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윌리엄 캐리 (William Carey, 1761-1834)
윌리엄 캐리는 현대 선교의 지평을 연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보잘것없는 배경을 뚫고 하나님의 언약을 인도 땅에 심은 그의 생애는 237나라 5천종족 복음화 언약을 품은 전도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윌리엄 캐리는 1761년 영국 노샘프턴셔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구두 수선공을 직업으로 했습니다. 그는 구두를 수선하면서 책상을 옆에 두고 독학으로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를 마스터할 정도로 언어적 천재 달란트를 가진자 였습니다. 그는 신실한 신앙인으로 세계 지도를 벽에 붙여놓고 기도하던 중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엄중한 천명을 받고 위대한 선택과 결단을 실천한 분입니다.
세상은 그를 ‘구두 수선공’이라 부르며 비웃었습니다. 정규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가난한 청년이 대영제국의 심장부에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외쳤을 때, 당대 교계의 거물들은 그를 향해 “젊은이, 앉게나. 하나님이 이방인을 개종시키고자 하신다면 자네나 우리 도움 없이도 하실 걸세”라며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이 버려둔 자리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은 ‘렘넌트’였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결단: 안락한 안주를 떠나 '천명' 선택
윌리엄 캐리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한 첫 번째 선택은 ‘보장된 미래를 버린 결단’이었습니다. 그는 구두 수선공으로 일하며 지도에 세계 지도를 그려 넣고 기도하던 중,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인도를 향한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그는 1792년 침례교 선교회(BMS)를 창설하고, 이듬해 인도 선교사로 자원했습니다. 당시 영국 교회는 "하나님이 이방인을 개종시키려 하신다면 자네 같은 사람 없이도 하실 걸세"라며 비웃었습니다. 아내 도로시는 인도로 떠나기를 거부하다 마지막 순간에야 합류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지리적 이동이 아닌,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전환한 렘넌트의 결단이었습니다.
가족의 반대와 경제적 무능력이라는 현실적인 벽 앞에서도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는 불후의 명언을 남기며 인도행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두 번째 선택: 시련의 연속에서 다시 든 ‘펜’
윌리엄 캐리는 1793년 인도 뱅갈 지역에 도착했으나 영국 동인도 회사의 방해로 선교 허가를 받지 못해 쪽(Indigo) 공장의 감독관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그 와중에 5살 난 아들 피터가 이질로 사망하자 이 충격으로 아내 도로시는 정신병을 얻어 13년 동안 비명을 지르며 남편을 비난하다 세상을 떠나는 등 시련을 겪었습니다. 캐리는 그와중에서도 인도 뱅갈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처절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812년, 평생을 바쳐 번역한 성경 원고와 사전들이 인쇄소 화재로 모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사역의 종말이자 ‘실패’였습니다. 하지만 캐리는 그 잿더미 앞에서 눈물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를 원하신다. 이전보다 더 완벽하게 번역하라는 뜻이다.” 그는 절망을 선택하는 대신 ‘절대 주권’을 선택했습니다. 이 결단은 결국 인도 40여 개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세 번째 헌신: 생명을 위해 관습과 맞선 ‘용기’
인도 선교 초기였던 1799년, 윌리엄 캐리는 마을 근처에서 남편의 장례식 불길 속에 살아있는 여인을 밀어 넣는 장면을 처음으로 목격했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말리며 울부짖었으나, 종교적 관습이라는 벽에 부딪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처참한 경험은 그가 평생 '사티 폐지'를 위해 싸우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증거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1803년 한 해 동안 캘커타 인근 50km 이내에서만 438명의 과부가 불타 죽었다는 사실을 기록하여 영국 정부에 보고했습니다. 힌두교 지도자들이 "경전에 근거한 의무"라고 주장하자, 캐리는 직접 산스크리트어와 힌두교 경전(베다)을 수개월간 깊이 연구했습니다. 그는 결국 경전 어디에도 사티가 강제적인 의무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내어 종교적 정당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캐리는 인도의 지성인인 라자 람 모한 로이(Raja Ram Mohan Roy) 등 현지 개혁가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는 잡지 '인도의 친구'를 통해 사티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글을 끊임없이 발표하며 인도는 물론 영국 본토의 여론을 움직였습니다. 끈질긴 투쟁 끝에 1829년 12월 4일, 인도 총독 윌리엄 벤팅크(Lord William Bentinck)는 마침내 사티 금지령을 선포했습니다. 당시 정부의 공식 번역관이었던 캐리는 주일 아침에 이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는 평생 지켜온 주일 설교 준비를 다른 동료에게 맡기고, "매분 매초가 여인들의 생명이 걸린 일이다"라며 즉시 번역에 매진하여 그날 저녁까지 벵골어 번역본을 완성했습니다.
이 밖에도 영아 살해 방지, 노예 제도 반대 운동을 펼치며 벵골어 성경 완역을 포함해 40여 개의 인도 언어로 성경을 번역·출판했습니다.
그는 1834년 73세의 나이로 인도 땅에서 소천했습니다.
맺음말: 남겨진 자의 발자취
윌리엄 캐리의 일생은 화려한 성공 신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다가오는 절망의 유혹 속에서 매 순간 ‘하나님의 언약’을 선택해 나간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결단의 연속이었습니다. 세상은 그를 하잘것없는 존재로 여겼지만, 하나님은 그를 인도 선교의 모퉁잇돌로 감추어 두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각자의 현장에서 윌리엄 캐리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서는 결단, 그 위대한 시도가 이 시대를 살릴 또 다른 렘넌트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윤광식 기자(kidokilbo@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