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돈 교수(출처: ⓒ리포르만다)
개혁주의 교의학은 구원론에 이르러 그 절정에 도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속성과 경륜과 은혜에 대한 계시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그의 사역을 통하여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며, 구원론은 바로 이 계시의 결정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은 비밀인 삼위일체의 신비와 그의 성품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났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면서도 우리를 향해 무한한 인자하심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의 구원이며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다. 그러므로 구원론은 교회의 설교와 가르침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제들을 다룬다. 그만큼 올바른 구원론의 정립은 교회의 사활이 달린 문제이다.
특별히 개혁교회는 중세 로마교회의 잘못된 구원론을 개혁함에서 출범하였기에 다른 교회와 구별되는 독특성이 구원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경적으로 개혁된 구원론을 개혁교회임을 증명하는 표징처럼 여겨 왔으며, 바른 교회와 이단을 구분하는 척도로 삼아왔다.
그러므로 개혁교단에 속해 있으면서도 개혁주의 구원관과 거리가 먼 메시지가 전파되는 교회는 진정한 개혁교회라고 할 수 없다. 오늘날 개혁교회임을 표방하면서도 전혀 개혁되지 않은 구원론을 전하는 교회가 부지기수이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무율법주의적 폐단을 불러온 값싼 은혜의 복음, 즉 무조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이단적인 가르침이다. 반면에 도덕적인 해이와 방종에 대한 반작용으로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메시지는 또 다른 극단인 새로운 율법주의로 치우쳐 종교개혁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교회가 참으로 개혁되기 위해서는 구원론의 개혁이 시급하다. 올바른 구원의 진리가 강단에서 선포될 때, 우리 교회는 진정한 개혁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사역>
기독론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객관적으로 이루신 구속 사역을 다룬다면, 구원론은 객관적으로 성취된 예수의 구속사역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적용되는 과정을 탐구한다.
전자가 ‘과거’(past)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Christ for us) 행하신 일을 조명한다면, 후자는 ‘현재’(present)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Christ in us) 행하시는 일을 고찰한다. 곧 구원의 객관적인 면(objective)에서 구원의 주관적인 측면(subjective)을 다룸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개혁교의학에서는 이 전환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이런 특징은 칼빈의 구원론에서부터 확실하게 나타난다. 칼빈은 구원론을 다루고 있는 기독교 강요 제3권 서두를 다음과 같은 문제 제기로 시작한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취된 구속의 은총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 혜택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과거 예수께서 이루신 사역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효력이 있게 되는가? 칼빈의 대답은, 우리가 주님과 분리된 채 주님께서 우리 밖에 계시는 한, 주님의 고난이 우리에게 아무 효력이 없는 것으로 남아있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 효력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과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 신비로운 연합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칼빈 이후 대부분의 개혁 교의학자들은 이런 패턴을 따라 구원론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성령의 사역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개혁주의 구원론의 특징으로 형성되었다.
개혁주의 구원론은 이렇게 구원의 적용 과정에 있어서 먼저 성령의 사역을 강조함으로써, 구원이 주관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우선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나 노력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에서 차단하였다. 특별히 구원의 적용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앞세우는 알미니안적 오류를 효과적으로 배격한 것이다.
인간은 구원이 객관적으로 성취되는데 조금도 기여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 구원이 자신에게 주관적으로 적용되는데도 성령의 은혜가 선재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심으로 구원이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하여 이 선물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마저 스스로 할 수 없다. 물론 구원이 우리 안에 주관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역할과 책임이 따른다. 죄에서 돌이켜 예수를 믿지 않는 한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회개와 믿음마저 인간 안의 생래적인 선함이나 종교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갈 자율성을 상실하였다.
인간이 주님을 믿기로 선택하기 위해서는 죄의 결박에 매여 있는 그의 의지를 자유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선재해야 한다. 이렇게 성령 사역의 우선성을 강조함으로써 개혁주의 구원론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적이면서도 선재적인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동시에 은혜의 바탕 위에서 믿음과 회개의 참된 의미와 가능성을 밝혀준다.
성령의 사역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근거한다. 지상에서 예수님은 성령의 사람, 즉 ‘성령의 담지자’로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메시아 사역을 수행하셨다. 구속사역을 완료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는 ‘성령의 수여자’가 되셨다. 동시에 성령 안에 내재하여 성령과 함께 일하시는 ‘성령의 동반자’가 되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과 함께 당신의 지상사역의 열매를 세상에 전달하며 적용하신다. 주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그때에 자신이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18-20).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성령을 통하여 세상 속에 내재하고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오심은 어떤 의미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다시 오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예수님의 또 다른 존재 방식이다. 주님은 육적인 존재의 형태를 벗은 후 영적인 존재 방식을 취하셨다. 성령은 예수님의 인격적인 임재를 전 우주적으로 확장시키며 종말론적으로 연장시킨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종말론적인 비전을 실현해 가신다(엡 1:23).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인격적으로 내재하시고 성령과 함께 그의 지상사역의 열매를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신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와 ‘성령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와 ‘성령이 우리 안에’라는 표현을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하였다.
구원과 성화의 모든 과정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공재와 동역 속에서 진행된다. 그리하여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Christ in us) 계시는 신비가 실현되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Christ for us) 고난 받으심으로 얻게 되는 모든 효력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Christ in us) 계심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중생과 칭의, 그리고 양자됨과 성화와 성령 충만 등 구원의 모든 은혜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Christ in us) 계심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 실현된다. 따라서 성령을 통하여 임하시는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이 구속의 은총을 누리는 길이다.
구원의 선물을 받는 것과 그 선물을 주시는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을 분리할 수 없다. 주님을 모시고 그 분과 연합하지 않고는 구원의 은혜를 결코 누릴 수 없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그 효력을 믿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패한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과 혜택은 원하지만 주님 자신의 임재는 환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이 구원의 모든 은택을 누리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따라서 구원의 전 과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바탕 위에서 진행된다.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 서정의 모든 단계보다 앞서 배치된다. 그것은 구원의 모든 은혜가 이 연합에서부터 출발할 뿐 아니라, 이 연합 안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존 머레이(John Murray)가 말했듯이, 이 연합은 단순히 구원이 적용되는 과정의 한 국면이 아니라 모든 국면의 기초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에밀 부룬너(Emil Brunner)는 이 교리가 ‘모든 칼빈주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하였다. 특별히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근간으로 하여 구원론을 발전시키는데 획기적인 공헌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 강요』 제3권에서 구원론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논함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는다면 속죄 사역의 혜택에 전혀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였다.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만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새 언약의 모든 은혜가 흘러나온다고 하였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와 연합의 진리를 다양한 표현과 비유를 통해 증거하고 있다. 특별히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의 서신에만 이 용어(유사한 표현까지 합쳐)가 164번이나 등장한다.
어떤 신학자가 말했듯이, ‘그리스도 안에’라는 문구는 바울 서신에서 가장 특징적인 문체이다. 공관복음서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할 때는 주로 예수님과 ‘함께’(with)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면, 바울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in)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였다. 이는 바울이 도입한 독창적인 표현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바울 신학의 핵심이며 열쇠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와 연합의 사상은 요한의 기록에도 풍부하게 나타난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은 보혜사 성령이 임할 때 주님과 우리가 상호내주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곧 이어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하여 이 연합의 신비를 알기 쉽게 풀어주셨다. 거기서 ‘내 안에 거하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 바울의 연합 사상도 이 주님의 말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논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의문은 어떻게 거룩하고 완전한 하나님이 부패하고 유한한 인간과 하나가 될 수 있는가이다.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불같은 연단과 고난을 통해 정화되는 길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 신자가 성결해져야만 신인합일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앙생활의 목표이며 영성의 골(goal)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기독교 신앙의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며, 영성의 근원이다. 신비주의적 전통에 대응하여 개혁주의 신학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과 성화의 전 과정의 바탕으로 본 것은 신앙의 특성과 영성의 색깔을 뒤바꾸어 놓은 영적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는 노력과 수양을 통해 신인합일의 경지에 이르기를 힘쓰는 고역스럽고 율법주의적인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 됨에서 흘러나오는 충만한 은혜를 누리는 풍성한 삶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는 근거와 자격을 우리 안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평생 성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불같은 고난을 통하여 정화될지라도 그런 자격을 조금이라도 갖출 수 없다. 오직 예수님이 흘리신 피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할 수 있는 정결한 신부의 자격을 갖추게 한다. 그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고 의롭다함을 얻게 하여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게 한다.
이 연합의 근거는 예수님이 구속사역을 통하여 이루신 율법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법적으로 전가된 것이다. 그래서 개혁신학에서는 이 연합을 우선적으로 ‘법적 연합’(judicial union)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개혁교회에서 칭의를 법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했기에 이런 연합의 교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칭의론의 개혁은 연합에 대한 기존의 가르침에 획기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경건의 부단한 노력과 신비체험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영적인 높은 경지가 아니라, 오직 예수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복음의 진수를 회복한 것이다.
남녀가 혼인하여 법적으로 하나가 되면 그 소유를 공유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과 법적으로 연합하면 주님의 의로움과 거룩함, 그리고 영광에 참여하게 되며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 예수님과 같이 아들의 특권을 누리며 아들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아버지 집의 풍성한 것들을 누린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므로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가 되며 추한 자가 아름다운 자가 되고, 빈곤한 자가 부요한 자가 된다.
이 연합은 법적인 연합일 뿐 아니라 실질적인 연합, 즉 생명적이며 유기적인 연합이다. 성경은 이러한 연합의 성격을 머리와 몸, 그리고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의 생명에 접붙임을 받아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끊임없이 부활의 생명력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의 형상과 성품에 참여하며 그의 마음을 본받는 자가 되었다.
연합에 관한 논의에서 제기되는 또 다른 의문은 어떻게 시공간의 무한 간극으로 분리된 두 존재가 실질적으로 연합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연합의 영이다. 성령은 하늘에 있는 주님과 땅에 있는 신자, 무한자와 유한자, 의로운 이와 불의한 자의 무한 간극을 극복하고 완전히 이질적인 두 존재를 인격적으로 결합시킨다. 그러나 성령은 둘을 긴밀히 연합하는 동시에 구별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그 어떤 “잡스러운 혼합”도 허용하지 않는다. 성령은 이 연합의 매개체와 방편인 동시에 이 연합의 모든 혜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통로이다.
성령은 연합의 매개체와 채널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우리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 교제하는 만남의 장으로 제공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인격이 가지고 있는 환경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성령의 사역을 묘사할 때 주로 성령 ‘안에’(in) 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였다.
우리 육체가 공기 속에 존재하며 물고기가 물속에서 존재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우리가 존재하는 영역, 즉 영적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하늘의 영역에 존재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되었다고 말했다(엡 2:6). 거기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늘의 영역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게 되었다(엡 1:3). 그러므로 우리의 정체성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곧 하늘 시민이다(빌 3:20).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은 지극히 사적인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주적 사건과 계획 속에 참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우주의 새로운 상황과 질서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스도 안’과 ‘아담 안’은 서로 대비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가 지배하지 못하며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의 새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에서 자유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워진 새사람의 반열에 서게 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다(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 진행되는 새 창조에 참여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이 포괄하는 반경을 우주적 차원까지 확장하였다. 죄로 오염되고 와해된 우주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고 통합되는 종말론적인 비전이 실현되는 것을 궁극적인 구속의 목표로 보았다. 그러므로 먼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 편입되지 않은 세상의 영역들을 그 반경 안으로 복속시키는 중대한 책무를 띤 것이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
16세기 종교개혁의 핵심 되는 논점은 구원론이었다. 개신교는 중세 로마 가톨릭의 구원관을 개혁함으로써 출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로마 가톨릭과 개혁주의 구원관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이해하는 관점이 다르다는데 있다.
로마 가톨릭은 칭의를 ‘의롭다고 선언하다’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믿음만이 아니라 사랑을 수반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사랑이 충만해짐에 따라 칭의가 진척된다. 결과적으로 믿음으로 단번에 얻는 칭의와 믿음의 열매인 사랑 안에서 자라가는 성화를 구분치 않고 혼동해 버린 것이다. 가톨릭 신학자들이 칭의를 법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성화에 대한 그들의 관심 때문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죄인을 실제적인 변화와 상관없이 의롭다고 칭하는 교리는 심각하게 남용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고 본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런 로마 교회의 가르침은 구원의 확신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보았다. 만약 칭의가 우리의 거룩함에 근거한다면 우리의 구원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땅 위에서 우리의 성화는 매우 유변적이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런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께 인정받을만한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평안과 확신보다는 오히려 죄의식과 불안과 두려움만이 더 고조되는 쓰라린 체험을 하였다. 그는 그런 고뇌 속에서 성경을 연구하다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거룩함이 아니라 오직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완전한 의로움에 근거한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루터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칭의에 대한 이해만이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게 한다. 동시에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를 밝히 드러냄으로써 그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반응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킨다. 더불어 우리를 죄책감에서 자유하게 하며 자원하는 심령으로 선을 행하게 한다. 그러므로 칭의론은 진정한 경건의 바탕과 다이내믹을 제공한다. 루터는 칭의 교리가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킨다는 가톨릭의 비난에 대응하여 칭의는 필연적으로 성화를 수반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루터의 가르침에서 칭의는 신학의 으뜸 원리로 추앙된 반면에 성화는 상대적으로 열등한 위치로 강등되었다. 그는 주로 칭의론을 가톨릭의 공격에서 보호하기 위한 소극적인 목적으로 성화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점을 강조했으나, 온전한 성화 교리를 발전시키지는 못하였다.
이렇게 칭의에 집중된 채 성화를 홀대하는 경향은 급기야 개신교 안에 무율법주의라는 극단적인 형태로까지 발전하였다. 개신교 안에 만연하게 나타나는 이 현상은 칭의와 성화를 지나치게 분리하여 성화를 구원과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논리에 의하면 성화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부수적인 것이며 기껏해야 천국에서의 상급과 관련될 뿐이다. 그래서 삶과 인격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칭의의 교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의무를 교묘히 회피할 수 있는 편리한 논리로 남용된다. 본회퍼(Dietrich Bonheoffer)의 말로 표현하자면, 값진 은혜가 ‘값싼 은혜’로 전락한 것이다.8)이렇게 왜곡된 복음이 개신교 안에 심각한 윤리적 방종과 타락을 조장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과도 아주 거리가 멀다. 칼빈은 이런 식으로 칭의의 교리가 남용될 가능성을 치밀한 논증을 통하여 철저하게 봉쇄하였다. 이런 사실은 그가 칭의와 성화를 논하는 순서에서부터 드러난다. 그는 기독교 강요에서 성화를 칭의 보다 먼저 다루었는데 이는 다른 교의학 서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이다. 그것은 칭의론이 성화의 중요성을 간과한다는 가톨릭의 비난을 원천 봉쇄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곧 성화를 전략적으로 칭의보다 앞세운 것이다.
그 구조 뿐 아니라 내용에서 칼빈은 치밀하고도 정교하게 발전된 논리로 칭의론이 남용될 수 있는 위험을 차단하였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이다. 곧 단일하면서도 이중적인 은혜이다(One grace yet two-fold grace).10) 칭의와 성화가 비록 우리의 사고에서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우리의 경험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둘 중 하나만을 체험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만을 체험할 수 없다. 만약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성화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연합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이 둘을 서로 분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찢어버리려는 것과 같다. 이러한 칼빈의 논리에 따르면 성화 없이 칭의만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칭의와 성화는 영원한 끈으로 하나로 엮어져있지만 이 둘은 논리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로마 가톨릭처럼 이 둘을 혼동하면 구원의 확신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 구속의 사랑과 은혜의 성격이 흐려지게 된다.
만약 칭의가 우리가 이룬 거룩함에 근거한다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해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거룩함의 커트라인은 어느 정도인가? 우리가 성결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함의 기준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만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과연 거룩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만큼 거룩해졌는지 자신할 수 없어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면 구원에 대한 확신뿐 아니라 진정한 성화도 불가능하게 된다. 진정한 경건은 하나님께 의로운 자로 인정받기 위해 쉼 없이 쫓기며 강박적으로 행하는 경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은데 대한 감사하는 심령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함이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오류에 대응하여 칭의와 성화를 날카롭게 구별하는 동시에,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무율법주의 위험에 대비하여 칭의와 성화의 연결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칼빈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로마서에 제시된 바울의 구원론과 맥을 같이한다.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에 맞서서는 성화와 구별된 칭의를 강조하였고(롬 3-5장), 무율법주의의 반론을 배격하기 위해서는 칭의와 연결된 성화(롬 6장)를 논하였다.
이와 같이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과 연결성을 균형 있게 적용함으로써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 양극단을 효과적으로 물리치는 전략적인 논증이 성경에 근거한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을 이루고 있다.
<칭의>
로마 가톨릭에 의하면 칭의는 실제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종교개혁자들처럼 칭의를 실제적인 변화와 상관없이 법적 선언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윤리적인 방종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불경스러운 가르침이라고 정죄하였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칭의는 성화가 진전됨에 따라 점진적으로 온전해진다. 심각한 죄에 빠지면 칭의의 은혜를 상실할 수도 있다. 그러면 고해성사를 통해서 그 은혜를 회복해야한다. 결국 개인의 구원과 칭의는 교회의 예식과 제도에 참여하는 한도 내에서만 보장되는 셈이다. 또한 이 땅 위에서 신자의 칭의는 항상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기에 마지막에 성화가 완성될 때까지 구원의 확신은 유보될 수밖에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가톨릭의 칭의론을 배격하고 칭의를 신분적인 변화로 이해하였다. 칭의는 신자가 실제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이다. 즉 법적인 선언이다. 칭의는 우리의 의로움이나 거룩함에 전혀 근거하지 않는다. 칭의의 근거를 우리 안에서는 눈곱만큼도 발견할 수 없다. 칭의는 전적으로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 의로움(alien righteousness)에 근거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리인으로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시므로 성취하신 의로움이 칭의의 유일한 공로적 근거이다. 이 의로움이 믿음을 통하여 법적으로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즉각적으로 완전한 칭의의 은혜를 받았다. 이 칭의는 성화의 퇴보로 인해 감소되거나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불변하며 유효하다. 칭의는 그리스도인의 삶 전 과정을 힘차게 떠받치고 있는 영원한 은혜의 반석이다. 신자는 이 반석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주님 앞에 바로 설 수 없다.
개혁교회의 간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칭의의 교리가 최근 들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였다. 칭의론이 값싼 은혜의 복음으로 왜곡되어 개신교 안에 무 율법적인 혼란을 불러온데 대한 반작용으로 칭의 교리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이 팽배해 가고 있다.
칭의 교리 때문에 한국 교회가 윤리적으로 타락하였다는 말을 예사로이 듣게 된다. 그러나 이 말은 개혁주의 칭의론에 대한 무지함을 드러내는 말이다. 개혁주의 칭의론이 바르게 전파될 때 교회는 영적으로 흥왕하였다. 칼빈과 루터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칭의론은 교회의 사활이 달린 교리이다. 한국교회의 윤리적 타락은 칭의 교리를 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교리를 잘못 전했기 때문이다. 칼빈의 가르침과 거리가 먼 비 개혁적이고 이단에 가까운 구원론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최근 상당수의 신학자들이 칭의를 새롭게 이해해야 하며 개혁주의 칭의론을 수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들 중에는 로마 가톨릭과의 논쟁점 자체가 재고되어야 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런 신학자들은 종교개혁자들과 로마 가톨릭의 입장 차이가 사실 근본적이고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양측 다 성경적으로 일리가 있기 때문에 서로의 공통점을 부각시키는 관점에서 두 입장은 조율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로마 가톨릭과 복음주의 교회의 일치 운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이런 신학적인 작업이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다. 가톨릭교회와 루터파 교회(미국과 독일)는 수년간의 연구를 걸쳐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칭의의 기본 입장에 있어서 서로 동의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보고서를 꼼꼼히 살펴보면 피상적으로는 일치하는 것 같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칭의를 신분적인 변화가 아니라 실제적인 갱신으로 보는 가톨릭의 입장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
이런 추세에 편승하여 여러 신약학자들이 칭의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에 반기를 들고 일어섰다. [그들은 유대교를 율법의 행위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는 종교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를 배격하며 유대교는 언약사상에 뿌리내리고 있는 언약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대교에서는 율법준수를 구원의 방편이 아니라 언약의 백성이 언약 안에 머무는 의무로 요구된다고 본다. 바울 사도가 유대교를 반대한 것은 행위구원을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할례와 같은 율법의식을 이방인에게 요구하는 유대인들의 배타주의와 선민우월주의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전통과 의식과 문화적 방식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그것들은 모두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며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오직 믿음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결국 칭의의 교리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을 방해하는 사회적, 문화적 장벽을 허물기 위해 쓰였다고 본다. 따라서 칭의의 가르침은 원래부터 바울의 핵심사상이 아니라 이방선교 현장에서 파생된 교리이다. 특별히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하다가 유대 할례자들을 보고 도망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메이첸(J. Machen)을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이 지적했듯이, 바울은 이방선교 때문에 칭의의 교리를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칭의에 대한 그의 확신 때문에 이방선교에 전념했던 것이다. 칭의는 처음부터 그의 삶과 사역을 주관했던 핵심 사상이었다. 바울이 비판한 것은 단순히 유대교의 율법 의식만이 아니라 행위구원 사상 자체였다는 사실이 그의 전 서신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누누이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으며, 그런 이는 오히려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갈 2:16; 3:10- 11).
바울 사도는 예수님이 전파하신 종말론적인 구원을 다양한 범주와 그림언어(화해, 구속 양자됨, 칭의, 새 창조, 새 언약, 중생)로 묘사했다. 그 중에서 칭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대응하여 구원의 선물적인 특성을 가장 잘 부각시키는 최상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자들과의 논쟁 상황에서 의로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치밀한 논리로 발전시켰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의로움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칭의의 근거는 인간 안에 있지 않고 전적으로 인간 밖에 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있다(롬 3:23-31; 4:5).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이루신 의로움이 칭의의 근거이다(롬 5:6-21).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롬 3:26, 28; 4:3,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라고 할 때 ‘의’라는 단어가 ‘여기다’(logi,zomai)는 동사와 함께 사용됨으로 칭의의 선언적 의미가 더욱 뚜렷해진다.
일부 신약학자들은 칭의를 법정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갱신의 의미까지 내포된 것으로 본다. 곧 칭의는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변화를 받아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칭의와 성화를 혼동해버리는 것이며 로마 가톨릭의 입장으로 회귀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바울과 칼빈의 가르침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칭의와 성화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의 경험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럼에도 그 특성상 둘은 논리적으로 구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로마 가톨릭이 빠진 논리적인 오류를 극복하기 힘들다.
교리적인 전통의 틀에 꿰맞추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피해야 하지만 교회역사 속에서 신앙의 선진들에 의해 성경이 해석되고 적용되는 과정에서 발전된 신학적인 전통을 무시해버리는 자세도 지양해야 한다.
교의학자들이 간혹 성경에 무지한 과오를 범한다면, 그와는 달리 성경학자들은 신학적인 전통에 문외한인 경우가 적지 않다.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깊은 연구와 반성이 없이 선진들의 귀한 신앙의 유산을 쉽게 무시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하나로 연합되어 있지만 칭의를 성화와 구별되는 법정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신약학자들의 견해보다 더 성경에 충실할 뿐 아니라 실제 목회 상황에도 더 적실한 가르침이라고 본다.
칼빈은 칭의의 교리가 기독교의 주요점이며, 교회의 안녕이 이 교리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만일 이 교리의 순전성이 조금이라도 손상되면 교회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며, 파멸의 벼랑에 몰리게 된다. 이 교리가 사라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소멸되며 종교는 폐지되고 교회는 파멸에 이르며 구원의 소망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칭의 교리는 구원 메시지의 심장이며 복음의 젖줄이고, 심오한 영성의 바탕이며 고통받는 양심의 유일한 위안이다. 교회가 부흥될 때마다 칭의의 교리가 바로 전파되었다. 개신교의 위대한 설교자들이 칭의 교리의 전도사였다.
영미의 대각성 운동을 주도했던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와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가 그랬고, 설교자의 황제로 불리는 스펄전도 칭의 교리의 열렬한 옹호자이며 전파자였다. 그러므로 존 파이퍼(John Piper)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형제들이여, 영혼들이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 모여들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신칭의라는 크고 중심되는 진리를 선포하고,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십시오.”
한국교회가 그 동안 칭의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했기에 교인들을 방종에 빠지게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사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칭의를 너무 많이 전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칭의를 바르게 전하지 못한데 있다. 칭의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과 이해는 항상 성화를 증진시킨다. 그것은 성화의 진전은 오직 칭의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화의 과정에서 칭의의 진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시켜 준다. 비록 우리가 죄 속에 빠져 영적으로 방황할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전혀 변함이 없다.
이러한 사실을 일깨워주는 칭의의 메시지는 교인들을 타락에서 돌이키는 가장 강력한 은혜의 방편이 되며, 영적 회복의 바탕을 제공한다. 그들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제2의 찬스를 부여한다. 그래서 범죄 한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항상 칭의의 복음이 담겨 있다. 하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타락한 백성들에게 징계를 선언하시는 동시에 용서와 회복을 약속하는 칭의의 메시지를 전하셨다.
죄를 지적하며 책망하는 설교만으로 타락한 이들을 돌이킬 수 없다. 그들의 많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변함없이 무궁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복된 사실을 성령의 감동으로 새롭게 깨달을 때 그들은 그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교회가 부흥할 때마다 다시 부활했던 메시지는 죄를 날카롭게 지적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드럽게 강조한 칭의의 복음이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부흥을 고대하는 한국교회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도 칭의의 복음이 부활하는 것이다.
<근본적인 성화>
일반적으로 칭의는 즉각적인 반면에 성화는 점진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화에도 즉각적인 측면이 있다. 칼빈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순간 칭의와 성화를 동시적으로 체험한다. 그는 의롭다함을 받을 뿐 아니라 거룩하게 된다. 칼빈은 성화를 근본적으로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고찰했다. 성화는 칭의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한다.
전통적으로 성화의 기독론적 바탕에 대한 연구가 미흡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칭의와의 관계는 많이 논의되었지만 성화와의 관계는 그만큼 충분히 연구되지 못했다.
구원의 서정(ordo salutis) 교리에 따르면 칭의와 성화가 일련의 논리적 순서를 따라 단계적으로 발전되는 것처럼 서술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칭의와는 직결되지만 성화와는 칭의를 거쳐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이해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칭의와 성화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순간 동시적으로 일어나며 신앙생활의 전 과정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진행된다는 사실이 간과된다. 그 결과 구원은 ‘성화 없는 칭의’로 얻고, 구원 후의 삶은 ‘칭의 없는 성화’로 이루어 간다는 오해를 낳게 된다.
그러나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논리적인 순서를 따라 이어지는 분리된 단계가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은혜로 보았다. 칭의와 성화의 은혜는 모두 같은 근원에서 흘러나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칭의의 근거일 뿐 아니라 성화의 효력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다시 살게 하는 효능이 계속 흘러나온다. 그래서 칼빈은 로마서 6장을 주석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 육신의 부패성을 파괴하며 분쇄하는 효력이 있으며, 그의 부활은 더 나은 본성으로의 갱신을 초래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통찰이 그동안 개혁주의 성화론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 근래에 와서야 존 머레이(John Murrary)와 같은 개혁주의 신학자가 이 점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결정적인 성화론(Definitive sanctification)”이라는 논문에서 이런 관점을 더 발전시켜 성화의 즉각적인 측면을 성경적으로 규명함으로써, 개혁주의 성화론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는 인정을 받고 있다.
머레이는 우선적으로 롬 6장을 근거로 결정적인 성화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로마서 6장의 내용에 의하면, 신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으로써 죄에 대해 죽고 새 생명 가운데 다시 살게 되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부터 신자가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다시 살게 하는 능력이 유출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흘러나오는 이 효능이 곧 “신자의 성화의 영속적인 원동력이다.”
머레이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바울의 표현(롬 6:2)을 우리가 죄에 대해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죽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말은 심리적으로 그렇다고 여겨야 한다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의미한다.
물론 죄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우리 안에 모든 죄가 없어졌다거나 우리 안에 죄성이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유혹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이 말은 우리 안에 죄가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죽었다는 동사(avpeqa,nomen)가 아오리스트(aorist) 시상으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다시 번복될 수없이(irreversible) 죄의 지배로부터 확실하게 해방된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존재하는 영역이 흑암의 권세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하나님의 의와 은혜가 왕 노릇하는 영역으로 획기적으로 전환됨을 뜻한다.
머레이는 로마서 6장뿐 아니라 “신약에서 성화에 관해 사용된 가장 특징적인 용어들은 어떤 진행 과정이 아니라 단번에 완성된 결정적인 사건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장 2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 했는데, 여기서 “거룩하여지고” 라는 완료형 시제의 동사가 사용되었다. 바울 사도가 자주 사용한 성도라는 용어는 단순히 격식으로 붙여진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진 사실에 근거하여 부여된 영광스러운 칭호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뿐 아니라, 죄와 획기적으로 결별한 거룩한 이가 되었다. 이렇게 결정적으로 죄와 분리되어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점진적인 성화의 근본 바탕이 된다.
죄와 육신과 대적해서 싸우며 새사람 가운데 행하라는 점진적인 성화에 관한 신약성경의 모든 권면과 명령은 근본적인 성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곧 점진적인 성화에 대한 명령(imperative)은 이 근본적인 성화의 사실(indicative)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성화과정에서 ‘행함’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이 사실에 대한 ‘믿음’이다. 예수 구속의 은혜가 우리 안에 얼마나 놀랍고 획기적인 변화를 이루어 주었는가를 바로 알고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우리의 영적빈곤은 이 복된 사실에 대한 인식과 믿음이 결핍된 것과 이 믿음을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훈련이 부족한데 그 근본 원인이 있다.
예수를 믿을 때 칭의와 함께 근본적인 성화가 일어났다는 가르침은 개혁주의 구원론이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고 신앙의 방종을 초래한다는 비난을 불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동시에, 역동적인 성화의 확실한 토대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성화의 복음적인 특성을 분명히 밝혀 줌으로써 성화의 메시지가 율법주의로 치우치는 위험을 막아준다.
<성화의 두 다이내믹: ‘근본적인 성화’와 ‘성령충만’>
또한 근본적인 성화론은 2차 축복을 강조하는 성화론의 전통에 대한 성경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웨슬리는 칭의와 회심 후에 성화를 획기적으로 체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그는 이를 즉각적, 또는 온전한 성화(Instantaneous sanctification, or Entire sanctification)라고 칭했다.
신자는 이 은혜를 체험하면서부터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이다. 웨슬리의 가르침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성화를 칭의와 분리된 획기적인 경험으로 보는 운동(성결운동-케직 사경회-오순절 운동)이 연이어 일어났다. 20세기 초부터 오순절 성령운동이 일어나면서 제2의 축복을 ‘성령세례’ 또는 ‘성령충만’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세례 교리의 역사적인 기원은 웨슬리-성결운동-케직 사경회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웨슬리의 전통에서 주장하는 ‘제2의 축복’과 오순절 운동에서 가르치는 ‘성령세례’는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으나 획기적인 제2의 은혜체험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서로 맥을 같이 한다.
이러한 가르침의 근본 문제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순간 죄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되는 근본적인 성화가 일어난다는 진리를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죄로부터 해방되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칭의 후에 2차적으로 체험하는 은혜로 본 것이다.
그러나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체험은 웨슬리와 케직 사경회 그리고 오순절 성령운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꼭 나중에 가서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신자가 믿음으로 예수와 연합하는 순간부터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죄에 대해 죽고 새사람으로 부활하는 근본적인 성화가 일어나며, 동시에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특권이 주어진다.
따라서 성경이 제시한 정상적인 성화의 패턴은 예수를 믿을 때부터 성령으로 충만하여 죄와 결별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현대 교인들의 문제는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지적했듯이, 그들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령에 속한 사람들인데 자신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아직도 육신에 속한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고전 1:2; 3:1-3).
이러한 신학적인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와 오순절 전통의 가르침은 거룩한 삶과 능력 있는 사역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할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데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오순절 성령충만의 축복이 성화의 원동력을 제공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한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개혁주의 신학은 성화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뿐 아니라, 성령충만이 주어진 오순절사건과도 연결시켜 이해하는 신학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성화는 기독론적 바탕뿐만이 아니라 성령론적 토대 위에 세워져 있으며, 예수의 은혜뿐만이 아니라 성령의 다이내믹한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명료하게 밝혀주어야 한다.
전통적인 은혜의 교리는 중생과 함께 성령의 모든 것이 신자에게 주어졌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과거 회심과 중생의 체험에만 안주한 채, 새로운 성령의 은혜에 대한 갈망과 기대를 잃어버리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중생과 동시에 성령으로 충만케 된다고 볼 수 있는가? 사실 많은 교인들이 거듭났지만 그들의 실제 모습은 성령으로 충만하기보다는 오히려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을 때 성령의 모든 것을 받았으니 새롭게 성령충만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것은 교인들을 거짓된 안위감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화의 전 과정에 걸쳐 성령의 지속적인 충만케 하심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령으로 계속 인도함을 받는 이’, 즉 ‘성령 충만한 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롬 8:9; 갈 5:16, 25; 엡 5:18). 그러므로 성령충만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특권이다.
그 모든 전제 조건을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모두 충족하셨기에, 성령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신 것이다(딛 3:6). 신약 교회는 처음부터 성령으로 충만한 성전으로 존재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처음 믿을 때부터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이 특권은 책임과 서로 맞물려 있다. 성령은 항상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므로 이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지 말고 잘 순종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바울의 권면(엡 5:18)도 ‘특권인 동시에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명령은 “너희가 하나님이 거하실 새로운 성전이 되었기에(엡 2:21-22), 너희 가운데 성령이 충만히 거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은혜로운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 가운데 계시는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고(엡 4:30), 그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써 성령이 너희를 항상 주관(충만)하도록 허락하라는 말씀이다(Let the Spirit keep filling you).
결국 성화의 전 과정은 근본적인 성화의 바탕 위에서 지속적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 진행된다. 곧 ‘근본적인 성화’와 ‘성령충만’이 성화의 두 다이내믹이다.
<점진적인 성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본받아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다시 사는 것은 획기적으로 일어난 사건인 동시에 매일 신자의 삶 속에서 반복해서 실현되어야 할 사건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일 죽고 매일 다시 사는 삶이다(daily dying and rising).
칼빈주의 전통에서는 성화를 날마다 옛사람이 죽고(mortificatio) 새사람으로 소생(vivificatio)하는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가르침이 안고 있는 한 가지 문제점은 신자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매일 옛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은 신자들은 자신이 새사람인지 아니면 아직도 옛사람인지 헷갈리게 된다. 성화에 진전이 있을 때는 새사람처럼 보이나 성화가 부진할 때는 여전히 옛사람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자신 안에 옛사람과 새사람의 두 얼굴을 보면서 분열된 자아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했다(고후 5:17).
또 신자는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라고 하였다(골 3:9-10).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의 지배아래 있는 죄의 종이 아니다. 아담의 부패성에 의해 주관되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성품의 지배를 받는 성령의 사람이다. 첫 사람 아담과 단절되고 둘째 사람 예수와 연합하여 새 인류(사람)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자는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고 새사람이다. 부분적으로만 새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온전한 새사람이다. 물론 그는 불완전하며 성숙의 과정을 통해 완성의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
성화는 우리의 옛사람을 끊임없이 뜯어 고쳐 조금 씩 새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니다. 성화는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으로의 부활로부터 시작한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롬 6:6)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수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행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난 은혜로운 사건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면, 그것만큼 헛되고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끌어안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뿐 아니라, 또한 죄의 근원인 우리의 옛사람을 끌어안고 못 박히신 것이다.
이 십자가의 죽음은 불행의 근원을 제거하는 복된 죽음이다. 죄와 율법과 사탄의 지배로부터 해방을 가져다주는 죽음, 죄의 노예생활을 끝내주는 죽음,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을 죽이는 죽음이다. 동시에 이 죽음은 우리를 십자가로 이루신 모든 구속의 은혜가 충만한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영광스러운 관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라 새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옛사람의 방식과 성향을 따르는 그릇된 선택을 할 수 있다. 우리의 육체에는 죄의 추억과 관성과 습관이 배어 있다. 이 몸의 부패한 성향은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계속 자극과 충동을 받아 우리를 죄로 치우치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몸의 부패한 성향과 소욕을 제어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2-13)라고 하였다.
여기에 신자의 중대한 책임이 있다. 육신의 부패한 성향을 성령의 능력으로 복종시키기보다 거기에 굴복하여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면 신자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경고하였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신자는 육신의 부패성이 자극되는 상황과 기회를 최대한 피하는 반면에 자신의 심령이 성령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상황과 (은혜의)방편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자신을 죄의 유혹과 충동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계속 들이밀면서, 예를 들어 음란 사이트에 계속 접속하면서 죄에서 자유하기를 바라는 것은 커다란 자기기만에 빠지는 것이다.
성화의 과정에서 신자가 기울여야 하는 노력은 소극적으로는 죄의 유혹과 자극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능한 한 차단하며 그런 상황을 피하는 것이다. 이는 죄의 유혹이 범람하는 세상을 떠나거나 도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받는 죄의 유혹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신자는 짧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주님과의 내적인 교통을 유지해야 한다.
더 적극적으로는 자신이 성령에 의해 고무되고 새롭게 될 수 있는 은혜의 장에 열심히 참여해야 하며, 모든 은혜의 방편을 부지런히 활용하여 자신의 성화가 촉진되게 해야 한다.
그것이 성령을 따라 심는 것이다. 성령을 따라 심기 위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사귀기 위해, 우리의 시간과 열심과 에너지를 쏟지 않고는 결코 거룩함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성령의 열매는 교회 안에서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예배와 기도와 성도의 교제를 통해 풍성하게 맺히게 된다. 성령의 열매는 고립된 개인의 경건생활에서 빚어지는 산물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서로 더불어 사는 섬김과 교제의 삶에서 배양되는 덕목이다.
그러므로 성화의 첫걸음은 ‘고립’에서부터 나와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성화는 진정한 성도의 교제를 누릴 수 있는 건강한 교회,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고 운행하는 교회에서 이루어진다.
교인들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교회가 세속화되고 제도적으로 경직되어 성령의 열매를 도저히 맺을 수 없을 정도로 영적인 토양이 척박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방해하는 죄악을 회개하고 제도적 부조리를 개혁하므로 거룩함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성화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또한 성화는 궁극적으로 선교를 지향한다. 세상 속에서 빛된 사명을 수행하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신자가 이 땅 위에서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함을 이루어야 하는 근본 이유이다.
이 일에 실패할 때 교회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다.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가 처한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민족이 한국교회에 등을 돌리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한국 선교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거룩성을 잃어버린 교회는 아무리 외형적으로 비대해져도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한국교회 앞에 놓인 시급한 문제는 숫자 늘이기 전도를 통한 자체 교회의 팽창이 아니라 범 교회적인 회개와 개혁운동을 통한 거룩성의 회복이다. 교회는 교인들을 교회활동과 봉사에만 익숙한 종교인이 아니라 세속의 한복판에서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영적인 빛과 에너지를 발산하는 복음의 증인으로 양육해야 한다.
<성화의 목표>
많은 교인들의 문제는 죄와 세상에 대해 죽은 자로서 살기를 한사코 꺼려하고 회피하며 여전히 옛사람의 소욕을 따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영적 불모의 세월과 방황의 시간이 한없이 길어지고 있다.
성령은 어쩔 수 없이 고통스러운 사건과 환경을 통하여 우리가 스스로는 절대 자원해서 하지 않으려는 자기 죽음의 자리에 내려가도록 도와주신다. 우리는 수많은 낭패와 깨어짐의 아픔을 통해서 옛 자아의 욕심을 좇는 삶이 더 이상 비참해질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해져서야 옛사람의 죽음을 원하게 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순간부터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사는 것이 원칙이지만, 현대 교회의 실제 상황에서는 아주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것이 보편적인 경험이다. 그래서 대개 성화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며 그 여정은 실패와 고난과 신음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 풍성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죽음이다. 우리 자신을 죽었다가 다시 산 자로서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면 그리스도가 우리 육체 안에 다시 사신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에 동참한 우리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그의 삶을 고스란히 되살아 내신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신자 안에 들어와 사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하였다(갈 2:20).
우리의 옛 자아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신다. 우리의 옛 자아가 살아 있으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그 생명을 나타내지 못하신다. 옛사람이 죽음에 넘겨져야만 우리 안에 부활의 새 생명이 밀려오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 이 십자가의 죽음을 회피하기 때문에 성령으로 충만한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한없이 지체되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사시면, 우리 안에 부활의 생명이 약동한다. 바울 사도는 신자의 삶을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삶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다(롬 6:4; 골 2:5).
그리스도인의 삶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의 생명을 누리는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의 삶을 한 마디로 부활의 삶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부활의 능력은 마지막 날 우리의 육체가 부활할 때만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신자들이 이 땅 위에서부터 누릴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능력이 믿는 자 안에 강력으로 역사한다고 하였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라고 기록하였다(엡 1:19-20).
종말에 맛볼 부활의 능력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현재로 앞당겨 이 땅 위에서 미리 맛보게 하신다. 성령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능력은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부활의 능력이다(롬 8:2). 이 부활의 능력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동력이다. 이 능력이 없이 우리는 죄와 세속의 세력에 대해 한없이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왜 죄를 극복하기가 그다지도 어려운가? 죄의 배후에는 사망의 권세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죄의 배후에 역사하는 사망의 권세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인 부활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부활의 권능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는 권능으로 작용한다. 세상과 옛 자아에 대해 못 박힌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는 능력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체험은 우리의 정체성과 가치관에 근본적인 혁신이 일어나게 한다. 이 땅에 속한 옛 정체성이 죽고 하늘에 속한 새로운 정체성이 부여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하늘에 앉힌 바 되었다(엡 2:6). 비록 우리가 육체적으로는 이 땅에 있지만, 영적인 차원에서는 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우편, 즉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의 자리에서 만물을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특권에 동참하게 되었다.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을 그리스도와 연합한 근거 위에서 발견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했을 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은 것이 우리 구원의 절정이다. 거기에서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이들, 즉 하늘의 시민(빌 3:20)으로서,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하늘에서 공급해 주는 모든 자원(엡 1:3)을 누리며, 하늘에서 부여받은 사명을 이 땅에 수행하는 하나님의 전권 대사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루어진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그 믿음대로 되는 역사를 체험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믿음만큼 누리며 믿음의 분량만큼 큰일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하늘의 비전과 사명을 좇아가고 있는가이다. 이 땅의 영광과 성공을 위해 하늘의 능력과 자원을 끌어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성화의 전 과정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기초하였다. 성화의 패턴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본받아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부활하는 것이다.
그 성화의 원동력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흘러나온다. 성화의 궁극적인 목표도 역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이다.
결국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화의 근원이며 패턴이고, 우리 안에서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성화의 원동력이며,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가 성화의 목표이다. 곧 성화의 처음과 나중, 알파와 오메가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니 주의 형상으로 변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된다(고전 3:18). / 박영돈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출처: 리포르만다: http://www.reformanda.co.kr/acts30m/168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