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에 일어난 6.25 전쟁은 영토나 국가 이익 때문이 아니라 김일정 정권이 일으킨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 내전의 성격에서 시작된 전쟁이 전면전 국제적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동족 간의 참살과 함께 민족분단은 영구화 되었다. 특히 교회가 입은 상처는 심각했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반공 이념의 보루가 되었고, 냉전을 내면화 하게 되었다.
▲ 6.25 남침을 일으킨 북한군의 남하 장면
이 전쟁으로 교회의 피해는 심각했다. 피난하지 않고 교회를 지키던 다수의 선교사와 한국교역자들이 납북되었다. 당시 알려진 납북자는 (장로교) 송창근, 남궁혁, 김영주, 유재헌, (감리교) 김유순, 양주삼, 방훈, 김희운, 조상문 (성공회) 윤달용, 조용호, 쿠퍼(생존귀환), 헌트, 리, 클라라, 박현명, 이건, (구세군) 김삼석, 김지하 사관 등 이며. 전남영광군 야월교회, 염산교회, 충남논산의 병촌교회에서 수십명 단위로, 황해도 신천은 가장 많은 주민들이 집단 학살을 당했다.
북한 공산당은 수많은 기독교 목사와 성도들을 학살했다. 임인선 목사, 김윤실 목사, 김익두 목사, 박경구 목사, 산정현 교회의 유계준 장로, 백인숙 전도사, 신당동 중앙교회 안길선 목사, 김예진 목사, 주채원 목사, 김응락 장로, 전주 원당교회 73명 살해, 삼례교회 김주현 목사와 7인 가족, 광주 양림교회 박석현 목사와 장모, 부인, 외아들, 황해도 봉산 계동교회 175명을 불태워 죽였다.
▲ 북한군의 양민학살
더불어 예배당을 불태우거나 파괴했다. 통계에 따르면 장로교 소실 152동 파손 467동, 감리교 소실 84동, 파손155동; 성공회 소실 27동 파손79동, 구세군 소실 4동, 파손 4동 이지만 일부에 불과한 기록이다.
▪ 6.25 남침 관련 남북한 교회 동향
전쟁의 포화속에서 남한 교회는 1950년 7월 대전제일교회에서 “대한기독교구국회”를 결성하고, 각 지회를 설치해서, 국방부와 사회부와 연결하여, 선무, 구호, 방송활동을 하고 의용대를 조직하였다. 1950년 10월 31일 “평양탈환 축하 대규모 집회”에 (이인식, 윤하영, 한경직, 김양선 등, 애담스, 뵐켈, 쇼 등, 황은균, 강원룡, 조향록 등 선무활동). 3000명의 신도가 서문 밖 교회에서 유엔군을 환영하였다.
또 1951년 1.4후퇴 당시 교역자들과 수많은 기독교 반공행위자들이 남으로 피난하여 1백만 명 이상이 서울을 떠났다. 남한교회는 “기독교연합 전시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 유엔사무총장, 유엔군사령관에게 호소문을 보냈다. 또한 한경직, 류형기 목사를 미국에 파견하여 지원을 호소하였다.
남한교회는 휴전반대 운동을 최고의 구국행위로 인식하였다. 1953년.봄 휴전을 반대하였고, 1953년 6월 서울 기독교인들은 북진통일 기원대회를 열였다.
WCC 국제문제 교회위원회 총무 놀드는 휴전을 성사시키기 위해 내한하였는데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한국교회와 정치인들에 대해 “다소 비현실적인 견해”라는 입장을 보였다.
반면 북한내 교회는 1950년 6월 인민군의 서울 점령 후 북한교회 일부지도자들이 평양에 모여 환영예배를 드렸다. 1950년 8월 평양 서문밖교회 북조선기독교도련맹 중앙위원, 지구연맹대표들, 북한전역의 목사 전도사 등이 궐기대회를 열고 정의의 성전에서 승리하도록 예배하고 기도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북한정권에 동조하지 않고 1951년 반공활동에 가담했다 월남하지 못한 기독교인들은 큰 시련을 겪었다. 서로 통할 수 있는 몇 사람이 모여 눈물의 기도를 하는 정도의 신앙생활이 전쟁 중에 시작되었고 이것이 가정교회의 출발이었다.
▲ 당시 조선그리스도교인이 사용한 성경책
6.25 전쟁당시 한국교회의 양면을 보인 것 역시 불행한 역사이다. 한쪽은 공산당에 의해 학살된 반면 그 정권에 기쁨조 역할을 한 일부 북한교회의 슬픈 단면이다.
그러나 당시 월남하지 못하고 지하 가정교회를 이루었던 그 후손들이 가정교회를 이루고 렘넌트로서 북한복음화의 그날을 손꼽아 기도한 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윤광식 기자(kidok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