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제비들에게 복음을 전한 후 며칠간 함께하며 배를 타고 있는 모습이다.
1998년 12월 C국의 Y공항에 내리니 북한에서 건너온 꽃제비(구걸하는 아이들)들이 7~8명이 나를 따라 다니면서 ‘좀 도와주세요. 조금만 도와주세요.’ 하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추운 겨울에 영하 30도 가량 되는 한파 속에서 꽃제비들은 얼마나 씻지 않았던지 옷차림과 얼굴이며 손이 연탄 배달하다가 온 아이들 같았다. 아이들에게 돈을 조금이라도 주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금세 20여명이 달라붙으며 ‘나도 도와주세요. 나도 도와주세요.’ 라고 손 벌리고 따라 다닌다.
함께 동행한 기자는 도와주는 것은 좋지만 이렇게 많은 아이들에게 집단적으로 주는 것은 좋지 않다며 만류했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밖으로 나오니까 호텔 앞 골목에 숨어있던 꽃제비 아이들이 3~4명이 나타나서 도와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조금씩 도움을 주고 시장 안으로 갔더니 그곳에도 역시 꽃제비 아이들이 여러 명 우리 일행을 따라다니며 도와 달라고 했다. 배가 고프다고 하면서 몇 일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새벽 1시에서 2시 경에 Y시내를 다녀보았는데 그 시간에 추운 한파 속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는 탈북자들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어느 탈북 아주머니에게 나는 조용히 다가가서 돈을 전달하면서 손을 잡아주었다. “저는 남쪽에서 온 목사입니다. 마음속에 꼭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라고 권면했다. 그러나 워낙 추운 밤 길거리에서 길게 전도할 수가 없었기에 간단하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하면서 약간의 돈을 전해줬다.
다음날 기자와 함께 시장에 가서 식량과 의약품등 생필품을 구입하여 여러 봉투에 담아서 자루에 넣어 국경지대로 갔다. 국경시대의 어느 조선족 집에 숨어있는 탈북자를 만나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분은 며칠 내로 가족이 기다리는 북한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그분에게 한국에서 가져간 옷을 몇 점 전해주었는데 옷의 레벨을 다 떼어 내고 전해주었다. 약간에 식량과 의약품과 돈도 전달했다. 그 탈북자는 병든 남편과 굶주리는 아이들이 기다리는데 굶주리다가 국경을 넘어서 도움을 받으려고 건너왔다고 했다.
기자와 나는 국경지대의 강변으로 나갔다. 나는 자루에 든 식량과 의약품 및 양말, 장갑 등이 든 자루를 메고 강을 걷기 시작했다. 두만강 상류였기 때문에 폭이 넓었고, 강 중앙의 흐르는 물은 얼어 있었으며 강변의 자갈밭에 눈이 많이 쌓여있었다. 자루를 메고 강 중간쯤으로 걸어가니 어느새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났는지 북한 군인들이 10명 넘게 나타나서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어떤 군인은 망원경으로 나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여 보고 있었고 그 군인 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총을 메고 서서 나를 향하여 어서 건너오라고 하였다.
나는 강 중간까지는 갔지만 도저히 더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메고 간 자루를 강 중간의 얼어있는 얼음위에 내려놓고 돌아서서 도망치듯이 달려 나왔다. 기자는 그 광경을 숨어서 촬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 보니까 그 자루는 북한 군인들이 가져가고 없어졌다.
조금 더 차를 타고 들어가니 북한 아이들이 얼음 타기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30여명은 되어 보였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역시 가지고 간 사탕과 과자류를 봉투에 넣어 산 윗길에서 산 아래 얼음 채치기를 하는 아이들에게 던져 주었는데 아이들은 그것을 받으면서도 욕을 하는 것이었다.
밤이 되자 국경지대에는 많은 차량들이 C국에서 북한 쪽으로 들어갔는데 밀수하는 차량들이라고 안내를 맡은 조선족 현지인은 알려주었다. 조선인 자치주의 8도시 중 한 곳인 룡정의 어느 식당에 북한에서 온 가족이 있다기에 찾아갔더니 13세 된 소녀가 식당에서 청소와 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그 소녀는 순화(가명)였는데 아버지가 굶주리다가 결핵으로 죽고 오빠는 꽃제비가 되어 북한 여기저기서 얻어먹으며 다니고 있고, 엄마랑 같이 강을 건너서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순화 엄마는 이곳에 와서 식당에서 같이 일하다가 살기위해 혼자 사는 한족에게 갔다고 했다. 순화 엄마도 병이 들어 건강이 너무나 안 좋았고 지난번에 강을 건너왔다가 다시 북한으로 들어갈 때 군인들에게 붙잡혀 너무 많이 맞아서 식당에서 일 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아 한 족 집에 팔려갔다는 것이다. 나는 불쌍한 순화에게 복음을 전했고 영접 시킨 후 그 아이를 끌어안고 울었다. 한국에서 가져간 옷과 돈을 전달해 주고 꼭 기도해 믿음으로 살기를 부탁하고 또 만나자고 하고는 헤어졌다.
Y시에 밤늦게 도착했다. 그 당시 한국 KBS 방송국에서는 밤 9시 뉴스가 끝난 뒤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 한참 동안 진행됐다. 북한에서 남한의 가족을 찾는 사람들이 어느 아파트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굶주리다가 남한의 혈육 친척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었다.
C국의 어느 공휴일, 한국 시간으로 밤 10시에 왕종건 아나운서 진행하는 이산가족 찾기의 ‘제 3국의 현지 나와 주십시오.’ 하는데 그 장소에 내가 있었다. 그 생방송이 있기 며칠 전 미리 연락받고 모여 있는 아파트에 방송관계자와 기자와 나, 그리고 북에서 온 사람들 여러 명이 생방송을 대비해 방송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낮에 그 장소에게 가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는데 성령님께서 ‘저 북에서 온 사람들에게 빨리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방으로 불러들여서 그들의 딱한 사정을 들어주고는 복음을 전하고 일일이 영접시켰다. 그리고 미리 가지고 간 옷과 선교비를 전달했다. 밤 10시 생방송이 진행되는데 그들은 창이 긴 모자를 눌러쓰고 색깔 있는 선글라스를 쓰고 남한에 있는 혈육을 찾는다고 말하며 제발 도움을 좀 달라고 울부짖고 절규했다.
나는 방송이 진행되는 한 시간 동안 그들의 생방송을 지켜보고 난 뒤 다시 한 번 방송이 끝난 한 사람 한 사람을 빈방으로 데리고 가서 손을 잡고 기도해주고 ‘부디 믿음 생활 잘하고 힘들고 어렵겠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전했다. 방송이 끝나자 우리는 서로 각자 헤어졌다. 혹시도 모를 위협한 일이 닥칠지도 모르는 일이였기에…….
그 다음날 낮엔 또 다른 국경지대도 농촌 마을을 찾아갔다. 역시 조선족 가정에 며칠 전에 건너왔다는 두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남루한 옷에 깡마른 얼굴과 몸으로 눈만 휑하니 그냥 보기에도 영양실조에 건너 죽어가는 사람이었다. 나는 복음을 전하고 입었던 외투도 벗어주고 선교비를 전달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북한 쪽에는 산이라는 산은 다 민둥산이었다. 굶주림이 극에 달하니 산꼭대기까지 밭을 만들어서 농사를 짓는다. 나무가 없으니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홍수가 날 수 밖에 없다. 그날 밤 공항 옆의 어느 농가에 북에서 넘어온 가족 3명이 있다하여 가서 만났다. 부부와 아들 세 사람이었다. 조선족 집의 방한 칸을 빌려 세 식구가 살고 있었는데 옷가지 몇 점과 냄비, 숟가락이 살림의 전부였다. 나는 그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옷과 선교비를 전달했는데 3년 전 서울에서 그 일가족을 만났다.
그 분들은 가장 어려울 때 내가 찾아와서 100불의 돈과 입고 온 가죽옷을 벗어주고 갔다며 평생 잊을 수 없다고 말하며 합숙훈련에 들어왔다. 감사한 일이었다. 가장 어렵고 힘든 상황에 빠져있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쓰임 받았으니 감사했다.
1999년 2월 20일 SBS TV의 ‘그것이 알고 싶다’는 프로에 ‘꽃제비들의 강타기’라는 프로가 방송되었는데 내가 복음 전하고 영접시키는 것은 다 빼고 옷과 식량과 의약품 같은 것을 도와주는 장면이 소개되었다. 벌써 14여년 가량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축복 전달자로 전도자의 삶을 실현시키고 있다.
▲국경마을을 걷고 있는 우리 일행들
/북한선교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