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목동 인근 법당에서 무속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김인숙 전도사(왼쪽)와 무속 전도캠프팀
“예수께서 열두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눅 9:1)
김인숙 전도사는 오늘도 무속현장에서 7년째 전도하고 있다. 김 전도사는 서울 예원교회(정은주 목사)에서 무속전문교회 전도사로 섬기는 중이다.
∎김 전도사의 언약 여정
김전도사는 전북 완주군 조촌면 신정리가 고향이다. 1남 7녀를 둔 다복한 가정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들이 귀했던 집안이라 할머니는 손녀딸 7명을 출산 때 마다 정한수를 떠놓고 비는 모습, 초하룻날 떡 시루를 쪄놓고 비는 모습과 앞 동네 흰 치마저고리를 입은 점쟁이가 가끔씩 와서 할머니와 이야기 나누는 모습, 저녁이면 볕 짚으로 불태우며 소금을 한 주먹씩 뿌리며 대나무를 흔들고 불태우는 다양한 미신행위를 많이 목격하였다. 그 덕분이지 할머님의 소원인 3대 독자를 품에 안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점쟁이 외동아들이 동네 저수지에 익사하여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얼마 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점쟁이는 집 근처 기찻길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어렸던 김 전도사는 “아~왜 그럴까? 남의 집에는 경사로운 일을 가져다주었는데 저 점쟁이는 왜 안타까운 사건이 생기는 걸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초등학교시절 바로 위의 언니(김현숙 목사)가 중학교 때부터 교회에 다니고 있었고, 언니와 달리 김 전도사는 아무런 종교활동이나 모임 등을 하지 않고,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자연스럽게 서울의 작은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후로 이렇다 할 사건 없이 무난한 학창 시절을 보냈고 의상실을 운영하시는 작은댁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1남 2녀를 출산하였고 압구정에서 의류 사업을 하는 남편의 일을 도우며 평범한 결혼생활을 누렸다. 그러던 중 IMF가 터지면서 남편의 사업도 당연히 무너지게 되었다. 어린 자녀들과 힘든 가정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다가오게 되었고 그것이 김 전도사를 생활고와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게 했던 고난의 시간이라고 떠올려진다. 가장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큰언니(김현숙 목사, 예원교회 시니어 담당 목사)에게서 복음을 들었을 때 김 전도사는 마음에 큰 감동과 깨달음을 얻고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1년 동안 언니와 다락방을 통해 성경말씀과 복음을 더 깊이 알게 되었고 예원교회에 등록을 하면서 김 전도사의 신앙생활은 시작되었다. 1998년 8월 부산 다락방전도훈련 1차 합숙을 통해 인생의 해답을 얻고 그 길로 전도지를 들고 전도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25년 전부터 눈에 무속 깃발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결박 받고 떠나가라”하며 전도의 문이 열리게 해달라고 집중기도 하고 다녔는데 무속 사역을 전혀 할 줄 몰랐는데 7년 전부터 교회에 무속전도캠프팀이 구성되며 본격적인 무속인 나섰다. 그 때 첫 만남이 공 보살( 현재 공정숙 집사)를 만났다.
∎공 보살 가정이 그리스도의 품으로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온 공정숙 집사와 김인숙 전도사
공정숙 씨는 5살 무렵 귀신이 보이고 시달리는 신병에(아무 이유 없이 머리가 아프고 여기저기가 아픔) 걸려 아버지께서 눌림 굿을 매년마다 수시로 해주셨다. 결혼 후에도 시달림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직접 운영하고 있던 치킨집으로 신 엄마가 찾아와 신 내림을 받았다. 신 내림 후 10년 동안 집을 떠나 아이들과 헤어져 이곳저곳으로 기도하러 다니고 때때로 청배(남의 굿판에 가서 굳은 일을 하며 일당을 받음)를 다니기도 하였다. 그 후 본격적인 무속인의 생활은 5년 정도 했다. 그러던 중 홀로 아이들을 키우던 남편마저 큰아이가 고3 무렵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무속 활동으로는 생계유지가 어려워 알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공 보살은 매일같이 술로 의지하며 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둘째 딸 수진이가 대물림으로 인하여 어릴 적부터 귀신이 보이며 시달리는 등 온갖 사단 장난에 힘들어하였다. 엄마는 자녀 양육에 힘에 부쳐 날로 술에 의지하여 살았고 수시로 자녀들에게 폭언과 손찌검하기가 일쑤였다. 그럼에도 수진이는 교회에 다니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열심히 다녔다.
그러던 중 2017년 수진이가 고등학교 때, 당시 예원교회에 다니시며, 수진이를 전도한 담임 선생님께서 엄마의 직업이 무엇인지 물어보셨고 이에 수진이는 “우리 엄마는 무속인입니다. 전도해주세요”라는 답을 하였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김인숙 전도사님을 소개하여 전도하려 했으나 무속인인 엄마는 강력하게 거부하였다. 김 전도사가 첫 방문 했을 때 법당은 매우 허술했고 앉을 자리조차 없었으며 말 그대로 난장판 그 자체였다. 김 전도사 팀이 직접 청소하고 자리를 마련하여 전도하려 했지만, 엄마는 심하게 거부하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수진이 엄마는 계속 핍박과 폭언을 하고, 재수 없다며 소금을 뿌리면서 거부하였으나, 김 전도사는 전도하기 위해 매일 법당을 찾아가 예배를 드렸다. 전도 캠프팀은 매일 쉬지 않고 방문하였고 수진이에게 엄마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회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님을 모시고 횟집으로 가기도 하였다. 수진이 엄마는 3시간 동안 소주 3병을 마시면서 본인 이야기만 2시간 50분 동안 하였다. 이 과정이 7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일 아침 전화 한 통이 왔다. “우리 딸 수진이 찾아내라. 그럴 거면 교회에서 데리고 살아라!”라며 험한 욕을 거침없이 퍼부어 댔다. 같은 날 예배 중에 수진이 엄마에게서 또 한번의 전화가 왔다. “수진이가 지금 홍대에서 쓰러져 원자력병원 중환자실에 있으니 김 전도사님이 같이 가주었으면 좋겠다.”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김 전도사는 속으로 ”왜 나한테 전화해서 도움을 청하지?“라는 얄미운 마음도 들었지만 수진이 엄마를 만나 병원으로 향했고 도착해서 보니 수진이는 중환자실에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온몸은 마치 노숙자처럼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김 전도사는 너무 당황했고 순간 무슨 사건인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따듯한 물로 수건을 적셔 수진이의 몸을 구석구석 닦아주고 눈물로 기도하며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수진이가 후대라면서요? 이 가정에 하나님의 제자가 있다면서요.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2시간 30분을 너무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을 때 수진이의 왼팔이 쭉 뻗어지고 입에서는 이물질을 토해내면서 수진이가 눈을 떴다. 김 전도사는 감동과 감사 기쁨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 후 수진이는 명지대 병원으로 옮겼고, 그날 병문안을 간 무속 전도 캠프팀에게 수진이의 엄마는 법당을 철거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전도 캠프팀이 직접 법당철거를 하면서 동시에 수진이 엄마는 예원교회 등록하게 되었다.
▴법당 철거 사진
그리고 수진이 엄마인 공보살은 예원교회의 ◌◌◌장로가 운영하는 ”참진푸드“에 입사하면서 예원교회에 정착이 되었고 성가대 헌신과 무속 전문교회의 산업 총무로 직분을 감당하고 있다.
▴성가대에서 찬양으로 헌신하는 공정숙 집사
또한 하나님께서 장막까지 주셔서 좋은 환경을 누리며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축복까지 받았다. 아들인 박◌◌이는 예원교회 청년부 예배에서 은혜를 받고 있다.
한편, 예원교회 ‘무속전도캠프팀’은 강단 말씀을 언약으로 붙잡고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살리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치유하고 살리는 여정을 지속하고 있다.
▴무속인 현장을 찾은 무속전도캠프팀
“지역에는 견고한 진이 있다. 그 진을 무너뜨리는 영적 싸움을 해라. 그래야 전도가 되어진다.”라는 목사님의 말씀을 언약으로 잡았다. 그 후로 만나는 모든 사람이 전도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까지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지금의 무속 전도 캠프의 여정을 7년째 진행하게 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사단의 종노릇 하는 자들을 구원하시라고 나를 보내신 주님의 은혜라 확신한다.”고 고백한다. 김인숙 전도사의 무속인 전도이야기는 다음호에 계속된다. / 윤광식 기자(kidok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