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대학원 교수회에 맡겨 1년간 연구한 ‘영상예배에 대한 신학적인 바른 규정 청원 건’은 “영상예배는 코로나 19 사태 속에서 한시적으로 사용해야 하되, 방역 수칙의 범위 안에서 최대한 개인보다는 소그룹(가정) 단위로 예배에 합당한 복장과 자세를 갖추어 공회로 모여 드리게 해야 하며, 한시적 차원의 영상 예배가 공회로 모인 공예배를 대체하는 예배형태로 자리 잡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신학위원회와 고려신학대학원교수회의 보고대로(‘영상예배에 대한 신학적인 바른규정 청원’에 대한 연구보고서, 보고서 184~188쪽) 받기로 가결하다.”
※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의 ‘영상예배에 대한 신학적인 바른 규정 청원’에 대한 연구 보고서가 고신총회 제71회 총회(2021년 9월 28일~30일)에서 가결되었다.
[다음은 연구보고서 전문]
‘영상예배에 대한 신학적인 바른 규정 청원’에 대한 연구 보고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1. 서론
이 글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과 ‘그로 인해 지속적으로 영상예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아 ‘과연 영상예배가 합당한지’의 문제와 관련된 신학적인 진단을 요청한 한 노회의 질의에 대한 답변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온라인 예배를 급속하게 현실화시켜 놓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그 이전부터 있어 왔다. 2010년도 이후 북미에서 온라인 교회와 온라인 예배 논쟁이 촉발되었다. 예일 대학에서 예배학을 가르치는 테레사 베르거(Teresa Berger)를 중심으로 ‘공간적 동시성’을 ‘시간적 동시성’으로 대체할 수는 없는가에 대한 신학적 논쟁들이 진행되어왔다.
이 논쟁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한국교회에도 큰 반향을 불러왔고, 비단 신학자들뿐 아니라, 목회자, 성도들에게도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강력한 전염력으로 인해 회집의 어려움이 가중됨에 따라 개교회들은 비상 상황 속에서 예배를 이어가기 위해 부득이하게 영상을 통해 예배 장면을 송출해 왔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1년 반 정도 지속하다 보니 영상예배로 말미암아 ‘주일 성수’와 ‘공적 모임’, ‘공동체성’에 대한 성도들의 인식들이 변화하고 있다는 통계가 보고되고 있고, 이런 현상이 본 교단뿐 아니라 한국교회에 큰 도전이 되고 있다. 과연 영상예배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현재의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뿐만 아니라, 코로나 19 사태 이후에도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인가?
2. 본론
영상예배의 문제를 다루려고 하면 우리는 먼저 간략하게나마 영상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영상은 많은 유용성을 가지고 있는 매체이다. 우리는 영상을 통해 문서를 읽는 것보다 짧은 시간에 훨씬 더 많은 양의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나아가서 시각과 청각의 감각을 종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관심 있는 정보 세계에 즉각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순간에 전체의 정보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도 확실히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영상 문화의 유익을 거부하는 것은 이제는 불가능해 보인다.
코로나19 사태와 상관없이 현대 교회의 예배 속에도 영상은 이미 일상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이 때문에 우리가 다루어야 할 문제는 코로나19 사태 속에서의 한정적인 현상에만 국한되지 않고, 예배 속에서의 영상 사용에 관한 더 일반적인 논의와 직결된다.
현대인들은 영상 문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1)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손에 들린 영상 기기를 통하여 끊임없이 영상들을 접하면서 매일의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듣는 것보다 보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다. 이런 현상은 카메라와 영화와 TV와 스마트폰 같은 영상 매체의 보급을 통해 일반화되었지만, 이런 방향으로의 흐름은 이미 오래전에 예고된 바 있다.
1) 리처드 호웰스, 호아킴 네그레이로스, 『시각문화』, 조경희 역(부산: 경성대학교 출판부, 2014) 참조.
근대 철학의 문을 연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방법서설’의 확장판인 ‘방법서설, 광학, 기하학, 기상학’이라는 책에서 눈의 시각이 모든 신체 감각들 중에서 “가장 종합적이고 또한 가장 고상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2) 보는 것을 통하여 ‘확실한 지식’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데카르트의 시각에 대한 관심은 이후 서구 사회의 철학과 과학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마틴 제이(Martin Jay)는 그의 책 ‘눈의 폄하’(Downcast Eyes)에서 이를 ‘시각중심주의(ocularcentrism)의 장악’이라 부른다.3)
2) René Descartes, Discourse on Method, Optics, Geometry, and Meteorology (Cambridge: Hackett Publishing, 2001), 65.
3) Martin Jay, Downcast Eyes: The Denigration of Vision in Twentieth-Century French Thought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69. (한역, 『눈의 폄하』, 서광사).
데카르트나 마틴 제이가 지적한 것처럼 영상은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크다. 영상을 통해 전달되는 내용은 청중에게 생생한 경험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오래 기억에 남게 한다. 이것이 좋은 방향으로 작용할 때는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줄 수 있지만, 적절하게 잘 통제되지 않거나 남용될 때는 때로 나쁜 방향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사람들은 보는 대로 믿는 경향이 있기에 영상은 쉽게 사람들을 오도할 수도 있다.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시각적 이미지도 사실은 문화적 산물이며 그 배후에 많은 편향된 관점들을 담고 있을 수 있다.4)
4) 이와 관련해서는 마리우스 리멜레, 베른트 슈티글러, 『보는 눈의 여덟 가지 얼굴』, 문화학연구회 역(파주: 글항아리, 2015) 참조.
또 영상은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만들 수 있으며, 특히 예배의 자리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시청자의 자리에 머무르게 할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자크 엘륄(Jacques Ellul)은 ‘말의 굴욕’(The Humiliation of the Word)이라는 책에서 시각 이미지가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에 대해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5)
5) Jacques Ellul, The Humiliation of the Word (Grand Rapids: Eerdmans, 1985). (한역, 『말의 굴욕』, 대장간).
엘륄의 입장은 다소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이런 반대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귀를 잘 기울일 필요가 있다. 보다 균형 잡힌 입장에서 앤터니 티슬턴(Anthony C. Thiselton)은 그림이나 시각적 이미지의 양면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한다.
그림과 예시, 유비 등은 말만 가지고는 효과가 떨어지는 곳에서 생생함과 힘을 수반한 효력을 발휘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림과 이미지에 자유로운 독자적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너무 지나친 과신을 두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보다 수동적이고 취약한 청중 속에서 … 그림이나 이미지가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사용될 때는 그림이 교회에 의도치 않은 큰 해나 상처를 입힐 수 있다.6)
6) A. C. Thiselton, The Power of Pictures in Christian Thought: The Use and Abuse of Images in the Bible and Theology (London: SPCK, 2018), 223.
티슬턴이 지적한 것처럼 예배에서 영상 매체를 사용하는 일을 피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효과를 조심스럽게 늘 점검하고, 지나치게 거기에 의존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지금과 같은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교회가 불가피하게 영상예배를 사용하더라도 아래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영상예배와 관련된 보다 성경적이고, 신학적이며, 실천적인 문제점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1) 예배는 말씀이 육신(incarnation)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공동체의 사랑을 예전을 통해 드러내는 일이다(embodiment). 예배(예전)를 가리키는 레이투르기아(leitourgia)는 70인역(LXX)에 그 어원적 유래를 가진다. 레이투르기아는 라오스(백성)와 에르곤(일)의 합성어이다. 즉 백성의 일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기본적으로 공적인 차원을 기초로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불러주시고, 그의 백성인 성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랑에 반응한다(롬 1:7, 8:28; 엡 5:2; 벧전 1:15; 벧후 1:10).
그리고 삼위 하나님과의 만남(encounter)과 교제(fellowship)가 예배의 자리에서 일어난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약속하신 주님의 약속(마 18:20)은 우리에게 공적 예배의 필요성과 교회로 모여야 할 이유와 동기를 제공한다. 영상예배는 이런 깊은 신학적 의미를 담아내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매체이다. 영상예배에서는 예배의 다양한 요소들과 순서들이 약화하거나 위축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영상예배가 설교를 중심으로 송출되고 있으며, 이것마저도 설교자와 청중 간의 인격적 교제의 결여로 인해 온전한 의미를 전달하는 데 한계를 가진다. 무엇보다 예배의 공적(public) 의미가 퇴색되는 반면 개인의 종교 행위로 예배가 변질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영상예배는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비상 상황에서 하나의 응급처방으로 활용될 수 있으나, 이것이 새로운 정상(new normal)이나 대안으로 자리 잡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장기화하면 예배의 공적 차원과 공동체적 차원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2) 교회의 공적 예배는 함께 참여한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고전 12:27; 엡 5:30)임을 나타내는 가시적 표현이다. 함께 예배의 자리에 모여 함께 찬송하며, 기도하며, 말씀을 들으며, 성찬을 나누며 교제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한 백성이요, 한 몸임을 깨닫고 확인하게 된다(행 2:42; 고전 10:16; 엡 5:19, 6:18; 골 3:16).
영상예배는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는(manifestation) 것으로서의 함께 모인 교회의 개념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함께 모이지 못하는 현금의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 의식이 심각하게 와해하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다.
동시에 공적 예배는 신앙공동체를 형성시키고, 성도들의 신앙을 자라게 하는 방편이다. 함께 모이면서 그 회중은 신앙의 공동체로 만들어져간다. 그리고 공적인 모임 속에서 신앙이 형성되고 성숙한다. 영상예배는 교회의 가시성을 드러내는 면에서나, 성도들의 공동체성을 형성시키는 면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가진다.
3) 영상예배는 성도들에게 소비자 중심적인 예배 성향을 지니게 만든다. 코로나19 상황이 지속하는 동안 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속한 교회의 영상예배를 통해 예배드리기보다는 자신이 선호하는 설교자, 찬양 팀 등을 찾아 인터넷 공간을 헤매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성도들은 매주 인터넷 화면을 통해 자신이 속한 교회와 타 교회를 ‘비교’하며 자신의 취향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콘텐츠를 찾아 헤매고 있다.
이런 행위가 반복될 때, 성도들은 ‘예배 소비자’로 전락할 위험성이 높아지며, 나아가 자신을 예배 판단자의 위치에 세우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한국교회 전체를 두고 보면 이런 현상이 코로나19 상황 이후에 성도들의 수평 이동을 더 심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4) 예배는 설교 외에도 다양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요소들은 각기 중요한 의미들을 지닌다.
예를 들면 봉헌은 교회의 재정을 위해 물질을 바치는 차원만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반응하는 행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자신의 전인을 물질이라는 표징에 담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가시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영상예배 속에서 이런 예배의 요소들이 위축되거나 생략되면서 성도들이 헌금을 성금처럼 인식하는 경우도 생겨남을 볼 수 있다. 영상예배는 예배의 전체적인 구조 속에서의 각 순서의 의미를 온전히 살리지 못하고, 성도들에게 설교를 들으면 예배를 다 드린 것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가능성이 있다.
5) 이런 문제점들을 고려할 때, 교회들은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한시적으로 영상예배의 형식을 취하거나 병행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예배의 본래적 의미를 퇴색시키지 말고 최대한 잘 유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코로나19 상황 이후에도 예배 속에서의 영상의 질서 있는 사용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자세를 견지할 것을 제시한다.
첫째, 공예배의 중요성을 최대한 강조해야 한다. 코로나19 사태의 발발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교회의 모임에 대한 응집력이 약해져 감을 느끼게 된다. 마지막 때가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모이기를 폐하거나 가볍게 여기게 될 것인데(히 10:25), 코로나19 사태가 지속하는 동안 우리는 이 같은 현상이 심화하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다.
처음에는 불가피성 때문에 그랬다고 하지만 이제는 이것이 하나의 새로운 습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매우 크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교회의 심장 박동과도 같은 공예배를 더욱 강조하고, 그 정신을 잘 지키며 강화할 때 교회의 생명력이 회복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둘째, 코로나19 사태 이후에는 한시적 조치인 영상예배를 없애거나 극히 제한된 상황 속에서 최소한으로만 활용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요양원이나 병원에 입원해 있기에 교회의 공적 예배에 부득이하게 참석할 수 없는 분들을 위해 영상예배를 사용하거나, 전도의 목적으로 교회를 소개하기 위해 영상예배를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해당하지 않는 일반 성도들의 경우에는 주일 성수와 예배 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영상예배를 제한해야 할 것이다.
3. 결론
영상예배는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감염병을 예방하고 교회의 사회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택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온 회중이 다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영상 매체를 통하여 함께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영상예배로 인해 나타난 여러 문제점이 하나씩 포착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성도들에게 공예배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여 가르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코로나19 사태가 극복되기까지 한시적 차원에서 영상예배를 사용하되, 방역수칙을 위반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개인보다는 소그룹이나 가정 단위로 모여서 예배드리게 해야 한다. 또 예배에 합당한 복장과 자세를 갖추어 공회로 모여 예배드리고 같은 정신으로 예배드리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한시적 차원의 영상예배가 공회로 모인 공예배를 대체하는 예배 형태로 자리 잡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전인적이며 공동체적 만남이다. 소위 ‘영상예배’의 습관화로 인해 성도들이 예배자가 아닌 시청자로 자리매김하지 않도록 지도해야 한다.
예배 공동체로 모이기를 즐겨 하기보다 예배 소비자가 되고, 예배를 개인적 행위로 인식하게 될 위험성을 강력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예배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예배는 하나님 백성의 최우선의 일이며, 최고의 복인 만큼, 우리는 온전한 예배의 회복을 간절히 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