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Mission’ 故 ‘조동진 목사’
한국교회의 선교를 논할 때 조동진 목사를 빼 놓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피선교국이었던 대한민국이 선교국으로 탈바꿈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전략가요 동원가이자 실천가였다. 조 목사의 선교적 공로는 비단 한국교회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를 통해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제3세계의 교회들이 자립적으로 선교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서구권 교회들도 조 목사가 있기 전까지는 선교가 오직 그들만의 전유물처럼 인식했다. 조 목사는 확실히 랄프 윈터 박사와 대비할 수 있는 비서구권의 선교적 대표주자였다. 신기하게도 두 사람의 출생은 1924년 동갑내기였다. 이제 두 영적 거인은 세상을 떠나고 없다. 하지만 그 분들이 창안해놓은 저술이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그 문건 속에는 선교에 대한 방향과 전략 등 옥구슬 같은 내용들이 담겨있다. Covid19 영향으로 세계선교의 수레바퀴가 멈춰 있듯 한 이때 제 2, 3의 선교전략가들이 출현해 선임자들의 맥을 이으며 발전적으로 승화시키기를 기대한다.
현대선교에 있어서 탁월한 전략가 2명이 있었다. 서구권의 Dr. Ralph D. Winter와 비서구권의 Dr. 조동진 목사였다.
조 목사는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제3세계의 선교적 빗장을 열어 제쳤다.
1. Mr. Mission의 호칭
1950년대는 선교학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때였다. 조 목사는 1956년 8월 전도와 선교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에 갔다. 먼저 바링턴 대학과 베다니 대학에서 수학하신 후 1959년 미국 켄터키 주의 애즈베리 신학교(Asbury Theological Seminary)에 선교학 석사과정을 신청했다. 그때 선교학은 역사학부에 속해 있었다. 그는 역사학 부장교수 앞에서 면접을 했다. 그가 전공계획을 설명하자 “동양인이 왜 선교학을 전공하려고 하는가?” 물었다. 이에 “선교는 백인들만의 일인가?”고 되물었다. 담당교수는 “그것을 몰라서 묻는가?” 라는 눈초리로 위아래를 흩어보다가 마지못해 신청한 과목에 사인을 해주었다. 부장교수는 학위를 마칠 때까지 조 목사를 괴롭게 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81년 애즈베리 신학교의 교수회의에서 조동진 목사를 “제3세계 선교의 기수”라고 칭찬했다. 나아가 그에게 “Mr. Mission”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여기 일화에서 보듯 20세기 전반까지 서구교회는 선교를 그들만의 몫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 목사는 아시아와 아프리카교회가 조만간 세계 복음화의 주역으로 떠오를 것이라 내다봤다.
2. 조동진 목사의 생애
조 목사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생후2달도 안 되어 유아세례를 받은 나는 헌금 한 푼도 깨끗이 종이에 싸서 바치게 하던 어머니, 무릎을 꿇고만 기도하게 하던 아버지, 밤마다 성경을 암송하고서야 자리에 들게 하시던 부모님,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못하게 하시던 아버지,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던 어머니, 나는 이처럼 조금도 마음을 밖으로 돌릴 여유를 주지 않으시던 부모님의 철저한 청교도적 교육 영향 아래서 내 성격이 형성되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세상으로 나간 목사” p.341).
조 목사는 1924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조덕천이다.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에즈베리신학교 대학원(석사), 윌리엄캐리대학교 대학원(박사)을 졸업했다. 그는 후암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던 중 선교사역을 전념하기 위해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선교에 매진했다. 그는 금년 작고하기까지 60년간 한국 선교와 제3세계 교회가 선교적으로 거듭나도록 혼신의 힘을 다 하였다.
조동진 목사는 2020년 6월 19일 오전 이 땅에서의 과업을 마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향년 97세였다.
3. 공로
그는 선교적 열정으로 1961년 한국교회 최초로 선교학을 총회신학교에 선택과목 교과과정으로 설치했다. 1963년 국내 최초로 선교대학원인 동서선교 연구개발원(EWC)을 세웠고, 같은 해 초교파 세계선교단체인 국제선교협력기구(KIM)을 설립해 1500여명의 선교사를 양성했다. 또한 1973년에는 아시아선교협의회(AMA) 창립을 주도했으며,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복음화국제대회' 전체회의 '선교 구조의 쇄신' 강사였다. 1988년에는 제3세계선교협의회(EWC)를 설립해 1995년까지 회장으로 섬겼으며 말년에는 ‘조동진선교학연구소’를 설립했다.
고인은 1999년 만 75세 되던 해에 그가 설립한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월문리 '바울의집'을 예장합동 총회세계선교회(GMS)에 헌납한 후 은퇴하고 모든 선교 공직에서 물러났다. GMS는 이 같은 고인의 선교에 대한 공로를 기리고 후학들과 후배 선교사들을 위하여 지난 2009년 5월 8일 GMS선교센터 내에 '조동진 선교기념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4. 주된 사상
조 목사는 한국교회가 계승 발전해야 할 사항으로 첫째는 사도적 DNA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초기 대부흥의 뿌리가 된 것도 사도적 DNA가 있었기 때문이고 1912년 중국 산동선교의 역사적 배경에도 사도적 DNA를 찾을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현대 선교학이 왜곡시켜 놓은 메시지를 고쳐 사도적 DNA가 계속 이어져야 함을 강조했다(제7회 KWMC 선교대회).
둘째, 하나님의 왕국(God’s Kingdom)을 위한 선교를 하라는 것이다. 서구선교의 일방 통행적 선교와 한 국가에 안주하면서 자기 왕국을 건설하여온 것은 성서적 선교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식민지 세계관에 의한 선교구조를 갱신하기 위해 “쌍방통행적 선교”와 “광역선교”라는 모델을 주장했다(Ibid., pp. 328-328).
셋째, 현지 문화와 백성들을 존중하고 배우는 자세로 임하라는 것이다. 선교사가 그 나라 민족과 동일시되는 것을 꺼리고 차별화되기를 바라는 것이 선교 실패의 원인이라는 것이다(Ibid.,p.216).
넷째, 돈으로 선교하지 말고 사랑으로 선교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선교가 어느 사이에 자기 선교가 되고 하나님나라 사업도 자기 사업으로 변하고 있음을 우려했다(Ibid., p.337).
5. 마지막 염원
조 목사의 고향은 평안북도 용천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북녘 땅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의 마지막 경주는 북한의 소멸된 교회들의 그루터기를 소생시켜 민족의 교회로 되살리는 것을 보는 일이었다. 옛날에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일컫던 평양과 고향 산천에는 3,000여 교회와 30만 신도가 있었다. 헌데 명성은 어디가고 지금은 그 숱한 교회들의 옛 터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그는1989년이래 24회나 북한을 방문했다. 김일성 주석과 세 차례에 걸친 단독회담도 가졌다. 또한 김일성종합대학교 종교학교의 초빙교수와 평양신학원의 방문교수로 임명되었다.
이처럼 조 목사는 통일선교를 위해 열정적으로 힘을 보탰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는 조국통일을 보지 못하고 이제 세상을 떠났다. 북한 땅을 바라보며 조국통일을 염원하던 그의 한(恨)이 언제나 이루어지려나?
맺음 말
조동진 목사는 우직하다고 비난받을 만큼 흔들리지 않고 세계선교를 위한 한 길을 달려왔다. 그 헌신으로 인하여 한국과 제3세계 교회는 선교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에게도 카리스마가 너무 강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없지 않다. 그러나 과(過)는 공로에 대비할 때 크게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교회 선교의 대부이자 선구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가 없었다면 서구교회 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선교의 틀을 누가 깰 수 있었을까?
조 목사는 이제 소임을 마치고 주님 품에 안겼다. 그가 노후에 한 고백이 마음에 다가온다. “나는 날마다 바울의 집 동산에 우뚝 솟은 하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이곳 바울의 집 언덕위에 홀로 앉아 있어도 절대로 고독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여한이 없는 나의 삶의 발자취 때문일까? 지구상 도처에 흩어져 있는 선교 후예들의 사랑과 기도 때문일까.”/ 송종록 목사 (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