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선교현장르포(6) - 탈북 소녀와의 만남

“북한복음화, 남북통일 위해 쓰임 받고 싶어요"

2013-11-04 12:57:46  인쇄하기


13년 전, 국경지대에서 꽃제비같이 고아로 굶주리고 있던 왜소한 소녀가 그리스도를 만나 믿음 생활을 하면서 지금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공부중이다. 그녀는 북한복음화와 세게복음화에 더 큰 일에 쓰임 받겠다고 싶다고 했다. 

2000년 5월경. C국의 조선족 자치주인 연길시의 몇몇 탈북자 가정을 방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성경책과 약간의 생활비를 전달하였다. 그리고 프리랜서 기자와 조선족 시인과 함께 새벽 5시에 연길 버스 정류소에서 장백현(우리나라의 읍)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 버스는 연길과 장백현을 이틀에 한 번씩 오가는 버스였다. 
백두산을 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고 하고, 백두산 아래에는 장백현이라는 읍이 있다. 장백현 맞은편에는 북한의 해산시가 있는데, 인구가 약 30만 명 정도의 큰 도시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국경 도시이다. 장백현에는 서울의 감리 교단의 한 교회에서 지어 준 장백현 조선족 교회가 제법 큰 규모로 잘 지어져 있었다. 그곳의 장 전도사(지금은 목사)에게 선교비를 후원하면서 탈북자 선교를 협력하였다.

▲국제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김성희 양.
  (세계복음화신문사 제공)

버스에는 미리 와서 자리를 잡은 사람들로, 버스의 뒤쪽 의자 몇 줄에는 아예 의자 없이 짐들과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가다 보면 자리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바램을 가지고 서서 갈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포장도로를 내달리기 시작한 버스 안은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먼지로 가득했다. 갈수록 내리는 사람들보다 타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나중에는 짐들을 버스 지붕에 얹다 못해 줄로 매기까지 했다.

하루 종일 달리고 달려서 밤 7시경에 국경 도시인 장백현에 도착하였다. 우리 일행은 여관으로 들어갔는데, 여관방의 화장실에는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다. 얼굴과 목엔 온통 먼지였고, 손 역시 흙먼지로 시커멓게 되었지만 물이 나오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그냥 잘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여관에서 주는 간단한 식사를 하려고 나왔다. 그런데 옆방, 옆방에서 나오는 사람들 모두 북한에서 온 사람들로 왼쪽 가슴 쪽에 김일성, 김정일 빼지를 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덜커덩 겁이 나면서 ‘여기가 국경이구나’ 생각하였다.

그곳에서 전도사를 만났고, 그 전도사는 북조선에서 금방 넘어온 다섯 명이 있으니 만나 복음을 전해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한 조선족 집에서 사흘 동안 계속 복음을 전하였다.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여자들이었다. 모두가 한 결 같이 굶주림에 지쳐 식량을 구하러 나왔다고 하였고, 가족들이 북한에서 굶주리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도와달라고 간청하였다.

사흘간 빵과 음료수를 시켜 먹으면서 복음을 전하고 또 복음을 전하였다. 그중 19세 소녀 김성희(가명) 양은 부모님 두 분 다 굶주림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자신은 네 자매 중 막내이며, 자매들 모두 C국으로 넘어왔지만 다 흩어져 지금은 어디에 사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그 당시 성희 양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도 김정일이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면 즉시 반발하였다. 왜 위대하신 우리 장군님을 욕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위대한 장군님이 인민들을 다 굶겨 죽이느냐고 말했더니 그것은 밑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지 장군님을 욕하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고 반발하곤 하였다.
사흘이 지나 네 사람은 다시 북한으로 들어갔고, 성희 양은 북한에 들어가 봐야 가족도 없으니 들어가지 않겠다고 해 식당에서 일할 것을 권하면서 다시 찾아와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이후로 몇 달에 한 번씩 그 지역으로 갔고, 갈 때마다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성희 양은 연길로 와서 일을 하면서 합숙 훈련도 받고 신학원에서 공부도 했다. 그런 다음 한국으로 데리고 왔다. 한국에서 조사를 받던 중 큰 언니가 몇 년 전에 한국으로 와 서울 어느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원에서 퇴소하자 언니와 함께 살게 되었지만 다른 두 언니들의 소식은 알 수 없었다. 
큰 언니는 이미 중국에서 한족을 만나서 아들을 하나 낳아 한국으로 들어온 상태였고, 지방에 내려가 일하다 한 번씩 서울로 올라오는 탓에 동생에게 조카를 맡겼다. 게다가 동생에게 교회를 가지 말라고 했다. 언니의 눈치를 봐가면서 성희 양은 몰래 몰래 교회로 나왔다. 그러면서 검정고시 학원에서 공부를 하며 중·고등학교 과정에 합격한 후 외국어대 중국어과에 입학했다. 외대를 다니면서 뉴질랜드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교환 학생으로 가는 등 누구보다 학업에 열중하여 졸업하였다. 그리고 국회에서 인턴 과정까지 연수하였다.

한편 언니는 자녀의 공부를 위해 캐나다로 떠났는데, 그곳에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해 신실한 신자로 바뀌었다. 현재 성희 양은 수도권에 있는 어느 국제 학교의 교사로 취직해 중국어를 가리키고 있다.
어느 날 나의 차를 타고 부평에서 예배를 마치고 송도 교회로 예배드리러 가던 성희 양은 “목사님, 저는 아직 결혼 상대자가 없어요. 공부하느라 연애를 못했어요. 열아홉 나이에 국경지대에서 목사님을 만나 어느 덧 서른두 살이 되었어요. 미국으로 가 더 공부하고 싶어요. 박사가 되어 남북통일을 위한 일에 뭔가 역할을 하고 싶어요. 목사님께서 저를 도와주셔서 미국으로 가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 한번 기도해보자고 말했다.

작년 여름에 워싱턴 합숙 훈련의 강사로 가게 되면서 워싱턴 한마음교회 이동철 목사에게 성희 자매 이야기를 전했다. 이 목사는 2월 선교대회 때 나와서는 성희 자매를 만났고, 미국에서 더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찾아봐주겠다고 하였다.
성희 양은 지금,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며 북한 복음화와 남북통일을 위한 과정에 작게나마 쓰임을 받고자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다. 13년 전, 국경지대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꽃제비같이 고아로 굶주리고 있던 왜소한 소녀이었지만, 그리스도를 만나 믿음 생활을 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을 성장시켜 나갔다. 이제 곧 미국으로 건너가 몇 년 만 더 공부하면 박사가 될 것이고, 더 큰 일에 쓰임을 받으리라 생각한다.
  성희 양의 앞길에 주의 은혜가 늘 함께 하기를 바란다. 부디 북한 복음화의 주인공으로 쓰임 받으라고 주님께서 지금까지 인도하셨음을 잊지 않길, 언약 붙잡고 성령 충만 가운데 하나님께 계속 쓰임 받는 전도자가 꼭 되기를 소망한다.
/북한선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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