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異端)은 해마다 열리는 각 교단 총회 논의의 단골메뉴이다. 올 해도 두 교단 총회들이 특정인을 이단으로 정죄하거나 특정 그룹의 이단성 여부를 연구하기로 했다. 대상은 대부분 자기 교단 구성원이 아니라 타 교단의 신자이거나 초교파적 활동 단체이다.
‘이단’이라는 주제는 언제나 교회의 뜨거운 감자이다. 교회는 이단판별, 이단정죄라는 엄중한 과제를 지니고 있다. 교회의 복음 변증적 사명은 단호한 태도로 진행됨이 마땅하다.
이단정죄는 그 단호성 때문에 믿음의 형제들에게조차 억울한 피해를 줄 수 있다. 교회사는 기득권을 가진 교회 집단의 편견과 오판이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구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끔찍한 피해를 주었음을 말해 준다.
교회는 정통신앙인들을 이단자로 정죄해 왔다. 피해를 입은 대표적인 인물들은 아타나시우스, 피터 왈도,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마르틴 루터, 존 칼빈, 토마스 크랜머 등이다. 미국의 그레이스앰 메이첸과 한국의 주기철도 ‘위대한 이단자들’이었다.
교파주의 체제 하의 이단정죄는 더욱 위태롭다. 이단심문이 교회권력을 선점한 집단의 ‘갑질’인 경우도 있다. 갑(甲) 교단이 이단자라고 규정한 자를 을(乙) 교단은 이단자가 아니라고 판단하기도 한다. 교회의 이단 판별의 동기와 기준이 같지 않다.
예장 통합의 모 총회장은 2016년에 그 교회가 그 전에 이단자로 정죄한 4명에 대한 사면을 선언힌 적이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해벌을 선언했다가 여론의 비판이 빗발치자 이를 취소했다.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언한 이단정죄를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벌, 취소했다. 그러나 여론의 압력을 받아 취소한 것을 또 다시 취소했다.
신성모독적인 해프닝은 이단정죄의 과업을 수행하는 교회의 권위를 추락시킨다. 교회의 ‘이단정죄 무용론’을 조장한다. 이단정죄가 오늘날에도 부당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교회사학회와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는 ‘이단’을 주제로 2014년에 공동학회로 모인 적이 있다. 신학자들은 ‘이단’이라는 주제의 10개의 학술논문을 발표했다. 나는 “중세교회의 이단정죄: 자기당착-적반하장”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날 내가 목격하고 확인한 것은 진보계와 복음주의계 신학자들 모두의 이단 혐의자들에 대한 관용적 태도이다. 정치적으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이단판별, 이단정죄에 냉소적이었다. 이날 논문을 발표한 장신대의 모 교수는 신약성경 안에도 여러 형태의 기독교 분파들과 이른바 이단들이 있었음을 강조했다.
신학자들은 인간 인식의 한계를 진지하게 고려한다. 신학과 성경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서로 차이와 이해를 중요하게 여긴다. 겸손한 학문적 태도를 유지한다. 교회의 부주의한 이단정죄를 경멸한다. 진리성 중심이 아닌 정치적인 동기의 이단판별을 멀리한다. 조심성이 결여된 ‘이단감별사들’의 활동을 경계한다.
이듬해 나는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에서 “존 웨슬리의 이단 관용정신”(2015)이라는 학술논문을 발표했다. 이 학회에서 참석한 신학자들도 교회 안팎에서 부주의하게 이루어지는 이단정죄의 경향을 걱정했다. 통제력을 잃은 ‘이단감별사들’의 활동을 질타했다.
이 신학자들의 이단에 대한 관용정신과 태도는 나에게 다섯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첫째, 이단에 대한 엄중하고 공정한 판별기준의 필요성이다. 무엇이 정통이며, 어째서 이단인가를 판별하는 명확한 측정 기준이다.
둘째, 이단판별의 주제에 대한 확고한 이해이다. 어느 교회가 무엇을 근거로 자기 그룹에 속하지 않은 자들, 타 교단에 속한 신도를 이단자라고 판별, 정죄할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셋째, 억울하게 이단 누명을 쓰고 있는 ‘이단’ 그룹이나 ‘이단자’는 한국교회 안팎에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구원받는 이단자들’을 정죄한 교회의 반성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넷째, ‘신학자 공의회’(Council of Theologians) 같은 범 교단적인 이단판별 기구의 필요성이다. 학문성과 통합성을 지닌 전문 학자들로 구성된 공의회가 있으면 교회의 이단판별의 신뢰도를 증대시킬 수 있다.
다섯째, 오판이라고 드러난 경우에는 이단정죄를 한 교회가 피해자 또는 피해 집단에 보상을 함이 마땅하다는 점이다. 용서를 구함은 물론이고 공교회의 일원으로 함께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겠다는 상호 의사 표명이 필요하다.
교회의 기득권이나 자기 집단 보호 동기로 이루어지는 이단판별, 이단정죄는 정당하지 않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구원의 진리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호할 목적의 이단판별만이 정당하다. 이단판별의 기준은 성경과 진리성이다.
이단판별의 주체는 무엇인가? 교회라는 조직체가 주체인가? 위대한 이단자들 곧 정통신앙인들을 이단자로 몰아 처형하고, 종교개혁가들을 파면한 로마가톨릭교회의 이단정죄는 정당한가? 누가 무슨 권위로 개인, 신앙운동, 교회그룹의 정통성과 이단성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이단판별과 정죄의 주체는 교회이다. 그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이단 판별의 권위를 부여받았는가? 교회라는 조직체의 이단정죄는 무조건 절대적 권위를 가지는가?
역사적으로 확인되고 기독교 정통 진리에서 이탈한 공인된 이단, 이단자들에 대한 동정심은 불필요하다. 오류를 교정할 의사가 없는 집단을 배려할 필요도 없다.
우리의 관심의 대상은 ‘구원받는 이단자들’이다. 정치적 이유, 사소한 실수, 무지 때문에 이단이라고 정죄당하는 연약한 형제들이다. 성경과 진리에 크게 저촉되지 않음에도 정치적으로 ‘왕따’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단정죄의 단호성 때문에 고통당하는 ‘구원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을 수 있다. 교회라는 집단이 서로 우리가 사랑하고 함께 걸어야 할 형제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왕따 시킬 수 있다.
오늘날의 교회 안팎에 교회의 ‘갑질’에 피해를 입는 ‘위대한 이단자’, ‘구원받는 이단자’는 없는가? 우리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단판별의 기준과 주체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