는 신학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음을 논구하고자 한다.

 

필자는 다락방 전도운동에 나타난 회개에 대해 신학적 규명을 위해, 먼저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회개론과 칼빈의 기독교 강요(Institutes)에 나타난 회개론을 살펴본 뒤에, 후기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 나타난 회개론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서 다락방 전도운동에 나타난 이러한 회개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에 충실하며, 그 의미를 심화시키는지를 논구하고자 한다. 특히 다락방 전도운동에 나타난 회개 이해는 개혁주의 신학에 나타난 회개론과의 뚜렷한 연속성이 있음을 보여 주고자 하며, 더 나아가 회개의 의미를 선교와 전도에까지 연결시킴으로써 개혁주의 회개론의 의미를 건전하게 확장하는 확장성이 있음을 밝힘으로써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서 말하는 회개론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는 점도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필자는 본 논문에서 다락방 전도운동에 나타나는 전도라는 패러다임에 근거해서 성경을 해석하고 형성되는신학적 특성들전도신학으로 규정하고자 한다.이에 따라 필자는 본 논문의 부제로 전도신학적 회개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 성경에 나타난 회개에 대한 어원적 고찰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에서 회개는 중요한 요소이다. 구원론을 다루는 현대개혁주의 신학자들 중 루이스 벌코프와 안토니 후크마는 회심(conversion)이라는 주제 아래 믿음(faith)과 회개(repentance)를 위치시킨다.반면 헤르만 바빙크는 믿음과 회심이라는 분류 방식을 따르고 있으며, 회심과 회개를 번갈아 바꿔 사용하고 있다. 아래서 살피겠지만 성경에 나타난 회심, 또는 회개라는 단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회심, 회개라는 두 단어가 특정되지 않은 채 번갈아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이런 점을 고려해서 회심과 회개 두 단어를 필요에 따라 혼용해서 사용하고자 한다.

 

회개는 복음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칼빈의 경우 회개와 죄 용서가 복음 전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 회개는 복음의 가장 중요하고 심오한 차원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회개는 세례요한(3:5-12; 3:7-14), 예수(4:17; 11:20-21; 5:32; 13:3-5; 15:7, 10; 16:30; 24:45-47), 초대교회(2:38; 3:19; 8:22; 17:30; 26:19-20)의 선포와 사도들의 가르침(2:4; 벧후3:9)의 핵심주제였다.”이런 점을 고려할 때 회개론은 구원론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며, 기독교 복음을 해명하는데 있어 두말할 나위 없이 중대한 신학적 함의를 갖는다.

 

 

1. 구약에 나타난 회개이해

 

1)나함(naham)

 

나함은 슬픔의 깊은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이다.”곧 나함은 무언가를 후회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회개를 의미하며, “종종 계획과 행동의 변화가 수반 된다조금 더 설명하자면 나함후회하다’ ‘뉘우치다를 의미하며 이 단어는 사람에 대하여 사용되지만(21:6, 15; 42:6; 8:6, 31:19), 특별히 하나님께 대하여 매우 자주 사용된다.이러한 나함은 감정을 표출한다는 개념을 반영하고 있는 단어로서 회개의 근본적이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성격을 보여준다

 

2)슈브(shub)

 

슈브라는 단어는 회개의 참된 의미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표현하는데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슈브“‘돌이키다’, ‘길에서 돌아가다’, ‘되돌아가다를 의미하고 은유적으로는 어떤 활동에서 떠나다’, ‘어떤 것을 그만두다’, 예를 들어 죄(왕상8:35), 불의(36:10), 죄과(59:20), 악의(3:19), 악행(9:35)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그래서 슈브로서의 회개는 탄식 같은 감정을 가리키기 보다는 행동을 가리킨다.”슈브는 죄와 악행으로부터 떠난다는 소극적인 의미뿐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의식적 도덕적 분리요, 죄를 버리고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인격적 결단을 뜻한다.”그래서 구약 성경에서 회심이란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분리시켰으므로 다시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제시한다.”이러한 해석은 포로 후기에 등장한 율법론적 경향으로 인해서 회심은 이전에 범한 죄를 보상해야 하는 일로 이해되기도 했다.

 

구약에 나타난 회개를 나타내는 두 용어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회개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을 이해하게 된다, 구약 안에 있는 중요한 두 가지 형태의 회개란 첫째, - cultic-ritual 개념과(이를테면, 공적인 예식, 금식, 다양한 슬픔의 표현, 전례, 회개의 날에서 표현되어진다) 둘째, 예언적 개념(이를테면, 백성들은 주께로 돌아와야한다)”이다.

 

2. 신약에 나타난 회개이해

 

회개에 해당하는 신약의 원어로는 메타노이아’(metanoia)에피스트레포’(epistrepho)가 있다.메타노이아’(metanoia)는 구약의 나함’(naham)의 번역어이고, ‘에피스트레포’(epistrepho)는 히브리어 슈부’(shub)의 헬라어 번역이다. 전자는 주로 회개의 과정 중 내면적 변화를 지칭하며, ‘에피스트레포’(epistrepho)는 내면적 변화가 외형적 생활로 나타나는 삶의 변화를 가리키는 단어라 할 수 있다. 그럼 그 각각을 살펴보도록 하자.

 

1)메타노이아(metanoia)

 

후크마의 설명을 따르자면, ‘메타노이아’(동사형은 메타노에오’)는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용어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어서, 마치 죄에 대해 슬퍼하고 죄로 인한 형벌을 두려워하여 후회와 유감의 마음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회개를 내면적 감정적 위기라고 이해하려 든다. 회개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 이해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각 사람의 관심을 다른 사람에게 보다는 자기 자신에게만 고정시키게 하였고 따라서 경건한 기쁨보다는 우울과 어둠으로 인도하게 하였다.

 

이러한 오해가 생겨나게 된 원인을 후크마는 회개에 해당하는 메타노이아의 동사형 메타노에오’(metanoeo)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찾고 있다. 라틴어 성경인 벌게이트는 이 동사를 참회하다, 고해하다라는 뜻의 포에니텐티암 아기테’(poenitentiam agite)로 번역함으로써 회개에 대한 외형적인 이해만을 추구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그것은 곧 회개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어떤 일을 행함으로써 상대방에게 만족감을 준다는 뜻을 갖게 만들어준 셈이 되었다.

 

1582년에 나온 소위 뒤아이 성경(Douai Bible)으로 알려진 로마 천주교 성경은 메타노에오참회하다/고해하다로 번역함으로써 이러한 오류를 영속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심지어 루터의 독일어 성경도 벌케이트(Vulgate)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여, 그 단어를 참회하다‘thut Busse’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영어본 성경은 이 단어를 ‘repent’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단어는 너무도 감정적인 변화에 강조를 두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즉 지나간 죄에 대한 슬픔을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메타노에오’, ‘메타노이아는 마음과 심경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히 죄에 대한 슬픔만도 지적인 변화만도 아니다. 오히려 한 인간의 온전한 변화를 가리키는데 삶에 대한 인생관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과 가정과 의지의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회개란 하나님께로 전 존재의 완전한 방향전환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2)에피스트레페인(epistrephein)

 

후크마에 따르면 회개에 해당하는 또 다른 단어는 ‘’에피스트레포이다. 이것은 구약의 히브리어 슈브’(shub)에 해당하며 에피스트레페라는 동사의 명사형인 에피스트레포는 사도행전 153절에 꼭 한 번 사용되고 있는 반면, 동사형 에피스트레페는 여러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벧전2:25; 26:18). ‘에피트레페라는 동사의 기본적 의미는 돌아서다’ ‘향하여 돌다이며, ‘에피스트레포행동의 전적인 변화, 사람의 생활양식의 전환, 온전한 돌아섬을 묘사하는 단어이다. 소극적으로는 악한 길로부터의 돌아섬‘(3:26), ’자신의 오류로부터 돌아섬‘(5:20)을 뜻하며, 적극적으로는 주께로 돌아감‘(1:16; 9:35; 11:21; 고후3:16)을 뜻한다.

에피스트레페’(epistrepe)“‘메타노에오’(metanoeo)보다 광범한 의미를 가지며 회심의 최종 행위를 나타내고 있다.”이것은 단순한 마음에서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가 확립되어 능동적 생활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이렇게 볼 때 신약 성경에 나타난 회개에 해당하는 메타노에오’(메타노이아)에피스트레페’(에피스트레포)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마음의 변화와 생활의 변화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회개는 방향의 변화요, 언약적 충실성으로 돌아오는 것으로서, “회개는 지성적 변화나 후회 그 이상의 것을 포함하며, 그것은 행동을 포함하여 한 사람의 삶의 모든 차원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그리고 새로워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함한다.”

 

첫 번째 단어는 어떤 사람이 죄악된 과거로부터 떠나도록 만드는 내적인 생각의 변화에 더 관심을 갖는 반면, 두 번 째 단어는 그가 그러한 생각의 변화의 결과로 또한 외적으로 드러내는 새로운 관계에 더 집중한다.”메타노이오는 마음의 변화를 뜻하는 반면, ‘에피스트레포는 생활의 변화까지 포괄하는 보다 확대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교회사에 나타난 회개이해: 중세 로마 카톨릭과 칼빈을 중심으로

 

 

1. 회개론의 중요성

 

교회 역사에서 거의 모든 신학자들은 회개(repentance)가 구원을 위한 필수적이라고 했을 만큼 회개는 구원론에 있어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회개 개념은 초대교회를 지나 속사도 시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원 의미에서 이탈이 일어났고, 종교개혁은 성경적 회개론을 회복하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그래서 이점과 관련해서 바빙크는 종교개혁의 기원은 로마교의 고해 체계에 대해 반대했다. 루터는 회개(metanoia)’의 성경적 의미를 재발견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제 1조가 회개에 대한 언명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종교개혁시대 이전까지는 회개의 개념은 구원을 불러오는 회개라는 관점이 지배했다.”곧 하나님의 일로서만이 아닌 인간의 행위와 공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나님의 일이라기보다는 신입협동적인 회개개념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2. 중세 로마 카톨릭의 회개이해

 

중세 로마 카톨릭에서 통용된 구원을 부르는’(salvific) 회개라는 개념은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회개는 세례 이전의 죄들에 대해서만 이루어지는 초기의 용서라는 것. 둘째, 세례 이후에 범하는 죄에 대한 용서는 회개(repentance)/보속(penance)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셋째, 회개는 참회(Contrition), 고백(Confession), 보속(Penance) 등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등이다.이러한 주장이 갖는 문제점은 죄용서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을 부정하고, 인간의 행위에 의해 죄용서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로마 카톨릭의 회개 이해에 대하여 벌코프는 로마교회는 회개 개념을 외재화 했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고해성사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참회(contrition), 고백(confession), 보속(penance), 사죄선언(absolution)이다. 이들 중 참회만이 회개에 포함될 수 있는데 진정한 참회를 경험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므로 회오’(attrition)에 만족한다.”여기서 중요한 점은 회오란 죄는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자책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죄를 떠나야겠다는 의도는 포함하지 않는다. 이는 지옥에 대한 공포다로마 카톨릭에서 말하는 고백이란 법적으로 사면하는 사제에 대한 고백이며, “보속이란 죄인이 속죄하는 것, 즉 고통을 참고, 어렵고 불쾌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외적인 행위들이 죄를 보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회개 개념의 외재화는 죄용서, 곧 구속에서 있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부정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한다. “죄의 용서란 회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 로마 카톨릭(스콜라주의)에서 회개란 오직 하나님에 의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중세 로마교는 회개에서 빈번하게 반-펠라기우스처럼 돕는 은혜인간의 의지가 협력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들은 인간이 영적으로 무능력하다는 것과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거부한다. 그들은 중생에 있어서 신입협력설(synergism), 즉 인간의 영혼을 영적으로 새롭게 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협력한다는 교설을 채택하고 있다.”따라서 중세 스콜라주의에서는 회개한 사람의 행동이 하나님의 사역보다 강조되었고, 사법적이고 교회적 측면이 영적이고 성경적인 요소들보다 훨씬 더 강조되었다.”이러한 로마 카톨릭의 회개 개념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참되지도 않다.로마 카톨릭에서 말하는보속’(penance)은 진정한 회개’(repentance)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에서 말하는 보속이란...인간 마음 속에 깊이 뿌리내려진 종교적 태도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선행과 고난을 통하여 자신들의 죄의 댓가를 치르도록 하려는 것으로서 참된 회개와는 다른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한 죄인들은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사역을 통해서 그들의 모든 행동이 죄로 가득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의 행동은 쓰라린 공허함과 심각한 우울증과 자기멸시의 원천이다. 그러나 지금 그 모든 것들이 처리되었다. 그들은 죄악된 행동에서 돌이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신뢰한다. 이것이 회개의 본질이다.”

 

반면 이러한 중세의 개념과는 반대로 칼빈은 영적이고 성경적인 차원에서 회개의 개념을 재정의 하려고 노력했다.”칼빈은 중세의 회개에 해당하는 개념인 “‘poenitentia agite’(penance를 행하다)를 버리고, 그대신 사람이 새롭게 되고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희랍어 메타노이아’(metanoia)에피스트레페인’(epistrephein)을 즐겨 사용했다.”회개라는 말로 번역된 이 단어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겠지만, 이것은 마음의 변화와 그에 따른 삶의 변화까지 포괄하는 의미를 갖는다. 칼빈에게 있어서 회개는 하나님의 사역이었고 우리 생활을 참으로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외면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영혼 자체의 변모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칼빈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회개에 대한 전통적인 가르침을 성경적 회개론의 왜곡이고, 회개를 내적 변화가 아닌 외적인 것이 되도록 했다고 비판했다.비단 칼빈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의 회개 개념에 세 가지 측면에서 도전하였다: ‘세례 이전와 세례 이후의 죄에 대한 최초의 용서, 세례 이후에 지은 죄의 용서를 위한 보속의 불필요, 회개는 마음의 변화(metanoia)’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과 루터는 로마 카톨릭의 공로적 회개 개념을 비판하였고, 그들에 따르면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마음의 변화로서 자신의 죄악됨과 죄용서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돌아서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칼빈의 회개이해: 기독교 강요(Institutes) 33장을 중심으로

 

바로 앞에서 고찰했던 중세 로마 카톨릭의 회개론을 극복하고 성경적 회개론을 제시하고자 했던 요한 칼빈의의 회개론을 고찰해보도록 하자. 칼빈은 회개론은 주로 기독교 강요(이하 Institutes로 표기) 3권에 나타난다. 이제 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1)회개는 믿음의 열매

 

칼빈에게 회개는 구원론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다. 그에게 회개와 죄용서가 복음 전체라고 할 만큼 구원론에서 회개가 차지하는 비중은 큰 것이다. 구원론에서 회개는 항상 믿음과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그에 따르면 회개가 항상 믿음을 따를 뿐 만 아니라 또한 믿음에서 생긴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칼빈에 따르면 회개하고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먼저이고 그 후에야 참된 회개가 가능하다 .

 

현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중생을 다룬 후에 회심을 다루면서 그 하부 항목으로 믿음과 회개를 논한다. 그래서 벌코프는 성령의 특별한 사역에 의해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은 회심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당연히 중생 후에 회개와 믿음이 따르며, “회개는 과거와 관련이 되어 있고, 신앙은 미래와 관련되어 있다.”프레임 역시 믿음과 회개의 관계를 논하면서 양자 간의 관계의 불가분적 연관성을 표명한다. 그에 따르면 신학 전통에서 회개와 믿음은 회심의 일부다.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오지만 회개를 통해서도 온다.”뿐 아니라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의지함 없이 죄에서 돌이킬 수 없으며, 또한 죄에서 돌이키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없다.”한 발 더 나아가 그는 회개와 믿음의 순서에 관해 어느 것도 다른 것 앞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어느 것도 다른 것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힘으로써 그는 회개와 믿음의 동시성을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중생과 회개의 순서에 있어서 칼빈과 현대 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회개가 신앙을 따른다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뿐 아니라 그는 회개와 중생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여 회개를 중생이라고 해석한다따라서 신앙으로부터 회개(중생)이 나온다. 그러나 칼빈은 사도행전 20:21절을 주석하면서 중생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다른 이해를 보여준다. 칼빈은 여전히 신앙에 덧붙여지지 않는다면 회개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하면서도, “신앙과 회개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동시에 새생명을 얻도록 중생시키지 않고는 신앙의 영을 그냥 조명하시지는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칼빈의 이해는 회개와 신앙의 관계 단순한 시간적 순서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회개의 한 부분이 신앙으로부터 나오고 신앙의 결과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 있어서 회개가 신앙에 우선한다고 생각해서 회개를 먼저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의 시작이 신앙을 위한 하나의 준비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칼빈은 회개를 신앙의 결과로 보면서도 어떤 점에서는 생명을 주시는 회개(중생)이 있기에 신앙이 가능하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칼빈은 요한복음 113절을 주석하면서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믿음은 우리가 생산해 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중생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고 밝힌다. 또한 믿음은 우리의 중생(거듭남)의 일부분이며, “믿음은 그 원천이 되는 중생에서 흘러나오는 것임을 밝힌다. 칼빈은 한편으로는 신앙이 회개보다 앞선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신앙이 중생의 일부분이며 중생으로부터 나온다고 본 것이다. “이런 현상은 칼빈이 중생을 광범위한 의미와 좁은 의미로 사용하므로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이중적인 입장은 후에 벌코프를 비롯한 후기 개혁파 정통주의에 이르러서는 중생을 성화와 구별하여 좁은 의미로만 사용하면서 중생이 신앙을 앞서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2)회개란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

칼빈은 회개를 우리의 생활을 참으로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순수하게 또 진실하게 두려워하기 때문에 전향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회개는 옛 사람과 육의 죽임과 성령의 살림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그 각각을 설명하면서 첫째, 회개가 생활을 하나님께 전향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외면적 행위 뿐 아니라 영혼 자체의 변모를 요구한다.”이는 영혼은 그 옛 본성을 벗어버려야만 비로소 새롭게 됨에 상응하는 행위를 낳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회개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죄인의 마음이 회개를 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각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이러한 두려움과 관련해서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회개의 근원(고후7:10)”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회개는 죽임과 영의 살림이라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하나님 자녀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옛 사람의 본성이 남아 있으므로 회개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새롭게 된 상태를 이러한 자기 부정에서 나오는 열매, 곧 의와 공의와 자비라고 부른다.”우리는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나 있었으므로 자기 부정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결코 올바른 길로 들어설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죽임과 살림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참여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할 때(6:6) 부패한 본성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되며, 그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새로운 생활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칼빈은 회개를 중생으로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회개의 유일한 목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지고 거의 도말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이러한 중생에 의해서 아담으로 인해 상실했던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게 된다.”

 

3)회개는 일평생 지속되어야

 

그러나 중생했다고 해도 그 온전한 회복은 한 순간이나 짧은 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속해서 그리고 때로는 더디게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사람들 속에서 육의 부패를 씻어버리고 그들의 부패를 깨끗케 하시며 그들을 당신의 성전으로 성별하신다.”이러한 과정은 평생 계속 되어져서 죽는 순간까지 회개는 실천되어야 한다. 이러한 회개의 과정은 평생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한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은 아니다. 중생을 통하여 죄의 결박에서는 풀려나지만 충분히 자유를 얻는 것은 아닌데, 그 이유는 육욕이라는 죄성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죄 개념을 더욱 엄격하게 하여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어떤 욕망에 충동되기만 해도 그것을 죄라고 간주했다.따라서 성도들이 죽을 몸을 벗어버리기까지 항상 죄가 있다고 보았다. 중생을 통하여 죄의 힘을 파괴시키기는 하지만, “죄는 지배력을 잃을 뿐이지 그것이 신자들 안에 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죄가 지배력을 잃었을 뿐 여전히 뿌리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칼빈은 영적 중생을 말한다. 중생의 의미를 극단적으로 확장하여 중생한 상태의 완전을 주장하는 입장에 대하여 비정상이라는 말로 비판한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자녀들은 순결한 상태로 회복되었으니 육의 정욕을 제어하는 데 부심할 필요가 없고 성령을 인도자로 삼고 따라야 하며 성령의 인도 하에서는 결코 길을 잃을 수 없다고 한다.”이는 극단적인 재세례파의 입장으로서 칼빈이 비판하는 것은 일종의 방종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 따르면 부정직과 정직, 의와 불의, 덕과 부덕 사이의 구별은 불필요하다. 그들은 이런 구별은 옛 아담이 받은 저주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해방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생 후에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의와 불의를 우리가 힘써서 구별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결국 방종으로 흐를 수밖에 없음으로 칼빈은 그 점을 강하게 비판한다.

 

칼빈에 따르면 오히려 중생한 후에도 아직 뿌리에 남아 있는 죄와의 지속적인 싸움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람을 부추기어 무절제하고 방탕한 정욕을 좇도록 하지 않고 도리어 옳은 일과 옳지 않은 일을 분별하여 사람들에게 규모와 절제를 지키도록 가르친다.”뿐 아니라 성령은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더욱이 성령의 성화를 통하여 우리가 깨끗해졌다 하더라도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은 많은 죄와 연약함에 얽혀 있는 것이다.”이런 점을 고려할 때 우리의 매일의 삶은 성화를 위한 영적 싸움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완전과는 거리가 아주 멀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진보를 위하여 힘써야 하고, 우리가 휘말려 있는 악과 매일 싸워야 하는 것이다.”칼빈에게 있어 회개는 평생 동안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그러나 성화의 완성이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성화의 완성은 우리 자신에게 상속되는 어떤 발전의 결과가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죽음만이 죄악에서 우리가 해방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중생자는 죽은 후 하나님과의 교제를 완성시켜 주시고 완전한 천국 생활을 누리게 해주실 그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소망한다.”

지금까지의 칼빈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우리는 칼빈에게 있어서 회개는 실제적인 거룩한 삶을 위한 시작으로서의 중생과 거룩한 삶을 위한 과정으로서의 성화를 모두 포함한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이 중생과 회개, 그리고 성화를 얼마나 긴밀하게 연관시키는지는 앞에서 이미 확인했다. 이 점에 대해 데이빗 칼혼(David Calhoun)에 따르면 칼빈은 성화중생’, ‘회개와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칼빈에게 있어서 성화, 중생, 회개는 동의어이기 때문이다.”더 나아가 회개는 성화를 위해 칼빈이 애호하는 용어이다.”칼빈이 회개를 성화와 연결시켜 이해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그래서 그는 성화라는 단어는 자주 자용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하여금 죄에서 돌아서게 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고, 거룩함에서 진보하도록 하시는 일생동안에 걸친 과정을 나타내는 말로 회개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마틴 루터 역시 이점에서 다르지 않다. “1517년 비텐베르그에 95개 조항을 게시했던 마틴 루터가, ‘우리 구주시오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다는 첫 번 조항으로 시작했을 때, 그가 의도했던 것은 신자들의 일생은 회개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죄에 대해 갖는 슬픔에 대한 부분이다. 칼빈은 고린도후서 710(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개정개역)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근심과 회개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가는 것만을 유일한 비참으로 여기며 그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서 그들의 죄악을 두고 슬퍼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근심이 회개의 원인과 근원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참된 회개의 요소 중 하나가 죄에 대한 슬픔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한 회개를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가 된다. “특별히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은 죄인이 자신에 대해서 불만스럽게 여기며 그로써 자신의 목숨을 미워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깊은 근심에 빠지지 않을 경우 그는 결코 주님께로 돌아서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범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은 회개에 필요한 조건이요 요소라는 점은 분명하다. “따라서 회개가 슬픔으로 시작되는 것은 이미 지적했듯이 아무도 먼저 자신의 죄악을 증오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길로 돌아올 수 없으며 죄악에 대한 죄악에 대한 증오가 있는 곳에는 자책과 비애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가 감정에 치우치기만 하는 것도 문제지만 죄악에 대한 아무런 비통함도 슬퍼함도 없다면 참된 회개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칼빈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4)회개의 열매

그렇다면 회개의 열매는 무엇인가? 그것은 거룩한 생활이다. 죄의 고백과 죄 용서가 계속되는 생활로서 평생 지속되어야 한다. 칼빈은 회개의 열매를 하나님께 대한 경건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삶의 거룩함과 순결의 직무들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의 기준에 순종하면 할수록, 그의 회개의 증거는 더욱 확실해진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회개에 있어 죄의 고백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러나 칼빈은 통곡이나 금식과 같은 공식적인 외면적인 고백을 회개로 부를 때, 회개의 참된 의미가 왜곡된다는 점을 밝힌다. 칼빈이 말하는 회개는 앞에서도 이미 밝혔듯이 죄의 고백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며, 동시에 형벌과 송사를 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간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사람들을 의식적이며 증인으로 세우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지 않지만,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빠뜨릴 수 없는 참된 고백이 된다.

 

이러한 고백은 자주 거의 매일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매일 짓는 죄가 있기 때문이다. 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회개는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이런 회개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육을 죽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훈련하여 드디어 육을 완전히 죽이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그리고 이러한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일 뿐 인간의 자율적인 행위가 아님을 분명하게 말한다. “회개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다회개는 성령의 사역이시다.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건지기를 원하시는 사람은 누구나 중생케 하시는 성령으로 살리신다. 엄밀히 말하자면 회개는 구원의 원인이 아니며, 그것은 믿음과 하나님의 자비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회개가 하나님의 은사요, 사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회개론을 살펴보았다. 앞서 살핀 바에 따르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마음과 뜻의 내적인 갱신보다는 회개의 외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이와는 달리 칼빈은 회개의 내적 측면을 강조하고 그것의 외적 차원에 대한 관심은 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회개의 외적 차원은 회개의 내적 차원에 따른 열매로서 버는 것이 함당할 것이다. 칼빈에게 회개란 하나님을 향해 돌이킴이요,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요, ‘죄랄 죽이는 것이며, ‘새생명 가운데 사는 것으로 평생 동안 지속되어야 할 영적 싸움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회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출발점만은 아니다. 회개는 믿음과 더불어 사실상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 자체이다.”칼빈의 회개 개념은 포괄적성격을 갖는다. “칼빈에게 있어 회개는 회심 및 성화와 거의 동의가 되어 있다.”그래서 칼빈에게 회개는 죄의 고백뿐 아니라 거룩 속에서의 성장까지를 포함한다. 그것(회개)은 신자가 그의 외적인 생활과 마음과 가슴과 뜻 모두에 있어서 복음에 대해 보이는 일생 동안의 반응이다.”그래서 칼빈은 회개를 일생동안 해야 할 경주(a life-long race)”로 표현한다.

 

. 개혁주의 신학에 나타난 회개이해

 

 

1.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회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개혁주의 신앙은 신앙고백서 형태로 자주 등장했다. 초기 개혁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신앙고백문 형태로 표현하기를 즐겨했다. 신앙고백서는 성경에 근거를 두며 그것은 언제나 임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회개 이해를 살펴보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회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개혁주의 신앙을 쉽고 명확하게 보여주는 고백서들 속에 나타난 회개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도록 하자.

 

개혁주의 신학에서 대표적인 신앙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나타나는 회개 이해를 살펴보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151~5항은 회개를 다루고 있다. 회개란 생명에 이르는 복음에서 오는 은혜이다.’이러한 회개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로 죄에 대한 슬픔과 혐오가 복합된 요소와, 둘째 요소는 첫 번째 것의 결과로서 오는 것으로 죄를 떠나 전심을 다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노력하면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행위이다그러므로 회개는 단순한 감정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모두 포함되는 전인적인 행위로서 자아 중심적 고집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악인 것을 알고 자아 중심적 사고방식과 생활의 틀을 버리는 것이요, 하나님 없이 살아온 것을 슬퍼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경외하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의롭게 살기로 결심하는 것이다.”이러한 회개 이해는 후기 개혁주의 신학에도 그대로 반영되는데, 회개의 3요소로 지성적 요소’, ‘정서적 요소’, ‘의지적 요소등을 논함으로써 참된 회개는 감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닌, ‘전인적인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5.3은 회개의 필요성과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회개가 죄에 대한 어떤 대속적 배상이 되거나 죄 용서의 어떤 원인이 되는 것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왜냐하면 죄 사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속죄, 죄사함의 유일한 원인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말미암는다는 점에 대해 마이클 호튼은 이렇게 말한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심판을 만족시키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확립하는 것은 우리의 눈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다.”그렇지만 회개는 모든 죄인들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회개가 없이는 죄 사함을 기대할 수가 없다.”이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회개는 죄를 속하는 것이 아니므로 속죄에 아무런 기초도 될 수 없지만 그 성격상 그것 없이는 어떠한 속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회개는 구원의 원인은 아니지만, 구원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조건일 정도로 그 의미가 중요하다.그래서 회개가 없으면 죄 사함을 기대할 수가 없다. 회개도 죄 사함의 원인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가 (material cause)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efficient cause인 것이다.”

 

이처럼 회개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견해들이 있음도 사실이다. 케이쓰 드룹(Keith Throop)죄를 회개하는 것이 구원의 필수적이라는 가르침에 반대하는 일들이 점증해왔다고 말한다. 회개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는 사실에 반대하는 주장은 어떤 것일까? 케이쓰는 회개가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으로 적절하게 이해된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그들은 그러한 죄를 돌이키는 것이 회심의 필수적인 측면이 아니며, 단지 회개를 제거하고 전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의 일부로 만든다고 말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회개 개념을 재정의함으로써 구원의 필수라는 점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있기도 한다. 케이쓰 드룹은 회개를 재정의함으로써 회개의 필수 요소로서의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제거하는 이들도 있다고 함으로써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회개 개념에서 제거하려는 시도를 비판한다.

 

그런 주장을 내세우는 챨스 라이리(Charles Ryrie)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이렇게 구원하는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마음의 변화를 포함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이전에 그리스도께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졌었든지, 그의 마음을 변화시켜 그를 구세주로 신뢰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이 구원하는 유일한 종류의 회개(2:38; 17:30;벧후3:9)”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의해서 반박될 수 있다. 성경적 근거에서 회개란 죄로부터 돌이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라는 점, 또한 회개는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는 점, 그리고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오류임이 드러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5.5항에서는 낱낱이 회개해야 할 것과 회개에 힘써야 할 이유가 제시된다. “사람들은 일반 회개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각자 자기의 죄들을 낱낱이 개별적으로 힘써 회개해야 한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일반적인 죄에 대해서는 별로 말씀하시지 않았으나 죄를 상세히 나누어 자주 말씀하셨다.”회개는 항상 힘써야 할 신앙의 덕목인 것이다. “회개는 한번 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죄를 범하는 경우마다 낱낱이 힘써 해야 한다(19:12-1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외에, 칼빈이 제정한 제네바 교회 교리문답 128항에서도 회개에 대한 규정은 기독교 강요와 대동소이하다. “회개란 죄악에 대한 불쾌감과 선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로부터 나온다. 또한 이 회개는 우리를 이끌어 육신의 죄악을 억제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성령님에 의해 통치되고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여기서도 칼빈의 회개에 대한 특성은 그대로 나타난다. 곧 죄에 대해 슬퍼하고, 죄에서 돌아서는 것,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 역시 회개에 대한 이해는 칼빈의 회개론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이델베르그 신앙교육서 88~90문에서도 참된 회개(회심)는 두 가지로 규정된다. “하나는 옛사람이 죽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새 사람으로 사는 일이다(6:1-11; 고후 5:17; 4:22-24; 3:5-10).”이것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회개의 본질이 죽임(mortification)과 살림(vivification)”이었음을 앞서 확인한 바 있다. 뿐 아니라 회개는 옛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서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새 사람으로 산다는 의미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말씀)을 즐거이 행하는 것(51:8,12; 57:15; 5:1; 14:17; 6:10,11; 2:20)”으로 규정함으로써 회개가 갖는 지성적 요소, 감정적 요소, 의지적 요소를 잘 보여주고 있다.

 

 

2. 토마스 왓슨의 회개 이해

 

청교도 운동의 지도자였던 토마스 왓슨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작성하였던 인물로서 자신의 저서인 회개 Repentence에서 회개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 중 참된 회개에 대한 내용만을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왓슨은 참된 회개의 성격에 대해 몇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죄의 발견이다. 이는 죄의 발견이 없는 곳에는 아무 회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지와 자아 사랑의 베일로 가리어져 있어서 자기들이 얼마나 불구가 된 영혼을 지니고 있는지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둘째, 죄의 슬픔이다. 여기서 죄에 대한 슬픔은 피상적이 아니라 거룩한 고뇌인데, 이를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51:)”고 말씀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은 무엇언지 묻고 왓슨은 여섯 가지로 제시한다. 경건한 슬픔은 내적이다. 경건한 슬픔은 솔직하다. 경건한 슬픔은 신뢰심이 두텁다. 경건한 슬픔은 대단한 슬픔이다. 경건한 슬픔은 어떤 경우 배상과 결부되어 있다. 경건한 슬픔은 영속적이다 등이다.

 

셋째, 죄의 고백으로서 그에 따르면 자발적 고백이어야 하고 양심의 가책으로 고백해야 하며 중심에서 우러나온 고백이어야 하고 죄를 상세히 열거하는 고백이어야 하며 근원적인 죄를 고백해야 하고 그런 죄들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고백해야 한다.

 

넷째, 죄의 부끄러움이다. 왓슨에 따르면 모든 죄는 우리를 죄책 있게 하고, 죄책은 통상적으로 부끄러움을 낳으며 모든 죄에는 감사할 줄 모름이 많이 내포되어 있고, 그것을 부끄러워 할 일이며, 죄는 우리를 벌거벗겼으며, 그것이 부끄러움을 일으킬 것이고, 우리가 범하는 많은 죄들은 마귀의 특별한 충동질에 의한 것으로 부끄러움을 일으키며, 죄는 사람들을 짐승으로 변화시킴으로 부끄럽게 하며, 모든 죄에는 어리석음이 있으며 사람은 자기의 어리석음에 부끄러울 것이다.

 

다섯째, 죄를 미워함이다. 왓슨은 죄에 대해 미워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묻고 다섯 가지로 제시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사람의 영이 죄를 대항할 때 죄에 대한 참다운 미움은 보편적이다. 곧 판단에서 뿐 아니라 의지와 정서에서도 죄를 싫어하는 것이고, 한 가지를 죄를 밍 nj하는 사람은 모든 죄를 미워한다는 점이다. 죄에 대한 참 미움은 모든 형태의 죄에 대한 것이며 참 미움은 인정사정이 없어서 죄와는 이 이상 도저히 화해되지 않을 것이고, 참 미움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반대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죄도 반대하게 된다.

 

여섯째, 죄에서 돌이킴이다. 왓슨은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 올바른 판정을 받기 위한 몇 가지 필수조건을 제시하는데 마음이 죄로부터 돌이켜야 한다. 마음은 모든 죄에서 돌이킴이 되어야 한다. 영적인 이유로 인한 죄에서의 돌이킴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참다운 참회자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죄로부터 돌이킨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죄에서의 돌이킴이 되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이상에서 토마스 왓슨이 말하는 회개를 살펴보았는데, 그의 회개에 대한 이해는 죄의 발견, 죄의 슬픔, 죄의 고백, 죄의 부끄러움, 죄를 미워함, 죄에서 돌이킴 등으로 요약된다. 죄를 슬퍼하고 부끄러워하고, 죄에서 돌이킴 등을 통해 죄를 미워하고 떠나 돌이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반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에 대한 강조는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죄를 버리는 등의 회개의 철저함을 강조하고 있지만, 회개의 적극적인 차원인 하나님 뜻을 따라 사는 삶에 대한 부분애 대한 강조가 없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제 후기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회개 이해를 살펴보도록 하자.

 

 

3. 후기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회개이해

 

후기 개혁주의 신학인 바빙크의 논의를 중심으로 개혁주의 회개론을 살펴보도록 하자. 바빙크는 자신의 개혁교의학에서 회개론에 대하여 상세히 고찰하고 있다.회개에 대한 어휘 분석, 중세 로마 카톨릭의 회개론 및 종교개혁에서 나타난 회개론을 분석, 평가하면서 회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1)바빙크, 벌코프, 후크마

 

바빙크에 따르면 회심은 언제나 내적인 생각의 변화로서 죄악된 과거를 하나님의 얼굴 빛 가운데 보여주고, 근심, 후회, 겸손, 죄를 고백하게 만들며, 또한 내적, 외적으로 새로운 도덕적 종교적 삶을 시작하게 한다.”그에 따르면 회심은 로마 카톨릭의 주장과는 달리 내적인 생각의 변화라는 것과 뿐 아니라 삶의 변화로 나타나야 한다. 또한 회심은 1회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생동안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죄에 대하여 죽는 날까지 계속 싸워야 하며 회개에 합당하고 회개에 상응하는 열매를 계속 맺어야 한다뿐 아니라 회심 이후, 큰 죄에 빠지고 심지어 그 죄 안에 한 동안 머물러 있을 때 두 번째 회심이 필요하다.

 

회개가 일평생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과 관련하여 벌코프는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그는 회심이 순간적 변화요 성화와 같이 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회심은 한 번 일어나며 반복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회심을 일회적인 것이고 순간적인 것으로 보면서 반복될 수 없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서 회심을 인간이 일시적으로 하나님과 거룩함을 망각한 후 다시 하나님과 거룩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고 밝힘으로써 회개의 일회성을 넘어 반복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인의 의식의 영역에 있어서는 상승과 하강의 기복이 있고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를 가질 때와 하나님과 멀어질 때도 있다고 말함으로써 회개의 반복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벌코프는 회개의 일회성에 대한 자신의 주장에서 후퇴하여, 지속적 회개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토니 후크마 역시, 루터와 칼빈의 회개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회개가 일평생 지속되어야 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르라고 요구하신 그리스도의 요청은 우리가 마땅히 평생토록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고 하면서 평생에 이르는 의미에서의 회개가 근본적으로 성화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논구하고 있다. 벌코프와 달리 후크마는 이처럼 회개를 성화의 과정으로 해석한다. 그는 회개가 평생 지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함축하는 바를 밝힌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회개의 삶이다.”둘째, “평생에 이르는 의미에서의 회개가 근본적으로 성화와 다르지 않다.”셋째, “날마다 우리는 우리 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회개의 불완전함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구해야 한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회개는 높은 이상이다;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드러내도록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생에서는 결코 온전히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요약하자면 후크마에 따르면 회개는 평생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성화에 다르지 않으며, 이 땅에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회심의 주체는 하나님, 인간은 방편적 수단

 

이러한 회심은 로마 카톨릭의 주장처럼 인간 편에서 이루어내는 공로가 될 수 없다. 오히려 회심은 하나님의 사역이며(31:18, 5:21), 하나님의 은사이지만(5:31, 11:18) 람의 지성과 의지를 통해서 실현된다.”앞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서도 이러한 점은 이미 살펴보았다.벌코프 역시 진정한 회심에 대한 논의에서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능동적 회심과 죄인의 행위로서의 수동적 회심이라는 두 측면을 논한다. 이것은 회개의 조성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점과 그럼에도 인간 편에서의 회개하는 일이 필수적임을 밝히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능동적 회심은 하나님께서 그의 의식의 영역에서 중생한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와 신앙으로 하나님에게 돌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행위이며, “수동적 회심이란 그 결과로서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회개와 신앙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생한 죄인의 행위이다. 후크마 역시 회개를 하나님의 사역인 동시에 인간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죄인들은 마땅히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셔야만 한다.”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 방법으로 중생을 가져 오신다. 그런 후에 이제 새롭게 된 의지는 하나님에 의해서 가동되고 동기를 부여받을 뿐 아니라 그 의지 자체 역시 능동적이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은 그가 받은 바 그 은혜를 인하여 믿고 회개하도록 촉구되는 것이다

 

3)회심의 의미

 

그러나 이와 관련 바빙크는 만일 그리스도가 다 속죄하고 구원 전체를 성취했다면 무엇 때문에 회심이 전적으로 필요한가묻는다. 이에 대한 답을 하면서 바빙크는회심의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에 대해 정의한다. “회심은 새 생명 이전에 그리고 새 생명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좁은 의미에서새 생명의 범위 안에서 일어나고 믿음으로부터 흘러나오며 중생에 뿌리를 둔다.”그러나 초기 개혁파 신학에서 이 단어는 ..... 넓은 의미로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전체적인 변화에 대해 매우 자주 사용되었다. 그래서 회심은 중생, 믿음, 지속적인 갱신 혹은 성화를 포함했다.”

이러한 참된 회심은 죄를 죄로 알고 근본적으로 죄와 단절하는 것이며,,또한 전인, 즉 지성, 마음, 의지, 영혼과 몸을 포함한다. 참된 회심은 인생 전체에 걸쳐 죄와 결별하게 하며 온 인격과 삶을 하나님의 길에 서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바치도록 한다.”그는 다시 회심을 정의하여 참된 회심이란 지속적으로 죄를 혐오하며 죄를 떠나 멀리 도망하고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마이클 호튼은 성경적 회개는 자신이 신뢰해온 영성, 경험, 도덕적 노력을 포함하여 세상, 육신, 마귀에 대한 근본적 부인을 수반한다. 자아 전체가 자신이 무엇을 믿고 누구를 신뢰하며 어떻게 살아갈지에 관한 최종적 결정권을 요구하는 자기 신뢰와 자율성에서부터 돌아서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회개, 또는 회심이 전인적 차원의 일임을 분명히 한다. 회심에 대한 이러한 정의와 해석은 감정에 지나치게 치우친 해석을 배제하며, 회심이 지니는 근본적 의미를 바르게 다루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벌코프에 따르면 회개란 죄로부터 멀어지는, 죄인의 의식 영역에서 야기되는 변화로 정의된다.

 

4)회심의 특징

 

바빙크는 회개가 갖는 특징을 크게 세 가지로 진술한다. 그에 따르면 첫째, 모든 회개가 참된 회개의 특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후회에 지나지 않고, ... 죄로서 죄를 통탄해 하지 않는 회개로서 참된 회개는 육에 속한 자연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통해 마음에 심겨진 새로운 생명으로부터나오기 때문이다. 둘째, 참된 회개는 속죄의 성격을 갖지 않는데, “참된 회개는 객관적으로 주관적으로나 죄에 대한 형벌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 죄인을 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셋째, “회심에서 율법과 복음은 협력한다.”참된 회심이란 죄를 참으로 슬퍼하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결코 단지 율법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마찬가지지로 그리고 더욱 복음을 통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바빙크는 회심에서 율법과 복음의 기능적 역할에 대해 율법은 교육학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복음은 또한 율법에 그 빛을 되돌려 비춘다고 말한다.

 

5)회심의 요소

 

이러한 회심은 어떤 요소로 이루어질까? 현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지,,의적 요소들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1)루이스 벌코프

 

벌코프는 회심의 요소를 회개와 신앙으로 나누면서 그 중 회개는 과거와 관련이 되어 있고, 신앙은 미래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며 회개는 성화와 관련이 있고, 신앙은 칭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한다. 곧 그래서 관점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회개의 지성적 요소를 말하고, 감정의 변화가 있다는 점에서 회개의 정서적 요소를 말하며, “목적의 변화, 죄로부터 내적으로 멀어짐, 용서와 정결을 구하려는 성향을 들어 회개의 의지적 요소를 말한다.

 

(2)안토니 후크마

 

후크마는 회개를 중생한 사람이 온전한 삶의 변화를 통해서 새로운 사고와 감정과 의지를 반영하면서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을 향하는 의식적인 돌아섬으로 정의한다. 후크마 역시 회개의 지적, 정서적, 의지적 요소를 언급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회개는 첫째,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존엄성을 아는 지식을 포함하는 지적인 측면이 있고, 둘째, 죄의 결과들 뿐 아니라 죄 그 자체에 대한 가슴 저리는 슬픔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감정적 측면이 있다. 이러한 것을 경건한 슬픔으로 규정하면서, “경건한 슬픔의 근저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놓여져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심히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며 그 분을 서운하게 해드린 일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가장 깊은 슬픔은 십자가 밑에서 느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죄에 대한 슬픔만 있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죄 용서에 대한 기쁨이 동반되어야 하며 그럴 때에야 참된 회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슬픔 자체에 빠져드는 로마 카톨릭의 참회는 참된 회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후크마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대한 기쁨,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기쁨, 다른 사람과 갖는 교제를 인한 기쁨들을 언급하면서 기쁨이 상실되면 우리의 회개는 온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셋째, 참된 회개는 죄로부터의 내면적인 돌아섬과 용서를 추구함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의지적 측면을갖는다. 그는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를 인용해서 회개를 옛 사람이 죽어 없어지며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이라고 규정하며, 또한 옛 자아의 죽어 없어짐은 진정으로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며 죄를 더욱더 미워하는 것이며 죄로부터 멀리 피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기타

 

이러한 회개에 대한 현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견해는 로버트 레이몬드(Robert L. Reymond)에 의해 잘 요약되고 있다. 신약에 나오는 회개(metanoeo, metanoia)를 분석하면서 회개는 하나님, 우리 자신, 죄 그리고 의에 대한 근본적이고 의식적인 관점의 변화(지성), 감정의 변화(정서), 그리고 결의의 변화(의지)를 내함한다고 말한다.바빙크 역시 회개가 갖는 지, , 의의 요소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참된 회심은 또한 전인, 즉 지성, 마음, 의지, 영혼과 몸을 포함한다. 참된 회심은 인생 전체에 걸쳐 죄와 결별하게 하며 온 인격과 삶을 하나님의 길에 서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바치도록 한다. 특히 회심에서 의지가 강조된다.” J. C. 라일(Ryle)은 회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참된 회개는 죄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참된 회개는 죄에 대한 참된 슬픔을 낳는다. 참된 회개는 죄의 고백을 낳는다. 참된 회개는 죄에서 철저히 벗어나는 것이다. 참된 회개는 모든 죄를 깊이 미우 j하는 습관을 마음 속에 심어줌으로써 나타난다. 그러므로 회심은 전인격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신앙의 국면이며, 삶의 변화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이러한 개혁주의 회개론은 회개에 대한 잘못된 이해들을 바로잡고 성경적인 회개론을 구성해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다락방 전도운동에 나타난 회개 이해

 

필자는 이 절에서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개혁주의 회개론을 간략하게 요약한 후, 다락방 전도운동 안에서도 개혁주의 회개론으로 해석될 수 있는 회개론이 존재하는지, 혹은 다락방 회개론이 가능한지를 살펴보고(연속성), 더 나아가 개혁주의 회개론을 확장해줄 수 있는 긍정적 요소가 있는지(확장성), 그리고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적으로 제시된다면 그것은 다락방 전도운동이 개혁주의 전통의 회개론의 연속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고, 더 나아가 개혁주의 회개론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 요소가 다락방 전도운동 속에 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되고, 회개론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신학적 의의가 있음을 고찰하고자 한다.

 

 

1. 개혁주의 신학에 나타난 회개론의 요약

앞에서 살핀 바에 따르면 성경에 나온 회개라는 용어는 단순히 죄에 대한 슬픔만도 지적인 변화만도 아닌, 한 인간의 온전한 변화를 뜻하는 것임을 확인한 바 있으며(2-2-1), 회개는 마음의 변화뿐 아니라 생활의 변화(2-2-2)’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제 칼빈과 신앙고백서와 후기 개혁주의 신학에 나타난 회개 이해의 핵심을 요약하고자 한다.

1)칼빈

칼빈의 경우에 회개는 믿음의 열매로서(4-1) 크게 보자면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순수하게 진실하게 두려워하기 때문에 전향하는 것으로서 죽임과 영의 살림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4-2). 또한 구원받은 이후에도 계속 회개가 필요한 것은 여전히 옛 사람의 본성이 남아 있으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부정하는 것’(4-2)이라고 할 수 있다. 뿐 아니라 회개는 일생동안 지속되어야 할 것으로서 죽는 순간까지 실천되어야 하는 것으로(4-2), 칼빈에게 이러한 회개의 삶은 성화를 위한 매일의 영적 싸움이기도 하다(4-3). 그래서 회개의 열매는 거룩한 생활로 나타나며,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인 것이다(4-4).

 

2)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따르면 회개란 첫째, 죄에 대한 슬픔과 혐오와 둘째, 죄를 떠나 하나님께 돌아오는 행위로 이해된다(5-1). 회개는 단순히 감정상의 문제가 아닌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모두 포함되는 전인적인 행위로 간주된다. 이러한 회개가 죄용서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단호히 부정하지만, 회개 없이는 어떠한 속죄도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회개는 구원의 원인은 아니지만, 구원을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5-1).

 

3)후기 개혁주의신학

 

바빙크에 따르면 회개는 내적인 생각의 변화일 뿐 아니라 삶의 변화로 나타나야 한다(5-2-1). 더 나아가 그것은 1회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생 동안 지속되어야 할 것으로 이해된다(5-2-1). 안토니 후크마의 경우 역시 회개는 일생동안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며, 회개의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성화와 다르지 않다(5-2-1). 회개는 회개를 가능케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사역이면서, 중생한 죄인의 행위라는 점에서 죄인의 행위이기도 하다(5-2-2). 바빙크에 따르면 회개는 지, , 의 세 요소로 이루어지며, 그것은 죄를 지속적으로 형모하고 죄를 떠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5-2-3). 더 나아가 로버트 레이몬드 역시 회개를 관점의 변화(), 감정의 변화(), 결의의 변화()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했다(5-2-5).

 

2. 다락방 전도 운동에 나타난 회개이해: ‘62가지 전도자의 삶을 중심으로

1)‘회개에 대한 이해

 

다락방 전도운동의 신학 바탕은 개혁주의 신학에 충실하다는 점은 명확하다. 칼빈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초대교회에 나타났던 성경적 전도운동을 회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칼빈을 보완한다고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류 목사는 전도신학의 방향을 설명하면서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연관성을 바탕으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지금까지 있었던 전통...신학과 신학 사상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 연관 있게 살려야 한다.”류 목사의 회개론은 개혁주의 신학 노선을 그대로 수용하고 따른다. 류 목사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서 87생명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해설하면서, “제목 자체가 얼마나 성경적으로, 복음적으로 잘 잡았는지 모른다고 말함으로써 개혁주의 신학에 그가 충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류 목사는 회개를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으로 정의한다. 류 목사는 누가복음 15:11-32절의 비유를 들어 회개의 의미를 설명한다. “돌아올 때... 탕자가 뭔 짓을 했든지 하나님께 돌아올 때... 너무나 고만 당하고 있다가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아버지가 아들을 환영했다여기서 회개는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옴을 뜻한다. 이것은 칼빈이나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서 이해하는 회개에 대한 관점과 동일하다.또한 류 목사는 회개는 의식 내에서 일어나는 활동임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회심은 의식적인 생활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후기 개혁주의 신학자인 루이스 벌코프 역시 회심은 잠재의식이 아니라 죄인의 인식 영역에서 발생한다고 밝힘으로써 회개가 뚜렷한 의식내의 활동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회심의 요소로는 개혁주의 신학전통을 따라 지,,3요소로 이루어지고 있음도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회개에 있어서 지적, 감정적, 의지적 요소를 말했는데 , 깨닫는 것은 지적인 것이요,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감정적인 것이요, 내가 이것을 해야겠다 하는 것은 의지적인 것이다.”류 목사는 회개해야 할 죄로 크게 세 가지를 말하는데, ‘복음에 반대되는 죄’, ‘교회에서 복음 막는 죄’, ‘생활 속에 있는 죄등이 그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류 목사는 개혁주의 신학 전통을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회개를 위해 구원의 은혜’,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며, ‘새로운 순종을 통해서 나타나야 할 것을 말한다. 이는 회개가 단순한 인간의 일만이 아닌 하나님의 일임을 강조했던 개혁주의 신학 전통과 합치되는 부분이기도 하다.이처럼 다락방 전도운동에서 회개에 대한 이해는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 충실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2)회개의 삶으로서의 전도자의 삶’(62가지 삶)

 

이러한 회개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질까? 그것은 다락방 전도운동에서 말하는 ‘62가지 전도자의 삶을 통해서이다. 전도자의 삶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본질과 목표를 잘 드러내주고 있으며, 다락방 전도운동의 회개론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이제 62가지 삶에 살펴보도록 하자.

 

(1)회개의 삶으로서의 ‘62가지 전도자의 삶

62가지 전도자의 삶은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할지, 또한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 살아야 할지 잘 보여준다. 칼빈에게 있어 중생과 회개와 성화는 긴밀한 연관이 있음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중생, 회개, 성화의 삶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a. 근본을 바꾸는 21가지 삶과 b. 성령충만을 누리는 5가지 기도, c. 성령인도 받는 9가지 포인트, d. 7가지 서밋에 이르는 길, e. 전도로서의 참 성공을 위한 20가지 전략으로 구성된다.

a. ‘21가지 전도자의 삶‘: 근본을 바꾸는 회개

 

전도자의 삶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다루는 것이다. 구원받은 후 성도는 회개의 삶을 시작한다. 앞서 본 것과 같이 회개는 단순히 죄를 슬퍼하고 죄를 미워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삶이다. 칼빈에게서 확인했듯이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이며 그것은 외면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영혼 자체의 변모를 요구한다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중생을 통해서 죄의 결박에서 풀려난다그러나 신자들은 여전히 죄인이다칼빈이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신자들 속에서 죄는 지배력을 잃었으나 여전히 내재한다는 사실이다. 21가지 근본을 바꾸는 삶은 이러한 칼빈의 견해를 전제한다.

 

류 목사에 따르면 신자는 구원받았음에도 여전히 예전의 각인 된 것들(죄성)이 남아 있으며, 그것을 바꾸고 치유할 필요성이 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을 사도행전 1:1으로 바꾸는 것이다....창세기 6장을 행1:3로 바꾸는 것이다. 바벨탑 쌓은 것을 행1:8로 바꾸는 것이다.”곧 우리 영혼이 창세기 3, 6, 11장으로 각인된 것을 사도행전 1:1 그리스도, 1:3 하나님 나라, 1:8 성령으로 새롭게 각인하는 것이다. 류 목사에 따르면 우리의 각인, 뿌리, 체질만 바꾸면 반드시 역사 일어나지 않는가? 그런데 각인, 뿌리, 체질을 바꿀 수가 없다. 우리는 안 바뀐다. 그래서 하나님이 답을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 하나님의 나라, 오직 성령이다. 안 된다는 걸 아시고, 그래서 안 되는 여러분의 성품을 사용하신다....이 언약을 붙잡고 있으면 근본이 바뀌는 것이다. 이 축복을 늘 누리고 있으면.... 21가지 응답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천명, 소명, 사명이 보인다. 당연, 필연, 절대가 보인다. 일심, 전심, 지속이 보인다. 오직, 유일성, 재창조가 보인다. 24, 25, 영원 보인다. 따라오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 각인, 뿌리, 체질 바꿀 수 없다. 그래서 이 답을 주신 것이다.”

이러한 ‘21가지 전도자의 삶은 오랫동안 각인되고 뿌리내리고 체질화된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그리스도, 하나님 나라, 성령으로 새로운 각인(1:1,3,8)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이러한 것은 칼빈이 말했던 회개의 삶의 하나의 구성요소로서 죽임과 살림으로 나타난다.칼빈은 모든 육신의 감정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므로(8:7 참조)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첫 번째 단계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회개의 한 요소로서의 죽임이다. 또한 이렇게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맺는 열매를 의와 공의와 자비라고 부른다. 이것은 회개의 다른 한 요소로서 살림이다. 전도자의 삶 21가지는 칼빈의 경우 죽임과 살림을 충실히 이행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 여기 21가지 요소에는 일심-전심-지속의 항목이 있다. 이것은 회개는 평생 지속되어야 할 영적 싸움이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그에 따르면 이 육신의 감옥에 사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부패한 본성의 결점, 곧 우리의 타고난 생명과 싸워야 한다.“이러한 일심, 전심, 지속해서 옛 각인을 없애고 새로운 각인을 하는 것이야말로 회개의 삶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전도자의 21가지 삶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류 목사는 각인된 것에 따라 응답이 오고(23:1), 뿌리 내린 것에 따라 열매를 맺게 되며(2:2-3), 체질을 따라 살게 된다(1-13)”고 말함으로써 각인을 바꾸는 회개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근본을 바꾼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을 하나님 것으로 바꾸는 것을 뜻한다. 바꾸는 방법은 일심, 전심, 지속이라는 집중을 통해서이다. 이렇게 근본을 바꿀 때, 신자의 삶은 모든 방면에서 회복이 일어난다. 그래서 각인, 뿌리, 체질 바뀌어 버리면 무엇이든지 바꿀 수 있다. 그래서 내가 기도해서 응답을 받는 게 아니고 있는데 하나님의 응답이 몰려오는 것이다.”이같이 근본이 회복될 때 삶의 모든 방면에서 회복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회개가 삶의 전역역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J. 판 헨더렌과 W. H. 펠레마는 인간 존재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응답이 몰려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치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축복이 각인 되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게 뿌리 내리고, 오직 성령의 체질 되어질 때 진짜 이제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다. 진짜로 치유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21가지 전도자의 삶에서, 각인된 것을 바꾸는 일이야말로 회개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 요소임이 드러난다. 이제 이어서 ‘62가지 삶에서 ‘5가지 기도’, 성령충만을 살펴봄으로써 회개의 삶에서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b. 기도(5가지): 회개의 삶으로서의 집중과 치유

회개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이다. 류 목사에 따르면 기도는 여호와께 집중하는 것이다. 기도는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삶이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본인 모르게 각인 된 것이 많다....각인 된 부분이 뿌리 내리고 체질이 된다.”이 기도는 다섯 가지 요소로 제시된다. 구원에 대한 감사, 말씀(묵상, 암송, 녹취), 집중(능력, 복음의 흐름), 실제 치유, 미래(말씀성취와 균형)가 그것이다.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회개는 일종의 치유과정이라는 관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보겠지만 여기서는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구원의 감사와 말씀의 묵상이 이루어질 때, 그 다음으로는 집중으로 들어갈 수 있다. “집중은 굉장한 능력을 포함하기 때문에 길수록, 깊을수록 좋다.”집중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는 시간에 우리의 각인, 뿌리, 체질이 바뀐다.” 신자들에게 이미 오래전부터 각인되어 있고 뿌리내려져 있고 체질화되어 있는 요소들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응답을 가로막고 있으므로 이 부분들이 바뀌어야 모든 것이 회복된다.”집중할 때 치유가 일어난다.”이와 반대로 집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집중하지 못하면 분산 된다. 아니면 분산 되거나 집착하게 된다. 분산 되어서 집착하게 되면 중독된다.”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집중이 내게 없다면 치유가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집중의 시간이 내게 있으면 각인, 뿌리, 체질은 바뀌는 것이다. 이때부터 벌써 치유가 영, 마음, 육신에 치유가 일어난다.”요약하자면 회개의 삶으로서의 기도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써 오래된 것들이 치유될 수 있게 된다.

 

c. 9가지 포인트: 회개의 삶으로서의 소통

 

회개의 삶은 소통으로 나타난다. 회개한 자는 생각과 삶이 변화된 자로서 참된 소통을 누리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소통을 가로막는 요소로 편견’, ‘이념’, ‘세계관등이 있다.이것을 바꾸는 것이 회개한 자의 삶이 된다. 그 아홉 가지는 높이, 넓이, 깊이’ ‘, 아래, 주위’, ‘과거, 현재, 미래인데, “높이, 넓이, 깊이를 동시에 보는 것이다. 이게 복음이다. 위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과거를 보고 오늘을 보고 미래를 보는 것이다. 이것을 소통이라고 한다.”

 

이러한 소통의 결과는 무엇인가? 이것은 세상을 살리는 길이 된다는 것이다. 류목사는 소통 속에 들어 있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사람과의 관계다... 그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움직이시는 방법이 여기에 들어 있다...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다. 실제로 세상 살릴 수 있는 인도 받는 아주 성공 비밀이 여기에 들어 있는 것이다.”이러한 소통을 세상을 승리하기 위한 성령인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무리 실패한 사람도 지금부터 성령 인도 받으면 승리한다. 아무리 성공한 사람도 성령 인도 못 받으면 어려움 당한다. 성령 인도 받는 아주 중요한 비밀이 뭡니까? 9가지 포인트다.”

 

이상을 요약하면 전도자의 삶으로 ‘9가지 포인트는 참된 회개를 한 자의 삶이요, 회개하는 자의 삶이기도 하다.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분의 뜻을 따르는 회개의 삶으로서 9가지 포인트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중요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d. 20가지 전도전략: 회개한 삶으로서의 전도

20가지 전도 전략은 회개의 삶이 갖는 의미를 사회, 문화적 차원으로 그 의의를 확대시킨다. 한 개인의 변화가 근본적으로 현장, 그러니까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적으로 그 영향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지금까지 회개론은 회개의 개인적 차원을 주로 다루었을 뿐, 공동체 차원이나 사회적 차원으로까지 확대하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된다 하더라도 그 실제 적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런 문제점에 대해서 20가지 전략은 최적의 성경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20가지 전도전략은 나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현장을 살리고 문화 살리고 정치 살리는 걸 말한다.”다락방전도운동의 실제적 원리가 이 속에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락방 전도운동이 평신도 운동이요, 현장중심운동이요, 교회 살리는 운동이라고 볼 때 20가지 전도전략은 복음을 현장에 적용해서 현장을 살리고 변화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칼빈 역시 이 부분을 언급하고 있는데, “회개는 하나님의 율법에 의거한 삶의 갱신과 다른 무엇이 아니다.”또한 회개는 우리의 마음에서 먼저 시작하며 하나님을 증인으로 가지며 열매에서 자신을 입증시킨다.”이점에 대하여 칼빈에게 있어서 회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출발점만은 아니다, 회개는 믿음과 더불어 사실상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 자체이다.”

 

이것은 현장을 살리는 방법이다. 20가지 전략을 류 목사는 현장을 파고들어 살리고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이런 삶을 사는 것이 참 성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유일성 5가지를 누리는 것이요(5기초: 복음, 만남, , , 지역), 캠프의 삶을 누리는 것이요(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복음 전하는 제자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현장 살리는 시스템(전도학교, 신학원, 훈련원, 전도합숙, 집중전도)이요, 복음으로 흑암을 막는 흐름을 바꾸는 미래의 축복(렘넌트, 치유, 산업, 문화, 엘리트)을 누리는 것이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회개의 삶은 개인의 변화를 넘어 현장을 변화시키고 살린다는 점이다. 현장의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방면에서 복음운동을 통하여 살려낸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회개의 삶이 결국 지향하는 회개의 목표요, 열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회개의 마지막은 그 열매임을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실천 방법을 제시하는 데서는 구체적이지 않다. 그러나 다락방 전도운동에서는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성경에서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거룩한 삶으로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에 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이루어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락방 전도운동은 개인의 변화가 곧 현장과 사회의 변화로까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성경적인 전도전략을 성경에서 찾아내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회개의 삶의 결국은 전도자의 삶이되어야 할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회개의 삶을 가장 온전하게 살려내고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필자는 회개의 삶으로서의 62가지 전도자의 삶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 내용은 회개의 근본을 바꾸고 치유하는 것이다. 나중심 물질중심 성공중심으로 뿌리내린 옛 것을 버리고 새 것그리스도, 하나님 나라, 성령충만으로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일심전심지속을 통해서 평생동안 이루어야 할 것임을 확인했다. 이러한 회개는 이제 개인변화를 넘어 사회로 향하고 있음도 확인했다.

3)회개의 실천 매커니즘으로서의 ‘3오늘

이제 다락방 전도운동에서 회개에서의 특별한 실천 메커니즘을 갖고 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중세 로마 카톨릭에서는 회개의 3중적 구조를 말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곧 참회, 고백, 보속이 그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의 성사로서의 회개 개념을 버릴 때 회개의 3요소중 참회만 남기고, 고백과 보속은 배제했다. 회개 개념으로 수용했던 참회로서의 회개가 전수됨으로써, 통상적으로 회개를 논할 때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생활 방면의 변화보다는 죄에 대한 슬픔을 강조하는 오류에 빠지게 되었음은 이미 밝힌 바 있다. 여기서 논하려고 하는 ‘3오늘은 로마 카톨릭에서 말하는 고해성사로서의 고백도 아니요, 죄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보상을 가능케 한다는 의미에서의 보속 개념은 더더욱 아님을 먼저 밝혀둔다. 여기서 ‘3오늘은 매일 매일의 우리 삶에 대하여 하나님은 중요한 답을 갖고 있으며(오늘의 말씀), 내가 가는 현장에 하나님의 전도계획(오늘의 전도)이 있음과 그에 따라 부어주시는 힘(오늘의 기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요, 그것을 실제로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까지 논해왔던 회개 개념에 어떻게 부합되는 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회개: ‘마음의 변화’, ‘삶의 변화

 

앞에서 밝혔듯이 회개는 마음의 변화, ‘삶의 변화이다. 후기 개혁주의 신학자인 안토니 후크마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메타노이아’, ‘에피스트레포라는 회개의 두 개념에 대해여 각각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메타노이아는 마음과 생각의 변화를 의미한다. 단순히 죄에 대한 슬픔만도 지적인 변화만도 아니다. 한 인간의 온전한 변화를 가리키는데 삶에 대한 인생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변화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에피스트레포는 행동의 전적 변화, 사람의 생활양식의 전환, 온전한 돌아섬을 묘사하는 단어이다. 소극적으로 말하자면 이 단어는 악한 길로부터의 돌아섬(3:26), 혹은 자신의 오류로부터의 돌아섬을 의미한다(5:20). 긍정적인 면에서 본다면 이 단어는 주께로 돌아감(1:16;9:35; 11:21; 고후3:16)...말한다.”뿐 만 아니라 칼빈에 따르면 회개와 중생은 같은 의미를 갖는다. 회개, “즉 중생은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이 되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새생명으로 나타난다.”칼빈에게 있어 회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출발점만은 아니다. 회개는...그리스도인의 생활 그 자체이다.”그러므로 회개는 마음의 변화와 생활의 변화 모두를 뜻하는 단어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포괄하는 단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회개는 우리의 마음에서 먼저 시작하며 하나님을 증인으로 가지며 열매에서 자신을 입증시킨다.”이처럼 회개는 항상 삶의 열매로 나타남으로 그 의의가 드러난다. 헤르만 바빙크 역시 참된 회심을 논하면서 죄를 참으로 슬퍼하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보고 있다.

 

(2)회개의 방편으로서의 ‘3오늘

이런 의미에서 다락방 전도운동에서 말하는 ‘3오늘회개의 의미를 명확히 드러내줄 뿐 아니라 그 실천을 위한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3오늘은 무엇인가? 매일 답을 얻는 것이요, 그날 필요한 힘을 얻는 것이요, 그날 현장에 준비된 전도계획을 찾아 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오늘에 대해 폭넓게 정의한다면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것이다.”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않고는 개인 변화, 교회 변화 현장 변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3오늘의 내용은 오늘의 전도오늘의 기도오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a. ‘3오늘이해

 

‘3오늘, 제일 먼저 기획되어야 할 것은 오늘의 전도이다. ’오늘의 전도는 하루기 시작도기 전에 기획되어야 하는 것으로,가야 할 곳, 만남에 대한 메시지, 자료 준비, 교인들을 활용해서 전도할 수 있도록 개인화 준비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그 하루에 대한 전도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전도계획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가장 큰 계획인 것이다.둘째, 오늘의 말씀은 삶 속에서 말씀을 붙잡는 것이다. 류목사는 삶속에서 오늘의 말씀을 붙잡으라. 오늘 현장의 모든 삶을 강단말씀과 연결해서 보라고 말한다. ’오늘의 말씀은 변화된 회개의 삶의 핵심을 이룬다.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와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새로운 삶은 새로운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할 때 새로운 생각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곧 절대적인 하나님 말씀이 내 생각이 되고, 그것이 삶의 시작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말씀을 붙잡고 하루를 시작하고 진행하는 것이야말로 회개의 핵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오늘의 기도는 하루동안 필요한 힘을 얻는 것으로 류목사는 오늘의 모든 것을 기도로 조명하면서 답을 얻으라. 그리고 힘을 얻으라고 말한다. ’오늘의 기도는 하루 동안의 필요한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의 기도가 시작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기도로 쭉 한번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아침에 눈을 뜨면 (기도로) 모든 비전트립을 해야 된다. 내가 기도해야 될 게 뭔지 쭉 나온다. 그리고 답을 얻는 것이고 힘을 얻는 것이다. 물론 밤에도 힘을 얻고 낮에도 힘을 얻지만 시작 때 벌써 힘을 얻어서 하는 것이다.”

 

b. 회개의 메커니즘으로서의 ‘3오늘

 

그렇다면 오늘의 기도가 어째서 회개의 삶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하루의 삶을 나의 힘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주시는 힘, 성령의 능력으로 살도록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에서 40일간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신 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다.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살릴 것을 명하셨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3오늘의 실천은 전도자의 삶이요, 회개한 자의 삶이요, 회개하는 자의 삶이라고 부르기에 적확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도자의 삶은 단순한 개인적 변화를 넘어서 현장변화, 시대 변화와 문화의 변화까지 가능케 하는 동력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회개론의 적용을 실질적으로 확장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점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회개가 마음의 변화를 넘어 삶의 변화를 뜻한다고 보았을 때, 삶의 변화라는 부분을 매우 충실하게 구현해 내고 있으며, 그 구체적 방법까지 제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회개론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다고 사료된다. 이는 로마 카톨릭의 전통의 영향을 받았던 루터의 회개론을 포함하여 개신교 성도들의 가졌던 회개에 대한 오해, 곧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며 슬퍼하는 것만이 회개라고 보았던 오도된 회개 이해를 바로잡아준다는 점에서 건전한 신학적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c. 회개의 실천으로서의 ‘3오늘과 치유

 

뿐만 아니라 회개는 기독교인의 삶이자, 일생 동안 매일 부지런히 힘써야 할 덕목이라는 점에서 매일의 삶을 통해 그 실천을 강조하는 ‘3오늘은 그 목적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류목사는 3오늘을 전도자가 날마다 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칼빈 역시 회개가 일평생 동안 계속해서 추구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바와 상통한다. 칼빈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일평생 회개를 지속해야 한다.”매일 회개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칼빈은 인가느 내부에 남아 있는 악한 욕망과 악한 습관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악한 욕망은 항상 우리를 괴롭히며 악습은 거듭 싹이 남으로 우리는 육을 죽이는데 대한 관심을 늦출 수 없다....우리의 본성은 부패했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을 두고 유의하여 이런 회개를 행하지 않을 수 없다그러므로회심은 첫번째 실재적 회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매일의 회심가운데 지속된다.”

 

d. 회개의 열매로서의 치유와 ‘3오늘

 

이러한 ‘3오늘의 실천은 열매로 나타난다. 그 열매는 치유전도의 축복이다. ‘3오늘의 실천은 ‘62가지 전도자의 삶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길이고 방법이다. 그것을 지속하는 동안 열매가 생겨나게 된다. 그 세 가지는 치유와 전도와 생활 방면에서 나타난다. 첫째, 영적인 치유이다. “(3오늘을) 꾸준히 하면 어느날...영적 문제가 없어지게 된다....자기도 모르게 없어진다.둘째, 전도문이 열린다. “3오늘을 계속하면 두 번째 오는 것이, 전도는 늘 있지만 내가 하는 것이 정말로 맞다고 생각되는 문이 열린다.셋째, 생활의 응답이다. 이것은 경제의 응답으로 나타난다. 류목사는 3오늘을 계속하다 보면 삶에 대한 응답이 오는데 그 중에 가장 키가 되는 것은 경제 응답이 온다. 경제가 다는 아닌데 삶 가운데서 꽤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3오늘 실천의 열매 중 치유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치유는 회개의 결과요, 열매라는 점에서 중요할 뿐 아니라, 그것은 나중에 살피게 될 서밋의 삶으로 이행하는 과정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성도는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성은 남아 있다. 그래서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신자들은 여전히 죄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중생을 통해서 죄의 결박에서 풀려나지만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욕망에 충동되는 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그래서 죄는 지배력을 잃을 뿐이지 그것이 신자들 안에 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여기서 남아 있는 죄성을 다락방 전도운동에서는 틀린 각인’, 틀린 뿌리, 틀린 체질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표현한다. 그리고 ‘62가지 전도자의 삶집중함으로써 각인, 뿌리, 체질을 바꿀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바꾸는 일을 치유라고 말하는데 그 치유의 본질은 바로 이러한 회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전도자의 삶은 현장에서 인생의 12가지 문제 속에 빠져 있는 자를 치유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복음을 받았다면 복음의 능력을 갖고 살아야 할 것이다. 류목사에 따르면 신자들은 복음의 확신도 없고, 옛 날 것으로 너무, 각인, 뿌리, 체질 내려져 있다.”그래서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지난 날 잘못 각인, 뿌리, 체질 된 인생 12가지 문제 이 부분을 완전히 깨끗하게 치유 되어 회복 되어야 한다.”그 회복의 방향이란 옛 각인, 뿌리, 체질을 새로운 각인, 새로운 뿌리, 새로운 체질로 바꾸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 나라, 오직 성령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치유가 회개라고 말할 수는 있는 것일까? 치유는 일종의 질병이나 연약함에 대한 치유일 것이다. 그것은 연약함이나 질병은 죄와는 다르지 않을까? 이에 대해 칼빈은 연약함이 죄임을 밝힌다. 그는 육욕연약으로 취급하는 어거스틴에 반대하면서 그것을 죄라고 규정한다. 칼빈은 연약함과 관련하여, “우리는 우리 안에 이런 종류의 욕망이 생기게 하는 부패성 바로 그 자체를 라고 부른다.”이런 점에서 연약함에 대한 치유가 곧 죄에 대한 회개의 개념으로 환치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각인과 뿌리와 체질을 바꾸는 ‘3오늘 집중이야말로 참된 회개의 삶을 이루는 과정이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치유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묵상’, ‘정시기도’, ‘무시기도’, ‘집중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3오늘 실천이 얼마나 회개의 삶을 이루어가는 중요한 메커니즘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e. 회개의 열매로서의 서밋3오늘

 

이제 살펴보아야 할 것은 회개의 열매로서의 서밋의 삶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치유가 되면 서밋이 된다. ‘서밋은 세 가지로 나타나는데 영적 서밋’, ‘기능 서밋’, ’문화 서밋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독립적이지 않고 상호 긴밀한 관계 속에 있으며 가장 근본적인 것은 영적 서밋이다. ’영적 서밋이 될 때 기능 서밋문화 서밋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적 서밋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아무도 줄 수 없는 것이다. ‘영적 서밋은 영적인 탑(top)에 오르는 것이다.

 

그 영적 서밋에 오르는 방법은 집중이다. “기도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다보면 어느 날 24

시가 된다.”이 때 영적인 힘이 생겨나는데, “영적인 힘 있으면 세상 것을 걱정할 것 없다.

영적 문제로 고통당하고 있는 세상에 답을 줄 수 있다면 아무 것도 문제가 안 되기 때

문이다. 그래서 류 목사는 어두운 흑암 세상을 막을 수 있는 건 빛 밖에 없다고 진단하

면서 영적인 힘 있으면 영적인 흑암 세력은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영적

서밋은 개인이 참된 회개에 이를 때 영적 서밋이 되어 현장에 답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회개

는 개인적 차원에 국한 되지 않고 공적 차원,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락방 전도운동의 두드러진 특징은 개인 변화를 통해 온 세계를 살리는 것이다. 영적인 것으

로 세상 문화를 살리는 것이다. 회개 역시 개인에서 시작되지만 열매는 온 세계로 향한다.

영적인 변화에서 시작하지만 세상을 살리는 것으로 열매가 나타난다. 이것이야말로 다락방 전

도운동이 갖는 메시지와 사역의 역동적인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영적 서밋기능 서밋문화 서밋으로 연결되어 나타난다. 영적인 힘을 얻을 때 기능에도 증거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요한 사도도 영혼의 잘 됨이 범사로 나타나고 육신적인 건강까지도 그 효력이 확장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그 업에 집중을 통해(오직), 유일성의 응답(유일성)이 나타나게 되며, 그것은 현장을 변화시키는 결과(재창조)로 나타난다. 이것을 기능 서밋이라고 말한다. ‘영적 서밋이 될 때 사업, 학업이 오직, 유일성, 재창조가 나온다. 이런 응답이 온다. 이것을 기능 서밋이라고 한다.”왜 이러한 서밋으로 세우는 것인가? 류목사는 두 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 “복음이 없어진 시대, 둘째, “우상숭배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를 살리기 위해 서밋으로 부르시고 세우셔서 사용하실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끝으로 영적 서밋기능 서밋은 궁극적으로 문화 서밋으로 향하게 된다. 서밋은 개인, 시대를 넘어 문화 전체를 치유하고 살린다는 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세계복음화를 위한 마지막 단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왜 문화인가라고 류목사는 묻는다. 그것은 사탄이 문화를 파고들어 세상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류목사에 따르면 이 사탄은 문화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문화를 장악하기 시작했는데 애굽에 피라미드다.... 전 세계를 장악하고 피라미드 만드는데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을 했다....사탄에 대해서 모르면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블레셋의 다곤 신전이다. 바알 신, ...느부갓네살이 만든 엄청난 신상, 로마의 쥬피트.... 그리고 전 세계 박물관, 사원, 템플 같은 것들이다. 굉장히 문화를 만들어서 몰고 가고 있다.... 프리메이슨은 곳곳에 회당을 만들고 있다. 이런 식으로 문화를 끌고 가는 것이다.”이런 시대에 영적 서밋과 기능 서밋이 된 신자들은 문화를 치유하고 살리는 문화 서밋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이는 복음 앞에 사탄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탄은 그리스도 앞에는 꼼짝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가진 여러분을 사용하실 것이다....그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게 아니라 무릎 꿇게 만들어 버린다. 사탄과 싸우는 게 아니다. 무릎 꿇게 만드는 것이다.”이러한 서밋의 응답은 아무도 줄 수 없는 것’(영적 서밋)이며,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것’(기능 서밋)이고, ‘절대로 실패되지 않는 것’(문화 서밋)으로 요약된다.

지금까지 회개의 열매로서의 서밋에 대해 살펴보았다. 다락방 전도운동에서 말하는 회개는 앞서 말했듯이, 마음의 변화와 삶의 변화로서의 회개는 한 개인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 문화적 차원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이러한 회개의 삶은 하나님의 소원인 세계복음화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특별히 선교적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3. 다락방 전도신학적회개론 구상: 개혁주의 회개론의 연속과 확장

1)연속성

 

(1)성경적 회개론: 마음의 변화, 생활의 변화로서의 각인-뿌리-체질바꾸는 ‘21가지 삶

 

다락방 전도운동에서 논했던 회개론은 성경에 나오는 회개의 본질에 충실함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회개라는 단어의 의미는 마음의 변화생활의 변화로 요약된다.전자와 관련하여 다락방 전도신학에서 논하는 회개는 각인, 뿌리, 체질의 변화를 강조함으로써 구원 이후의 삶에서 변화, 영적인 근본적인 돌이킴, 곧 내면의 변화로서의 회개를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특별히 ‘62가지 전도자의 삶을 통해서, 특히 ‘21가지 전도자의 삶을 통해서 복음으로 각인하고, 말씀으로 뿌리내리고, 성령으로 체질되도록함으로써 근본적인 치유와 변화를 가능케 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후자와 관련하여서도 ‘62가지 전도자의 삶은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이행해 가게끔 한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곧 복음이 각인되고, 말씀의 뿌리가 내려지고, 성령의 체질이 됨으로써 서밋(‘영적 서밋’, ‘기능 서밋’, ‘문화 서밋’)에 이르게 된다. 이런 점에서 다락방 전도운동에서는 회개로서의 삶의 변화를 실천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회개론을 보여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다락방 전도신학에서 논하는 회개 이해는 마음의 변화생활의 변화를 그 핵심 의미로 갖는 성경적 회개 개념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개혁주의 회개이해의 수용

다락방 전도 신학에서의 회개론은 또한 개혁주의 신학전통의 회개 이해에 충분하고 완전하게 수렴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락방 전도신학에서 논하는 회개는 개혁주의 신학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 전통과의 일관성은 회개에 대한 몇 가지 측면에서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다. a. 이를테면 다락방 전도신학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나타난, 특히 소요리 문답서에 나타난 생명에 이르게 하는 회개라는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그 개념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있음은 앞서 밝힌 바 있다. b.이러한 수용은 단지 회개론에 국한되어 나타나지 않으며 개혁주의 신학 전통을 드러내주는 ‘TULIP’을 자주 강조하는 것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c. 개혁주의 신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 주권 신앙 역시 다락방 기본 교리를 구성하고 있는 ‘10가지 신앙발판에서 제 1항목으로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고 있는 점 역시 다락방 전도운동에 나타나는 전도신학이 개혁주의 전통과 긴밀한 연속성 속에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자기를 부정하고 새 사람을 입는 것: ‘3오늘실천

 

회개는 평생 힘써야 할 신앙의 덕목임을 칼빈은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죄의 세력은 힘을 잃었으나 우리 내부에는 언제든지 죄가 남아 있어서 영적 싸움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다락방 전도신학 회개론에서는 그 부분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갖고 있다. 그래서 구원 이후의 신앙생활은 치유과정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나 중심, 사탄 중심, 물질 중심의 잘못된 각인, 뿌리, 체질을, 그리스도 중심, 하나님 나라 중심, 성령 충만 중심의 새로운 각인, 뿌리, 체질로 바꾸어 가야할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 바, 칼빈이 말하는 회개의 참 의미인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에 가장 적확하게 부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락방 전도운동에서 보여주는 회개론은 우리 영혼 속에서 성부(말씀), 성자(복음), 성령으로 각인되고, 뿌리내리고, 체질이 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4)항상 힘써야 할 신앙의 덕목으로서의 회개

 

칼빈을 비롯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회개를 항상 힘써야 한다고 강조한다.회개는 구원의 서정에서 하나의 요소로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는 핵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회개가 날마다 이루어져야 할 근본적 이유가 있는데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들에게도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어서 언제든지 범죄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개는 육신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영적 싸움이기도 한 것이다.다락방 전도운동에 나타난 회개론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뜻을 따라 살기 위한 방법으로 ‘62가지 전도자의 삶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62가지 삶은 방법이라기보다는 매일 힘써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 원리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락방 전도운동에서 ‘62가지 삶은 구원받은 신자가 평생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내용들이다. 이렇듯 다락방 전도 운동에서 논하는 회개론은 평생 회개를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칼빈 및 개혁주의 신학의 회개론과 연속성을 지니고 있음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2)회개론의 새로운 지평: 회개한 자(서밋)의 삶으로서의 복음전파(전도, 선교)

 

개혁주의 신학에서 회개론에 대한 이해는 내면(마음)의 변화와 삶의 변화를 강조한다.스탠리 그렌츠는 회개론을 논하면서 회심의 세 측면을 제시한다. 회심의 개인적 측면, 신적 측면, 그리고 공동체적 측면에 대해 논한다.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세 번째 공동체적 측면이다. 개인적 측면과 신적 측면은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서 계속 강조되어 왔으므로 여기서는 별도로 다루지 않는다. 스탠리 그렌츠에 따르면 회심은 공동체적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회심은 독자적이지 않다. 회심은 결코 고립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오히려 신앙 공동체는 개인의 회개와 믿음을 위한 맥락으로서 기여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회심에 있어서 공동체의 두 가지 역할에 대해 말한다. ‘복음의 선포새로운 공동체로의 통합이 그것이다. 필자는 그 중 복음의 선포에 대한 그의 논의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신앙공동체의 중요한 역할의 한 분명한 차원은 복음 선포에 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에 대한 우리의 개인적인 응답은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알리는 신앙 공동체라는 맥락 속에서 일어난다.”따라서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이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 속해 있다는 개념은 성경 속에 함축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스탠리 그렌츠는 특별하게도 회개와 복음전파를 긴밀하게 연결시켜 논하고 있다. 그는 안디옥 교회에서 사도들을 파송하는 장면을 두고 이 사건은 우리에게 믿는 자들의 집단이 좋은 소식을 복음화 되지 않은 지역으로 실어 나를 자들을 격려하고 헌신시키고 위임하며 지원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고 해석한다.

다락방 전도운동에서 제시되고 있는 전도회개론은 전도 선교로 그 지평이 확대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다락방의 전도신학적 회개론은 개혁주의 신학 전통의 회개론의 지평을 세계복음화라는 영역으로 확대해주고 있으며 회개가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할 때, 결국 그 뜻의 지향점은 현장과 시대를 살리는 전도와 선교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판단된다. 처음부터 다락방 전도운동에서의 전도회개론은 전도자의 삶이라는 개념으로 재해석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다락방 전도운동에 나타나는 회개론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도자의 삶이요, 곧 참된 회개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전도자의 삶은 한 개인이 죄를 버리고(각인을 바꿈)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치유와 서밋)으로 나타난다. 이는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는 신학자들의 회개 이해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스프룰은 회개에 대해 회개는 우리가 즉시 죄에서 완전함으로 도약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회개한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다만 그 회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현장화 해서 전도화, 선교화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회개의 삶 곧 전도자의 삶은 한 개인의 치유를 통해 교회와 현장과 세상을 치유하고 살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구원론의 한 구성 요소를 이루는 회개론은 구원론의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구원은 하나의 순간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의 서정속에 나타나는 구원의 여러 국면들을 고려할 때 구원 국면의 점진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말해야 할 것같다. 이를테면 부르심, 중생, 믿음(회심), 칭의, 양자됨, 성화, 성도의 견인, 영화라는 발전적 단계들이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때 칭의와 함께 하나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구원 이후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구원론에 대한 완전한 무지에서 기인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의 서정은 구원의 국면이 칭의, 양자됨 뿐 아니라, 성화와 더 나아가 영화이라는 국면에 이르기까지의 평생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삶에서 방종에 흐르거나, 구원받았으니 율법은 폐기되었다는 식의 태도는 개혁주의신학도 아니요, 정상적인 신학궤도에서 일탈한 퇴행적인 태도일 뿐인 것이다. 율법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삶의 규범으로 여전히 살아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전도 회개론에서 방금 언급한 점을 주의한다면, 다락전도 운동 속에 나타난 전도회개론은 개혁주의 신학전통에 나타나는 영적 변화와 인격적 변화로서의 회개론의 그 진정한 의미를 찾아주는 것이요, 그 회개를 통해 일어날 변화를 사회적 문화적 차원으로 확대함으로써 회개론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다고 하겠다. 회개가 이렇게 전도와 선교로 이어짐으로써 감소하는 교회를 살리고 현장의 재앙을 막으며 개인을 살리는 중요한 요소로 정립될 수 있다면, 다락방 전도운동에 나타난 전도회개론은 한국 교회를 치유하고 살리는 교회론적의의도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오는 말

 

1. 요약

 

필자는 지금까지 다락방 전도운동에도 회개가 존재하는지를 묻고 그 대답을 시도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점들을 확인하였다.

필자는 다락방 전도운동에서 회개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특히 다락방 전도운동은 성경의 회개 개념에 근거를 두며, 그 회개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회개론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논구했다.

 

다락방 전도운동에 나타난 전도신학적회개론은 별도의 특별한 회개론을 만들어내거나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의 회개론을 대부분 수용하며, 그 참된 의미를 공유하고 따르고 있음도 살펴보았다. 이런 점에서 다락방 전도운동은 개혁주의 전통 정신을 그대로 구현하며 그 내요을 실제로 풍성하게 적용하고 새롭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락방 전도운동에서 논하는 회개론은 개혁주의 전통을 수용할 뿐 아니라, 그 깊이를 더하고 구체성을 더해준다는 점고 밝혔다. 회개를 치유의 과정과 서밋의 과정으로 이해함으로써 마음의 변화로서, 생활의 변화로서의 회개를 현장으로 확장시켜 구체적으로 구현한다는 점을 밝혔다.

 

다락방 전도 운동에 나타난 회개론은 최종적으로 세계복음화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회개의 선교적 차원을 보여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개혁주의 전통의 회개론을 보다 현장으로 확대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개인화 내지는 죄에 대한 슬픔을 강조한 로마 카톨릭적 영향을 완전히 떨쳐내고 건강한 회개론을 회복시키고 있음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다락방 전도운동에서 전도자의 삶 62가지는 회개론을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된다는 점이 각별하다. 이러한 다락방 전도운동에 나타난 회개 이해는 매우 건전하며 전통적인 신학에서 추구하는 본질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회개론을 선교적 차원으로 확대함으로써 회개론의 지평을 넓혀줄 수 있음도 보여주었다.

 

현 시대는 교회 위기의 시대다. 교회가 감소하고 문들 닫으며 유럽은 교회가 소멸되다시피 하고 한국 교회도 현저히 쇠퇴하는 시대에, 전도적, 선교적 회개론을 제시하는 다락방 전도신학적 회개론은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를 회복하고 살리기 위한 중대한 토대를 제공할 수 있는 단초를 보여주고 있음도 확인하였다.

 

 

2. 평가와 전망

 

다락방 전도신학은 아직 미완의 신학이요,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또한 다락방전도운동에서 나타나는 성경적 전도에 기반을 둔 전도신학적회개론은 이제 첫 걸음을 뗐을 뿐이다. 더욱 세밀하고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하며, 이것을 위해 지금까지 제시된 메시지들을 신학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과 여러 각도에서 더욱 깊은 연구하는 일은 미래의 과제로 남겨둔다. 다락방 전도운동에 나타난 전도신학적회개론이 개혁주의 신학 전통을 구현하고 보완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성경적 전도에 그 기반을 두고 있는 전도신학은 한국교회와 신학에 기여할 수 있다는 작은 기대를 하게 된다. 모쪼록 회개론 뿐 아니라 구원론, 그리고 더 나아가 신학 전반에 걸친 더 많은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연구됨으로써 한국교회와 복음전하는 현장에 실질적인 유익을 제공할 수 있는 전도신학이 그 면모를 드러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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