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은 성경 말씀과 기도를 통해 붙잡은 CVDIP 리더십으서 평생노예를 자유시민으로 바꾸는 불멸의 인생작품(Practice)을 남겼다. 링컨은 리더십의 금자탑으로 우뚝 섰다. 150년이 넘는 지금까지 리더들은 자문한다. “만약 링컨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본문 중에서-
1.언약의 여정(Covenant Journey)
∎링컨의 인생스토리
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2.12 ~ 1865.4.15)은 노예제도를 바꾼 미국의 16번째 대통령이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 말씀을 언약으로 붙잡았다. 링컨은 언약 위에서 ‘노예해방’이라는 언약적 비전을 꿈꾸고 실현시킨 전형적인 CVDIP 위인이다. 미국이 두 개의 나라로 갈라섰을 뻔했던 남북전쟁(Civil War; 1861.4.12 ~ 1865.4.15.)의 위기 앞에서도 노예해방이라는 CVDIP를 놓치지 않았다. 성경을 묵상하면서 발견한 하나님이 주신 언약(Covenant)이요, 하나님이 주신 비전(Vision)이기 때문이다. 언약적 비전은 분명한 꿈(Dream)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링컨은 기도로 형상화된 생생한 이미지(Image)를 이미지샷으로 실현시키면서 기어코 성취시켜 노예해방이라는 불멸의 인생작품(Practice)을 남겼다. 그 결과 이미 태어 난 수백만의 노예뿐만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수백만의 평생노예를 자유시민으로 바꿨다. 링컨 이후 사람은 주인과 종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로 바뀌었다. 언약가진 링컨의 CVDIP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과 역사가 바뀌었다.
링컨의 출생과 가정 및 성장환경
에이브러햄 링컨은 1809년 2월 12일 켄터키주의 하단에서 토머스 링컨과 낸시 링컨의 둘째 자녀로 통나무 오두막집에서 태어났다. 링컨이 태어난 19세기 초 미국에는 아직 개척되지 않은 원시림이 많았으며, 깊은 숲속에는 야생동물이 우글거리는 위험한 곳이 많았다. 이러한 곳에서 정직하고 건강한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나무를 베고, 땅을 파고, 농사일을 하면서 자연을 벗 삼아 자란 링컨은 건강하고 순수하고 정직하게 자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링컨의 어머니 낸시는 시골에서 보기 드문 미인이었고 온순하면서도 현명하고 특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깊었다.
어머니의 유산과 유언
링컨은 당시 미국 서부 변방의 개척지에 사는 가난한 가정 출신이었기 때문에 공부를 학교에서 배우기보다는 혼자서 스스로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토마스(Thomas Lincoln)는 링컨의 공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어머니 낸시(Nancy Lincoln)는 머리가 좋고 씩씩하고, 정직한 아들 링컨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공부를 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 부근에는 학교가 없었다. 그러던 중 링컨의 어머니는 14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아이들을 모아 놓고 글을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치는 곳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낸시는 남편을 설득시켜서 자녀들을 그곳에 다니도록 했다.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으로 잠시나마 링컨은 학교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이토록 자애롭고 신앙심이 깊으며 사랑이 많은 링컨의 어머니는 안타깝게도 링컨이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우유병(독초를 먹은 소의 젖을 마셔서 일어나는 병)으로 사망했다. 링컨의 아버지 토마스 링컨은 원래는 켄터키 주에서 15번째 가는 부농이었으나 링컨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3번의 파산을 경험한 후 인디애나 주로 건너왔다. 더군다나 재혼 후에 식구가 불어나자 생활고에 찌들었다는 일화는 잘 알려진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링컨에게 공부가 아닌 농사와 노동의 길을 강요하며 생계의 짐을 지웠다는 일화 역시 잘 알려져 있고 링컨 스스로도 자주 언급한 바 있다.
새어머니 사라의 교육열과 신앙의 승계
친어머니를 잃자 이 작은 통나무집은 태양이 사라진 것같이 차갑고 음침 한곳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링컨의 아버지 토마스는 재혼을 하였다. 새어머니 사라(Sarah Bush Lincoln)는 전 남편과 사별한 뒤 세 자녀들을 데리고 링컨의 집에 들어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새어머니도 친어머니 못지않게 신앙심도 깊고 훌륭한 분이었다. 그녀는 링컨에게 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새어머니가 이 오두막집에 들어온 후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깨어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새어머니 사라와 링컨이었다. 새어머니는 바느질을 하고, 링컨은 그 옆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에이브(링컨)야, 이제 우리 같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자자.”고 말하면서 그 날도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과 성경을 읽고 기도드리고 아들에게 키스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성경 말씀대로 살라던 친어머니의 유언은 이렇게 새어머니로 인해서 계승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토마스는 어린 링컨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링컨이 공부하는 것을 싫어했다. "네가 공부를 좋아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으나 책 보는 것보다 장작이라도 하나 더 패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일하는 습성을 길러서 농부의 자격을 갖추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인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사라는 강경하게 말했다. "당신은 아이의 희망과 포부를 꺾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아이들이 노는 틈을 타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려 하고 모든 것을 참고, 조금이라도 더 공부해 보려는 이 아이가 얼마나 대견스럽습니까! 많이 칭찬해 주셔야 합니다. 토마스는 이 말을 듣고도 여전히 공부 같은 것은 그들에게 필요 없다고 강조했다. 그럴 때마다 사라는 링컨의 총명함과 공부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에이브는 다른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어요. 이 아이는 훌륭한 인물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아이를 공부시켜서 훌륭하게 키우지 않으면 세상 떠난 에이브의 어머니를 몹시 섭섭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이 아이의 어머니예요. 친어머니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이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는 것의 저의 사명입니다.”
사라는 이토록 선량하고 현명했으며, 넓고 큰마음의 소유자였다. 링컨같이 위대한 영혼과 큰마음의 소유자는 결코 우연히 된 것이 아님을 두 어머니에게서 볼 수 있다. 깊은 산촌, 미개척지에 순회 학교가 없어 학교 교육을 받을 만한 여유가 없는 시대에 링컨은 살았다. 그곳에는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없었다. 그러나 사라는 어떻게 해서든지 책을 구해서 에이브에게 읽게 하였다. 에이브가 일을 게을리 한다는 말을 들을 때면 사라는 한결 같이 에이브편이 되어서 아들을 자랑했습니다. "저 애같이 효성이 지극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는 없을 거예요, 에이브는 단 한 번도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었으며 참으로 정직하고 착한 아이예요.” 이렇게 어머니에게 흡족한 애정과 인정을 받은 링컨은 더욱더 친절하고 진실된 사람으로 자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그토록 선량하고 씩씩하면서도 겸손한 정신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어머니의 이러한 사랑의 양식이 있었기 때문이며 어머니의 인정과 주목을 충분히 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이 아이에게는 장래성이 있습니다.”라고 믿어 주고 기대해 준 어머니, 남편을 설득시켜서 기어이 공부하게 한 어머니, 밤마다 성경을 읽어주고 기도해 준 어머니, 훌륭한 정신을 고취 시켜서 이토록 위대한 인물이 될 바탕을 튼튼하게 놓아 준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링컨이 그토록 큰 인물이 되고, 그토록 큰 업적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어머니의 덕이다. 어머니는 가장 귀한 유산을 내게 주었다. 살아 계실 때에도, 돌아가신 후에도 어머니의 기도와 가르침이 나를 내가 되게 하셨다. 우리 어머니야말로 참으로 훌륭하셨다.”
이와 같이 링컨은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을 어머니 때문이라고 말하며 그의 어머니를 한결같이 존경하였다. 그녀는 아들 속에 감추어진 귀중한 소질을 발견하고 캐내어 세상을 빛나게 한 광부의 임무를 다한 것이다.
링컨의 정식 교육은 약 18개월 동안 여러 명의 순회 교사로부터 수업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는 대부분 스스로 공부했으며, 열심히 책을 읽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치열한 레슬링 시합을 치르면서 팔힘이 세고 대담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다만 그의 가족과 이웃들은 그를 게으르다고 생각했다. 링컨은 동물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 사냥이나 낚시를 하지 않았다. 링컨의 아버지 토마스 링컨은 사별한 아내 낸시나 새 아내인 사라와 달리 교육보다는 노동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인물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애를 너무 부려 먹는다"고 할 정도로 링컨을 혹사시켜 아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상당히 독선적인 아버지였다고 한다. 아들이 시간을 쪼개 독서와 공부에 매진하면 일을 안 하려고 게으름 부린다고 생각했다고. 화전민에 가까운 개척농 집안이었다는 것과 아버지 본인이 까막눈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그렇게 단정했을 수도 있다.
링컨의 아내 메리
링컨은 31세 때(1840년) 메리 토드와 약혼했다. 그녀의 집안은 켄터키주 렉싱턴에서 노예를 소유한 부잣집이었다. 그들은 1839년 12월에 스프링필드에서 만났고, 두 사람은 1842년 11월 4일에 메리의 시집간 언니가 사는 스프링필드 저택에서 결혼하였다.
집중과 몰입의 독서광
링컨은 농담을 잘하는 쾌활한 성격인 반면 모친, 누나, 첫사랑의 죽음으로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 또한 부인과는 문화 갈등에 시달렸다. 링컨은 정식교육은 18개월이 전부이나 그야말로 독서광으로 책 읽기 몰두하였고 22세 부터 자신의 길을 개척하였다.
링컨의 누나인 새라가 결혼한 지 17개월 만에 아이를 낳다가 21세의 나이에 산욕으로 사망하고 공포스런 우유병이 확산되자 링컨 가족은 일리노이 주에 있는 메이콘의 국유지로 이주하였다. 1831년에 그의 아버지는 일리노이주 콜스로 이사를 했고, 당시 22세가 되었던 링컨은 자신의 길을 개척하여 카누를 타고 상가몬 강을 내려가 일리노이 주의 뉴살렘 마을에 도달하였다.
1831년 봄에 링컨은 뉴살렘의 사업가 덴톤 오푸트에게 고용되었고, 친구들과 함께 뉴살렘으로부터 상가몬 강과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올리언스까지 보트로 물건을 실어 날랐다. 뉴올리언스에 도착한 후에 그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청년 시기에 링컨은 우체국장, 변호사, 뱃사공, 가게점원, 토지측량 등 다양한 일에 종사하면서 온갖 고생을 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오하이오 주 국회의원으로 링컨을 경멸했던 제임스 가필드는 링컨 대통령을 가리켜 “일리노이의 이류 변호사가 미래의 모든 세대가 기억할 만한 말을 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다니,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뜻밖의 사건이네.”라고 비아냥거렸다.
링컨은 독학으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다(1833년, 34세). 링컨이 35세 때에 링컨 부부는 링컨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가까운 스프링필드에 집을 한 채 샀다. 메리 토드 링컨은 집에서 부지런히 일했고, 남편이 변호사 일을 해서 벌어오는 한정된 돈을 효율적으로 사용했다. 어느 날 저녁에 메리가 불을 다시 지펴야 하느냐고 네 번이나 물어 보았음에도 링컨이 책읽기에 몰두하여 대답이 없자, 그녀는 장작 조각으로 링컨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이렇게 링컨은 무슨 일을 하면 집중을 넘어 몰입을 하였다. 로버트 토드 링컨이 1843년에 태어났고 에드워드 베이커 링컨이 1846년에 태어나면서, 링컨은 점점 수가 늘어나는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가정부에 따르면 링컨은 "특별하게 자녀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링컨의 가족, 아들 테드에게 책을 읽어주는 링컨
로버트는 링컨의 자녀 중 유일하게 18살을 넘겼고, 에드워드는 아마도 폐결핵이었을 병에 걸려 4살에 스프링필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녀를 잃은 링컨의 슬픔은 윌리엄 월리스 링컨이 11개월 뒤인 이듬해 12월 21일에 태어나면서 그 정도가 완화되었지만, 윌리엄 역시 링컨이 첫 번째 대통령 임기를 수행하던 1862년 2월 20일에 11살의 나이로 워싱턴 D.C.에서 열병으로 사망했다. 링컨의 넷째 아들인 테드는 1853년 4월 4일에 태어났고, 대통령의 사후에도 살았지만 18세의 나이로 시카고에서 요절했다. 이러한 자녀의 죽음은 링컨 부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말년에 메리는 남편과 아이들을 잃은 데서 오는 스트레스에 시달렸으며, 로버트 링컨은 그녀를 1875년에 정신병원으로 보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오늘날에는 임상우울증이라고 불리는 우울한 상태로 인해 고통받았다.
2, 링컨의 CVDIP 리더십
∎COVENANT : “종이나 자유인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노예해방”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이니라(갈 3:28);
There is neither Jew nor Greek, slave nor free, male nor female, for you are ‘all one in Christ Jesus’(Gal 3:28)”
성경말씀의 힘
노예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상속된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의 왕조시대에는 사람을 양반과 상놈으로 구분하는 노예제도가 있었다. 노예제도는 나뿐만이 아니라 내 자손을 대대로 노예의 굴레를 씌웠다. 미국에서도 노예제도가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미국에는 목화 재배 등 노동집약적 산업이 번창하고 있는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약 400여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 노예들은 면화, 담배, 사탕수수 등을 재배하는 플랜테이션이라 불리는 대단위 농장에 일꾼으로 사용되었다. 노예들은 주인들에 의한 신체적 폭행과 고문 등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었다. 간혹 일부 노예는 주인이 착해 좋은 대우를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누구하나 노예제도를 반(反)성경적이라고 하면서 없애려고 하지 않았다.
링컨은 구두 수선공과 벌목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아버지를 둔 가난한 집이라서 노예에 대해서 잘 몰랐다. 링컨은 배우지도 못했고 집안이 좋지도 않았다. 링컨 가족은 좀 더 북쪽인 인디애나주 페리 카운티로 이사를 했다. 링컨이 9살 되었을 때 불행하게도 링컨의 어머니는 그곳에서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친엄마인 낸시 여사는 자신의 가문의 보물인 성경을 유산으로 링컨에게 물려주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했다.
“내 아들 에이브야! 이 책은 나의 부모로부터 받은 성경책이다. 내가 여러 번 읽어 낡았지만 우리 집의 큰 가보이다. 나는 내가 백 에이커의 땅을 너에게 물려주게 된 것보다 이 한 권의 성경책을 너에게 물려주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네가 이 진리의 말씀을 읽고 들으며 이 책대로 살기만 한다면 나는 네가 백만 에이커의 대지주가 되는 것보다 더 기쁘겠다.·····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성서를 읽고 성서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 다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
어머니의 유언 이후 링컨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링컨의 독서습관은 완전히 달라졌다. 링컨은 원래 책 읽기를 무척 좋아했다. 물론 모두 빌려서 읽었다. 링컨이 어릴 때부터 특히 좋아한 책은 이솝 이야기, 로빈슨 크루소, 워싱턴 전기, 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 등이었고 성경은 뒤에 있었다. 그러나 링컨의 독서 우선순위와 중요도가 바뀌었다.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링컨은 가장 많이 성경을 집중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링컨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예수를 깨달으면서 그 안에 감춰진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캐내기 시작했다. 링컨은 자신도 모르게 완전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 말씀이 무장되고 누적되면 될수록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링컨은 갈라디아서를 집중적으로 묵상했다. 링컨의 눈과 가슴은 다음 성경 구절에서 멈췄다. 이 말씀은 곧 청년 링컨의 가슴을 때리면서 그를 사로잡았다. 이 말씀은 링컨의 가슴에 잘 박힌 못과 같았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이니라](갈 3:28)
“창세기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다 평등하게 태어났다. 특히 오늘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라고 하는데 왜 노예가 있는가? 이는 성경말씀에 비추어 맞지 않는다. 노예제도는 비 성경적이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 링컨은 기도하면서 이 말씀을 집중적으로 묵상했다. 링컨이 자라나면서 갈 3:28절 말씀은 그에게 더욱 선명해졌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 할수록 그 말씀은 더욱 링컨의 가슴에 박히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갈라디아서를 영국에서 백성들의 자유를 보장한 권리대장전(Magna Carta)라고도 하고 링컨의 노예해방선언과 같다고도 한다. 이는 링컨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노예해방을 언약으로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링컨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 “우리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말씀에서 “노예해방”이라는 언약을 붙잡는다. 어머니의 유산과 유언 실천으로 인하여 링컨은 ‘노예해방’을 그의 평생의 Covenant로 삼는다.
∎ VISION : “노예를 해방하는 미합중국 지도자”
“내가 만일 노예제도를 없앤다면 지금 사슬에 묶인 수백만의 노예들뿐만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또 다른 수백만의 운명도 바꿀 수 있겠구나” (링컨의 묵상과 비전)
노예제도가 있던 시대
링컨이 노예해방의 언약을 새기고 자라나던 시대는 미국이 신흥대국으로 발전하려고 몸부림치던 시대였다. 당시 북부지역은 인구밀도가 높고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노예제도를 반대했다. 반면에 남부지역은 인구밀도가 낮아 영토가 상대적으로 넓어 목화재배 등 노동집약적 산업을 주로 노예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링컨은 노예해방이라는 언약을 붙잡았지만 이것을 언약적 비전으로 확립되기까지 갈 길은 멀었다. 당시 미합중국에서 뿌리 깊이 내린 노예제도를 없애려면 최소한 대통령은 돼야 했다. 그것도 국민과 의회와 여론의 지지를 받는 막강한 대통령이어야만 한다. 전쟁이라도 불사할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이 없으면 이룰 수 없는 높은 산이었다.
링컨은 막막하기만 했다. 학교 교육이라고는 3년 정도의 초등교육을 받았을 뿐인데 내가 어떻게 이 엄청난 일을…명문가문도 아니고 부유하지도 않으며 22살이 되기까지 농사일과 상점의 점원 노릇을 하던 내가 어떻게 저 엄청난 무시무시한 노예제도를 없앨 수 있을까?
링컨이 22살(1831년) 때 링컨의 가족은 일리노이 주로 이사를 했다. 이제 독립해서 살아야 할 때가 된 링컨은 카누를 타고 미시시피강을 따라 배로 물건을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 그러나 처음 시작한 그의 사업은 실패했다. 그 후 그는 우체국 직원, 변호사, 가게 점원, 토지측량, 장작 패기, 심지어 프로 레슬링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닥치는 대로 한 일들은 링컨이 붙잡은 언약을 비전으로 승화시켜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링컨이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할수록 노예해방의 언약은 더욱 선명해졌다. 특히 링컨은 출애굽기(Exodus)를 읽으면서 430년간 노예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 시킨 하나님의 계획과 지도자 모세를 묵상했다. 모세가 태어나자마자 죽어야 할 운명이었지만 오히려 애굽의 바로왕궁 공주의 양자로 급반전되는 장면에서 링컨은 전율했다. “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지도자는 죽을 운명도 비켜 가는구나!” 아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바로의 왕궁에서 40년을 지내게 하셔서 바로를 알게 하셨구나.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면 광야를 필수적으로 잘 알아야 하기에 광야에서 또 40년을 훈련 시키셨구나! 아! 하나님이 쓰시는 지도자는 하나님이 쓰시기에 맞도록 만들어 가시고 연단시키시는구나! 내가 비록 못 배우고 가진 게 없어도 내가 붙잡은 언약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나를 만들어 가시고 연단시키실 거야. 그렇다면 더 이상 주저하지 말자. ‘평생노예를 자유시민으로 바꾸는 노예해방을 할 수 있는 미합중국의 지도자’라는 이 거룩한 비전을 갖자. 이 놀라운 비전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언약적 비전이기에 어떠한 어려움이 오더라도 성취될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법률공부의 길
이렇게 묵상하면서 링컨은 언약전 비전을 위해 간절히 집중기도를 했다. 정시로 무시로 기도했다. 놀라운 언약적 비전을 품은 링컨은 이제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이 미합중국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를 구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링컨은 하나님께 질문했다. 하나님! 제가 어떤 일을 해야 합니까? 그때 링컨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서 헌법과 법률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이다. 내가 노예제도를 없애는 지도자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법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링컨은 법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법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더군다나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지도 않았다고 두려움을 주는 마귀의 속삭임과 링컨은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데일 카네기가 쓴 ‘나의 멘토 링컨’에 의하면 링컨이 받은 정규 학교교육은 12개월을 넘지 못한다. 15살 때 겨우 알파벳을 알았다. 읽는 것은 겨우 읽었으나 쓰는 법은 전혀 몰랐다. 그러던 그는 아젤 도로시라는 선생님을 만나 쓰는 법을 배웠다. 그 당시 링컨은 책이 없어 주로 읽는 연습은 성경을 보았고, 쓰는 것은 워싱턴과 제퍼슨의 글을 옮겨 적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링컨에게 가장 어려운 법을 그것도 혼자서 공부(독학)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불가능을 절대 가능으로 바꾸신다. 링컨이 법을 공부하려고 기도한 직후의 일이다. 링컨이 일리노이 주 뉴셀렘에서 친구와 함께 통나무 잡화점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이오와 주로 이사 가는 사람이 이삿짐을 줄이기 위해 링컨에게 여러 가지 가재도구를 팔았다. 링컨은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이 측은해서 50센트를 주고 가방을 샀다. 그런데 나중에 가방을 열어보니 거기에 블랙스톤이 주석을 단 법률 서적이 들어 있었다. 링컨은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새로운 법률서적은 그가 전에 한 번도 꿈꾸지 못했던 미지의 세상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법률공부를 하면 할수록 링컨은 그의 언약적 비전이 옳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뿐만 아니라 법 앞에도 평등하구나!”
정치생활과 노예제도
링컨은 1833년에는 관심이 있던 법률을 혼자 공부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법을 공부하던 링컨은 자연스레 정치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정치가가 되어야 지도자가 될 수 있기에 링컨은 무모할 정도로 과감하게 정치에 도전했다. 링컨은 23세(1832년)에 일리노이주 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여 첫 정치 경험을 하였다. 링컨은 잠시 방황했다. 24살 때 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1,100달러의 빚을 진 채 사업은 파산하고 말았다. 링컨은 이 빚을 17년간에 걸쳐 갚아야만 했다. 링컨은 다시 돌아와 언약적비전의 성취를 위해 일리노이주 의회 의원 선거에 다시 도전했다. 링컨은 25살(1834년) 때 주 의회 의원으로 당선됐고 몇 차례 연임도 됐다. 링컨은 일리노이주 의원 당선을 시작으로 정치계에 입문하였다. 37세(1846년)에는 영예로운 연방의회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특히 링컨은 49세(1858년)에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노련한 정치가 더글러스 현역 상원의원과 경쟁을 벌인다. 이때 이들의 논쟁 주제는 노예제도였는데, 당시 링컨은 분열된 집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연설로 노예제도로 대립하던 미국인의 단결을 호소하였다. 결과는 더글러스의 상원의원 재선이었지만, 더글러스와의 논쟁 때 노예제도를 “악의 제도”라고 비판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노예제도 반대론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링컨은 미국의 노예제도의 확장에 대해서 공개적인 반대자였으며, 선거 기간 중 토론과 연설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과 철학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 결과 링컨은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1860년 11월 6일에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자 남부에서는 ‘노예제 반대론자’가 대통령이 된 것에 대해 위기감을 공공연하게 드러냈고, 링컨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남북전쟁이 일어난다. 노예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상속된다는 것이다. 링컨이 언약의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노예해방에 관한 그 언약과 비전은 더욱 선명해졌다. 전쟁을 통해서라도 노예해방을 이룩해야만 했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1860년 11월 당시 연방정부 소속 지역, 즉 북군 지역에는 총인구가 1천850만 명이고 노예는 거의 없었다. 남부 연방에는 백인 550만 명과 노예가 350만 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 지역 주에 자유민이 250만 명, 노예가 50만 명에 달했다. 그러니까 노예 총수는 약 400만 명이나 됐다.
“내가 만일 노예제도를 없앤다면 지금 사슬에 묶인 수백만의 노예들뿐만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또 다른 수백만의 운명도 바꿀 수 있겠구나”
링컨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노예해방을 하는 미합중국 지도자’라는 이 거룩한 비전(Vision)을 포기할 수 없었다. 말씀을 보고 기도하면 할수록 링컨의 비전은 더욱 선명해졌다.
∎Dream: : “노예제도를 헌법과 통치로서 영구히 폐지시키는 미합중국 대통령”
일리노이주 의회 의원으로 정치활동을 하면서 그리고 법률공부를 하면서 링컨의 ‘언약적 비전(Covenant Vision)’은 분명하고도 ‘생생한 꿈(Vivid Dream)’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그려져 갔다. 링컨은 미국의 역사와 현재의 시국 상황을 진단하였다. 미국은 1774년 7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프랑스의 지원에 힘입어 178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았다. 이어서 1787년에 〈미합중국 헌법〉이 공표되고, 1789년에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리더십으로 연방국가가 발족하였다. 미국은 독립 후에도 프랑스·에스파냐 등으로부터 영토를 획득하여, 1848년에는 31개의 주로 거의 현재의 규모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런데 특히 미국이 출범하게 된 중심인 동부의 버지니아주를 비롯한 남부지역에서 대부분 아프리카에서 잡아 온 노예를 무려 350만여명이나 거느리고 있었다. 이러한 노예를 해방시키는 일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남부지역에서 노예를 없애는 것은 그들의 산업을 모두 폐허로 만드는 것과 같았다. 미국이 반쪽으로 쪼개질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설령 링컨이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의회와 군대와 여론 특히 국민의 강력한 지지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링컨이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할수록 언약적 비전은 생생한 꿈으로 다가왔다. 그것이 아무리 큰 산이라도 막을 수가 없었다.
노예제도는 헌법과 법률, 그리고 국민의 지지와 통치에 의해 제도적으로 영구적으로 없애야만 한다. 이제 링컨의 언약적 비전은 분명하면서도 생생한 꿈(Dream)으로 확실해 졌다. 링컨에게는 “노예제도를 헌법과 통치로서 영구적으로 폐지시키는 미합중국 대통령”이라는 분명한 꿈(Dream)이 그려졌다.
∎ IMAGE: “노예해방과 그 이후 분열된 미합중국을 통합시키는 지도자”
일리노이주 의회 의원으로 정치활동과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링컨은 생생한 꿈을 Image화(형상화; 形象化)하기 시작했다. 이제 링컨은 노예해방선언의 모습을 분명하게 Image로 각인하면서 이를 실현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노예해방을 선언한 이후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미합중국을 분열시키지 않는 대통합의 그림(Picture)도 그려나갔다. 이 분명한 Image의 실현을 위해 링컨은 집중적으로, 정시로, 무시로 기도하면서 더욱 선명한 Image Shot(이미지 샷)을 구사했다. 이제 링컨은 그의 이미지 실현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링컨은 일리노이주에서 연방정부를 향하여 더 큰 정치무대로 눈을 돌렸다. 링컨은 31살(1840년) 때 연방정부 정・부통령 선거위원에 도전했다가 낙선됐다. 35세 때 연방 하원의원에 도전했으나 또 떨어졌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였다. 드디어 37세 때인 1846년에는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당선됐다. 생생한 꿈과 선명한 이미지의 실현을 위해 링컨은 중앙정계에 진출한 것이다. 그러나 연방 중앙정치 무대는 녹록치 않았다. 링컨은 그만 재선에 실패하고 말았다. 할 수없이 링컨은 어렵게 진출한 워싱톤 중앙무대에서 다시 내려왔다. 그래서 링컨은 일리노이 주 수도인 스프링필드에서 변호사 생활을 계속했다. 링컨 연구가 해럴드 홀저에 의하면 링컨은 변호사로서 명성을 점점 높이고 있었다. 링컨의 법률서류는 그가 다양하고 수입이 좋은 변호 업무를 수행했음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링컨은 명성과 돈보다도 하나님께 받은 분명한 이미지를 향해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비록 번번히 실패했지만 굽힐 줄 몰랐다. 매일 매일의 말씀 묵상과 기도가 링컨을 다시금 도전하게 하였다. 그래서 링컨은 49세(1858년)에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노련한 정치가 스티븐 더글러스 현역 상원의원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때의 선거 쟁점은 노예제도였다. 링컨은 그 자신이 말했듯 1854년 상원 출마에 앞서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에 대한 반대 주장을 펴지 않았더라면 변호사로 남아 명성과 부를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링컨의 언약적 CVDIP는 미합중국 대통령이 되어 노예제도를 영구히 폐지 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계속 연방 중앙무대에 우뚝 서는 정치가의 길에 도전했다. 링컨은 비록 상원의원 선거에서 패했지만 더글러스와의 논쟁 때 노예제도를 비판해 노예 반대론자라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주게 되었다. 그 결과로 링컨은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확보하게 됐다. 부통령 후보는 하니발 햄린이었다. 선거에는 4명의 후보가 나왔지만 사실상 민주당의 스티븐 더글러스 후보와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 후보의 대결이었다. 이 더글러스 후보는 바로 일리노이 주에서 링컨을 물리치고 상원의원에 당선된 인물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도 노예 문제는 첨예한 쟁점이었다. 미국에는 16세기부터 주로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이 팔려왔다. 이들은 대규모 농장, 즉 목화, 담배 등을 재배하고 가공하는 데 사용됐다. 노예를 이용한 농장주들은 엄청난 부를 누렸다. 노예를 소유한 대 농장 주들은 주로 남부에 있었다. 반면 북부는 상공업이 발달해 있어서 비인도적인 노예제에 반대했다. 남부는 노예제 폐지가 곧 자기들의 몰락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보다는 차라리 독립해서라도 노예제를 유지하려고 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던 링컨은 마침내 결국 노예제도 폐지 입장을 내세워 1860년,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노예해방과 그 이후 분열된 미합중국을 통합시키는 지도자”라는 링컨의 이미지는 점차 실현되고 있었다.
∎PRACTICE: “전쟁으로라도 노예해방의 실현과 미합중국의 대통합 이끈 지도자”
그러나 대통령이 되자마자 링컨은 미합중국의 분열이라는 엄청난 위기에 봉착했다. 노예를 고집하는 남부의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해 다른 나라를 수립하였다. 사우스캐롤라이나가 1860년에 맨 처음 탈퇴를 선언하더니 다음 해가 되자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 등 모두 7개 주가 링컨 취임 전에 줄줄이 연방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들은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이라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그들의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국기도 다른 것을 사용했다. 미국 땅에 2개의 정부와 2명의 대통령이 있는 모양이 됐다. 그뿐만 아니라 링컨 대통령의 취임 다음 해인 1861년에 미국 역사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버지니아도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남부에 가담했다. 링컨은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 마침내 대통령이 되어 언약적 비전과 생생한 꿈과 이미지가 성취되나 했더니 이제껏 겪지 못한 초유의 어려움에 직면하고 말았다.
링컨은 말씀을 집중적으로 묵상하면서 대통령 집무실인 백악관을 아예 기도실로 만들었다. 링컨은 깊은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렸다. 노예해방을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해야 했으나 링컨은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링컨이 대통령이 된 지 불과 한 달 만인 1861년 4월 12일, 남부연합군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포트섬터라는 북군 요새에 포격을 개시했다. 양 측의 희생자는 없었으나 북군은 이 요새를 남군에 빼앗겼다. 4년 동안 60만 명의 미국인들이 목숨을 잃는 처절한 전쟁, 즉 남북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공격이었다.
미합중국의 대통령 링컨은 남군의 포격 소리를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노예해방을 해내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였다. 대통령 링컨은 북부 각 주에 동원령을 내려 군대를 조직했다. 전쟁 중 아메리카 연방에는 주로 동북부와 태평양 연안 서부의 23개 주가 있었고, 남부 연방에는 13개 주가 있었다. 전쟁이 발발한 해인 1861년에는 남군과 북군이 각각 약 20만 명 정도로 양측의 병력 규모는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1863년에는 북군이 약 60만 명, 남군이 약 20만 명으로 남군이 크게 열세였다.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남군에는 걸출한 로버트 리 장군이 있어서 전쟁은 남군이 계속 우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전황은 처음에는 북군이 불리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북군이 유리한 국면으로 조금씩 바뀌었다. 대통령 링컨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전쟁이 유리한 국면으로 접어든 1863년, 새해 첫날을 기해 링컨 대통령은 담대하게 노예제 폐지를 선언했다. 연방정부로부터 떨어져 나간 주, 즉 남부 연방 소속 주의 노예를 전면 해방한다는 내용이었다. 평생 노예로 사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흑인들은 링컨 대통령을 지지하였다. 전쟁 중 북군에 자원입대한 흑인 병사의 수가 17만9천 명이나 됐던 걸 보면, 흑인들도 노예해방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링컨을 도와주려 애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북전쟁의 결정전, 또는 전환점이 되는 게티즈버그 전투는 1863년 7월 1일에 시작됐다. 남북전쟁에서 가장 처절했던 이 전투는 불과 사흘 동안 남북 군 합쳐 사망이 6천600여 명, 부상이 3만2천, 포로 또는 실종이 1만2천 명에 달했다. 남군 북군 모두 비슷한 사상자를 냈으나 숫적 열세가 극심한 남군이 결국 패하고 물러났다. 남북전쟁은 게티스버그 전투 후에도 계속됐으나 급격히 기울기 시작한 남군은 1865년 4월 9일 항복했다. 아포마톡스 코트하우스 라는 곳에서 남군의 로버트 리(Robert E. Lee) 장군은 북군의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Grant) 장군에게 항복했다. 그리고 굶주리는 남군 병사들을 위해 많은 식량을 제공하기도 했다.
천국으로 간 링컨 대통령
유명 배우이자 남부 지지자였던 존 윌크스 부스는 링컨을 인질로 잡아 남부 포로를 석방하기 위한 계획을 짰다. 그러나 1864년 4월 11일 링컨의 흑인 투표권을 위한 연설을 들은 후 몹시 화가 난 부스는 그의 계획을 수정해 링컨을 암살하기로 한다. 대통령 부부가 포드 극장에 연극을 보러 갈 예정임을 알고, 부스는 공범자들과 함께 부통령 앤드루 존슨과 서기 윌리엄 H. 세이워드를 암살하기로 한다. 때 마침 그의 경호원이 잠시 극의 막간에 링컨의 마부들과 한잔하기 위해 옆의 ‘스타 살롱’(Star Saloon)으로 나가 있어서 대통령은 발코니의 관람석에 무방비 상태로 앉아 있었다. 기회를 노리던 부스는 뒤에서 기어 나와 오후 10시 13분에 링컨의 바로 뒤에서 머리를 겨눠 치명상을 입혔다. 헨리 래스본 소령이 부스를 잠시 동안 붙잡는 데 성공 했지만 부스는 그를 찌르고 탈출했다. 10일 후 부스는 체포조와 대치하다가 사살된다. 총격을 당하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링컨은 4월 15일 오전 7시 22분에 사망하여 천국으로 갔다.
전쟁 서기관 스탠튼(Stanton)이 경례를 하고 “이분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이후, 주변에 있던 장로교 목사 피니어스 덴스모어 걸리(Phineas Densmore Gurley)가 임종 당시 기도를 올렸다. 비 내리는 동안 성조기에 싸인 링컨은 장교들에 의해 예를 갖추어 백악관으로 옮겨졌으며, 도시의 교회에서는 조종이 울렸다. 링컨은 수도에서 최후 매장지인 스프링필드로 기차를 통해 옮겨졌다. 뜻밖에도 링컨이 암살된 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수난절이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링컨에게서 워싱턴과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느낀다고 말한다.
링컨 대통령은 2차 임기를 시작한 지 한 달이 겨우 지난 4월 15일 극렬 반대파에 암살당해 순교했다. 링컨은 영웅, 성자, 순교자가 되었으며, 실제 큰 그의 키(197cm) 만큼이나 역사의 거인(巨人)이 되었다. 그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과 역사를 바꿔 놓았다. 그의 신념대로 당시 지금 있는 수백만의 노예뿐만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수백만 노예의 운명을 바꿨다. 링컨은 성경 말씀과 기도를 통해 붙잡은 CVDIP 리더십으서 평생노예를 자유시민으로 바꾸는 불멸의 인생작품(Practice)을 남겼다. 링컨은 리더십의 금자탑으로 우뚝 섰다. 150년이 넘는 지금까지 리더들은 자문한다. “만약 링컨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열린 마인드 : 턱수염
한번은 링컨이 대통령 선거운동 중에 편지를 한 통 받았다.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저희 마을 아주머니들이 아저씨의 얼굴은 너무 마르고 광대뼈가 튀어나와서 못생기고 차가워 보인대요. 만일 아저씨가 턱수염을 기른다면 따뜻한 인상을 갖게 되어 친근감을 줄 것 같아요.” 그레이스 베델이라는 소녀가 보낸 편지였다. 링컨은 곧 답장을 보냈다.
“베델 양의 충고를 깊이 생각해 볼게요.”
그리고 링컨은 정말로 턱수염을 길렀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멋진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어린아이의 말도 귀담아 들었던 링컨은 어떤 이야기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었다.
실패의 아이콘
지금까지 독자 여러분이 읽은 대로 링컨의 일생은 순탄치 않았다. 링컨은 결코 좋은 조건을 갖고 태어나지 못했다. 그에게 좋은 환경과 부모가 있거나, 그 주변에 좋은 사람과 물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실패의 조건은 많았고, 성공의 조건은 없었다. 링컨을 연구한 한 학자는 링컨이 70번이나 실패했다고 한다. 그래서 링컨의 일생을 가리켜 실패의 아이콘이라고 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링컨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공부하며 많은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자신을 갈고닦았다. 4살 때 여동생이 죽었으며, 6살 때부터 일을 했으며, 9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결혼할 약혼자도 갑자기 죽어서, 심한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아 병원에서 6개월간 입원하여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 사업을 하다 두 번이나 문을 닫았고, 각종 선거에서 8번이나 낙선했다. 두 아들도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링컨은 평생에 걸쳐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좌절과 포기를 하지 않고 실패를 더 큰 성공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어머니가 물려준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면서 지혜를 얻었으며, 노예해방과 남북전쟁을 승리로 장식했다.
성경말씀과 기도의 힘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노예를 시민으로 바꾼 링컨의 비밀은 무엇일까? 무수한 실패를 계속 겪으면서도 굽힐 줄 모르는 도전정신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 누구보다도 정직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알려진 링컨의 위대한 리더십의 비밀은 어디 있으며, 그리스도를 닮은 이 위대한 정신의 근원은 어디 있었던가?
그것은 옥토와 같이 순수한 어린 아들의 마음 밭에 그를 극진히 사랑해 주고, 인정해 준 그의 생모 낸시와 계모 사라의 지속적인 말씀과 기도의 씨앗이 잘 뿌려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링컨이 스스로 어머니의 유산과 유언을 각인하여 말씀과 기도를 뿌리내리고 체질화한 것이 원동력이었다. 바로 말씀과 기도의 능력이 링컨의 CVDIP 언약의 여정이요, 승리하고 성공하는 비밀이 된 것이다.
사실 링컨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남북전쟁(Civil War)이라는 미국 역사 상 최대의 위기를 만났다. 대통령이 되기까지도 수많은 난관과 고난이 닥쳐왔다. 주요한 직책만도 15번이나 떨어졌다. 그러나 그때마다 링컨은 실망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계속해서 도전하고 도전했다. 말씀이 각인되고 뿌리내리고 체질화되었기에 항상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링컨은 대통령이 되어 백악관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었다. 그는 백악관에 들어가서 더욱 일심-전심-지속으로 열심히 기도했다. 먼저 기도하며 온 국민에게 1863년 4월 30일 목요일을 금식기도일로 제정해서 국민들이 기도에 참여하도록 했다. 오늘날 미국은 위기가 있을 때마다 항상 이것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링컨의 기도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노예해방 문제로 일어난 남북전쟁 시 남군에는 위대한 명장 로버트 리 장군이 있었고 또 모든 면에서 남군이 우세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열악한 북군이 싸움에서 승리를 하게 된다. 링컨은 전쟁이 끝난 후에 이렇게 고백했다.
“북군의 승리는 기도의 승리였습니다. 우리에게 남군의 로버트리 장군 같은 명장이 없었음은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링컨은 훗날 대통령이 된 다음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내가 어려서 글을 읽지 못할 때부터 어머니께서는 날마다 성경을 읽어주셨고, 나를 위해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으셨습니다. 통나무집에서 읽어주시던 성경 말씀과 기도 소리는 지금도 내 마음을 울리고 있습니다. 나의 오늘, 나의 희망……, 이 모든 것은 천사와 같은 내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링컨이 얼마나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였는지 다음 링컨의 신앙 십계명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링컨의 신앙 십계명 |
1. 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열심히 예배를 드릴 것이다. 2. 나는 날마다 성경을 읽고 실천 할 것이다. 3. 나는 매일 하나님께 기도 할 것이다. 4. 나는 하나님께 순종 할 것이다. 5.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 할 것이다. 6. 나는 약하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 할 것이다. 7. 나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것이다. 8. 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자유롭고 평등 하다고 믿을 것이다. 9. 나는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할 것이다. 10. 나는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가 이 땅에 실현되도록 기도할 것이다. |
그뿐만이 아니다. 세기의 명연설로 알려진 게티스버그 연설도 다 그리스도 안에 감춰진 지식과 지혜의 보화를 링컨이 캐내어 잘 다듬었기 때문이다.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하나님! 이 나라를 하나님이 지배하셔서 새로운 '자유'를 탄생케 하시고, 이 정부가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가 되어 이 땅 위에서 멸망하지 않게 하소서)"
링컨의 일생을 그린 작가가 말하기를, ‘하나님은 그에게 가난과 신앙의 훌륭한 어머니만 주셨을 뿐’이라고 했다. 링컨의 친어머니 낸시 여사는 가난한 가정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지만 늘 링컨을 데리고 들로 다니면서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솜씨와 능력,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만드신 만물을 잘 가르쳐 주었다. 링컨은 어머니로부터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안타깝게도 링컨의 어머니는 링컨이 9살 때 풍토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녀는 어린 링컨에게 마지막 유언을 하고, 성경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링컨은 돌아가시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마지막 물려주는 성경과 유언의 말씀을 깊이 각인하였다. 링컨에게 잘 각인되고 뿌리내리며 체질화된 말씀과 기도의 힘은 승리의 비밀이었다. 사실 링컨은 이미 어릴 때부터 비록 통나무집이지만 어머니로부터 말씀과 기도의 비밀을 각인하고 뿌리내리면서 세상을 바꾸는 위인의 길로 자신도 모르게 가고 있었다. 게티스버그 연설 등 명연설과 명언 그리고 수많은 책을 남긴 미국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존경받는 지도자가 된 것이다. 무엇이 그를 역사의 거인으로 바꾸었을까? 그것은 바로 말씀과 기도의 힘! 이것이 링컨의 CVDIP 언약의 여정의 비밀이다.
[다음호: 눈이 먼 찬송 시인 패니 크로스비 ]
세계복음화 협회 세계군선교연합회 회장
렘넌트 신학연구원(RTS) 왜래교수(2022년도 2학기~)
강서대학교 국제교육교류원 초빙교수
육군사관학교 졸업, 대령 전역
전 국방대학교 안보대학원 교수
전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주요저서
세상의 틀을 바꾸는 CVDIP 리더십(2019)
나를 바꾸는 리더십(2019)
영화로 본 리더십(2018)
현대 북한 이해 (제1판~4판; 2016-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