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부활은, 믿는 자들을 위한 첫 열매
∎주님의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것
∎주님의 부활은, 사망의 권세를 이긴 사건
인류역사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십자가형은 고대 동방(신 아시리아, 페니키아, 페르시아)에서 생겨난 형벌이었는데, 로마제국은 기원전 1세기 말에 식민지 통치의 방법으로 광범위한 규모로 십자가형을 적용했습니다. 처음에는 노예들을 나무에 묶어 놓고 고통을 주는 체벌이었지만, 후에는 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폭동이나 반란을 선동한 자들에 대한 처형방법으로 바뀌었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 않는 노예들과 피지배자들에게만 이 처형 방법을 사용해서 죽였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대 독립전쟁 동안에 수천 명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2차 유다 독립항쟁 당시에는 하루에만 500명이 십자가형에 처해 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십자가를 세울 만한 공간과 나무가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서기 4년 헤롯대왕이 죽었을 때도 대규모 십자가형이 집행되었다고 합니다. 헤롯대왕의 장례식을 마친 후, 아들 헤롯 아켈라오가 예루살렘에 운집한 군중들에게 “왕의 칭호를 받기 위해서 내가 로마로 갈 것인데, 무엇을 원하느냐?” 물었다고 합니다. 그때 어떤 이들은 세금 면제를, 또 다른 이들은 죽은 헤롯대왕의 측근의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이들의 요구를 헤롯 아켈라오는 거절합니다. 그러자 모인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킵니다.
이때 헤롯 아켈라오는 시리아 총독 바루스(Varus)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바루스는 로마군을 이끌고 와서 폭동을 진압시켰습니다. 그리고 폭동에 가담한 2,000명을 십자가형으로 죽였습니다.
이렇게 십자가형으로 때로는 몇 명씩, 때로는 500명, 때로는 2,000명의 사람이 한꺼번에 죽어갔습니다. 아마 십자가형으로 죽은 사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처형된 그 많은 사람 중에, 살아난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형으로 죽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아담의 후손으로 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기에, 십자가형으로 죽음을 당하셨지만, 죽음의 자리에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죽음의 자리를 털고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은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단서가 되는 것입니다.
∎ 부활의 증인들
부활한 예수님은 조용히 은둔해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셨고 사역하셨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증인 들입니다.
① 막달라 마리아가 처음 만났습니다.(부활절 새벽)
② 여인들이 만났습니다.(부활절 새벽)
③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만났습니다.(부활절 오후)
④ 베드로도 만났습니다.(부활절 오후)
⑤ 도마가 빠진 열 제자가 만났습니다.(부활절 오후)
⑥ (8일일만에) 열 한 제자가 만났습니다.
⑦ 일곱 제자가 만났습니다.(갈릴리호수)
⑧ 열 한 제자가 만났습니다.(갈릴리에서)
⑨ 오백여 형제가 만났습니다.(감람산에서)
⑩ 예수님의 친 동생 야고보도 만났습니다.
⑪ 승천하기 전 예수님의 제자들이 만났습니다.(부활 후 40일)
⑫ 마지막으로 바울이 다메섹 가까운 길에서 만났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대화했고, 음식도 나눠 먹었고, 승천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아마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엄청나게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는 것과,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초대교회부터 시작해서 복음을 전할 때 그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자,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그러했습니다.
부활의 명백한 증거인 <빈 무덤>이 있고, <부활한 예수님을 본 많은 증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자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편지를 쓸 무렵인 주후 55-56년경에는 예수님을 믿는 다는 자들 중에서도 부활을 의심하거나, 부활에 대해 엉뚱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장인 것입니다.
∎부활의 의미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19절에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랐는데’(마16:24), 예수님이 부활이 없다면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기독교인이 진짜 불쌍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 너무나 명백하기에, 기독교인이 전혀 불쌍한 사람이 아니기에 그런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갖는 의미를 3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주님의 부활은, 믿는 자들을 위한 첫 열매라고 증언합니다.
고잔15:20절을 보세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성경에는 죽었다가 기적적으로 소생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수넴 여인의 아들 소생사건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이 죽자 수넴 여인은 갈멜 산에 있는 엘리사를 찾아서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 아이가 죽었음을 말합니다. 엘리사는 죽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수넴으로 왔고, 아이의 시신 위에 올라가서 엎드립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하고 눈을 떴습니다. 죽은 아이가 소생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소생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베다니에 있던 나사로의 가정, 가장 역할을 했던 나사로가 중병이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4일)만에 베다니로 가서, 나사로가 묻힌 무덤에 가셔서 무덤 문을 열어 놓으라고 하셨고, 무덤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에 죽은 지 4일되는 나사로가 살아나서 나왔습니다.
이외에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소생했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예수님에 의해서 소생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소생과 예수님의 부활사건의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소생한 사람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죽게 됩니다.
하지만 부활은, 다시는 죽지 않습니다. 한 번 죽음을 통해서 영원한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놀라운 부활을 주님이 처음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의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합니다.
고전 15장 22-23절을 보세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인들에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3대 명절 <성탄절, 부활절, 성령강림절>가운데 부활절은 가장 큰 절기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국가에서는 부활절에 축제를 하고 카퍼레이드를 하기도 하고, 교회마다 부활을 축하합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할까요? 당연히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축하하는 이유를 하나 더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주님의 부활이 - 곧 나의 부활>, 다시 말하면 나에게 영원한 삶을 보장해주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자도 죽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도 죽습니다.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 으리니” 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모두 죽음의 문을 통과했고, 우리들도 지금은 이렇게 살아있지만 모두 죽음의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죽음의 문을 통과하기가 힘들다는 것도 압니다.
문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서 불신자는 영벌에<다시 말하면 지옥에 들어가서 영원히 고생하면서 살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영생에,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죽음이 임박하면 할수록, 주님이 계신 천국을 바라보고 믿음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전도자 무디는 죽음이 다가오자 밝은 얼굴로 “이 땅이 멀어지고 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이 부르시고 계신다. 이는 축복이요 영광이구나!”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무디의 딸이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가 기운을 차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딸의 기도를 듣고 있던 무디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마라!. 하나님이 지금 나를 부르시고 계신다. 나는 이 날을 얼마나 기다린 줄 아느냐?” 라고 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말이지요. 주님 안에서 부활을 확신한 자의 말입니다.
셋째, 주님의 부활은, 죽음을 이긴 이김의 소식입니다.
고전15장 25-26절을 보세요.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멸망하게 될 ‘사망’은 개인의 목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공동체와 사회를 질식케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어둠의 질서와 교만한 권세를 포함한 모든 죽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부활은 죽음 이후와만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살고 있는 현재의 삶과도 연관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아직도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 보입니다.
근래에 우리나라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세요. 자식을 죽이고 방치하는 비정한 부모들 / 부모를 버리는 자식의 이야기는 이제는 이슈 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 부부지간의 성적인 문제는 문제도 아니에요. 간통을 해도 죄가 성립 되지 않습니다. / 동성애를 그냥 그런가 보다 넘기고 있습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법으로 인정했고, 미국 장로교도 동성애를 인정하였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어두움과 불법이 판을 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셨는데도, 세상은 아직 죽음의 권세가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부활의 완성은 주님의 재림주로 오셔서 이 땅을 심판하셔서 <죽음과> <죽음을 가져오는 악의 세력>을 주님의 발아래에 둠으로서 완전히 죽음에서 승리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25절에 “그 발 아래에..”라는 말은 우리나라 문화로는 잘 이해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전 1세기 이 말씀을 받았던 고린도교인들은 쉽게 이해했습니다. 고대시대에는 적국을 정복한 장군이나 왕이 자신이 완벽하게 승리했다는 것을 만방에 보여주기 위해서 <적국의 왕이나 장수>의 목을 밟아서 나타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재림주로 오셔서 <사망과, 악의 세력>을 예수님의 ‘발아래에’ 둘 때가 속히 올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어
예수님의 부활은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그저 예수님께 일어난 한 사건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에, 나도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주님처럼 죽음 후에 영원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악의 세력과 악한 사회도 주님의 ‘발아래에’ 들어가 완전히 정복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부활신앙에서 흔들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의 의미를 알고 부활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부활의 의미를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