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어머니 '새문안교회' 현 예배당, 역사 속으로

큰 교회보다 바른교회, 섬기는 교회 사역 감당해와

2014-07-08 11:19:44  인쇄하기


1887년 故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담임 이수영 목사)가 지난 6월 29일 그동안 사용했던 예배당에서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리고 본격적인 새성전 건축에 들어간다.

▲좌측은 새문안교회의 새성전 조감도, 우측은 1910년도 새문안교회 부근 사진 전경

이는 새 성전 건축에 따른 것으로, 교회는 7월부터 본격 공사에 들어가 오는 2017년 지상 13층, 지하 4층 규모의 성전을 완공할 예정이다. 지난 1972년 교회 설립 85주년을 기념해 세운 현 예배당은 곧 헐리게 된다.

이수영 목사는 29일 주일예배 설교를 통해 “마지막으로 예배를 드리는 이 성전은 지난 40년 동안 그 역할과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며 “우리의 예배의 처소로서, 기도의 자리로서 마음의 고향이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현 상태를 유지하기만 원하는 교회는 결코 현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며 “그런 교회는 줄어들고 줄어들다가 없어질 수도 있다. 원대한 비전과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하는 교회에 하나님께서는 함께하시며, 놀라운 은혜를 베푸셔서 현 상태를 넘어서서 성장하게 하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정든 옛 성전과 결별하는 것은 그저 크고 아름다운 새 성전을 갖고자 해서가 아니라, 새 시대에 더 큰 사명을 감당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한 것”이라며 “새로 세울 성전을 통해 더 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를 간구한다”고 전했다.

한편 교회는 오는 7월 6일부터 새 성전이 완공될 때까지 언더우드교육관과 광화문빌딩에서 주일예배를 드릴 예정이다.

다음은 한국교회사에서 새문안교회의 의미를 되새기며 새문안교회사를 살펴보고자한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정동교회 탄생
1885년, 미국북장로회의 파송을 받은 언더우드(H. G. Underwood) 선교사가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다. 처음 2년 간 한국어를 공부하며, 선교활동을 모색하던 언더우드는 1887년 9월 27일 저녁, 자택인 서울 장안 정동에 위치한 한옥에서 세례교인 14명과 로스 목사가 참석한 가운데 교회 창립 모임을 가진다. 10월 2일에는 언더우드가 두 명의 장로를 안수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정동교회가 탄생하게 된다. 설립 당시에는 지역의 이름을 따 정동교회, 혹은 정동예배당이라 불렀다. 이교회가 새문안교회 전신이다.

<새문안교회100년사>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한국에서 처음 설립된 교회는 황해도 소래교회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회 중 ‘조직교회’로서 첫 교회는 새문안교회다. 처음 교회를 구성한 14명 중 13명의 교인은 서울 교인이 아니었다. 황해도 소래 지역과 여타 다른 지방에서 올라와 언더우드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들로 출발했다. 새문안교회가 자칭 타칭 한국 교회의 ‘어머니 교회’라 불리는 것도 창립 당시 교회 구성원의 성격으로 보아 단순히 서울이라는 지역의 교회나 개교회로만 볼 수 없다는 데 있다. 
 
◆새문안교회 탄생
정동교회는 창립 2년 만에 교인수가 100여 명에 달하는 등 급성장을 한다. 예배당 건축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한국 교인들의 힘으로 예배당 건축을 해야 했다. 건축비 조달은 힘들었다. 그러나 그해 여름 콜레라가 전국을 휩쓸면서 건축비를 마련하게 된다. 의료 선교사인 에비스과 웰즈가 서대문 밖에서 정부의 도움으로 진료 수용소를 마련하고 치료를 했다. 언더우드 부부는 이 일을 도왔다. 정동교회 교인들도 덩달아 간호와 구호활동을 적극적으로 도맡아 했다. 이런 교인들의 헌신적인 봉사활동에 감동받은 조선 정부는 약값 외에 교인들의 인건비도 내주었다. 이 때 받은 인건비가 건축헌금으로 연결되었다.
예배당 헌당식은 1895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언더우드 사택의 사랑채를 빌려 사용하던 8년을 청산하고 한국 교인들이 자립적으로 마련한 첫 번째 성전이었다. 이 예배당의 위치가 서대문 안이었다. 이때부터 교회의 이름이 새문안교회로 정착되어갔다. 
 
◆1910년대에 1,200명 수용하는 교회, 도산 안창호 배출
1902년 언더우드 목사가 안식년 휴가를 얻어 본국에 돌아가 장기간 교회를 비운 사이 교회는 매우 침체되었다. 교인의 증가도 없었고 성만찬도 18개월 동안 1회 정도밖에 없었다. 목회적 관심의 부재라는 표면적 이유에 교인들이 한국인 지도자를 원한다는 내면적인 이유가 더해졌다. 1892년 이후로는 교회창립 당시 선임된 두 장로가 치리를 받아 그 중 한 명은 출교까지 당한 이후로 한국인 당회원이 없던 차였다. 이런 교인들의 바람을 담아 송순명이 1904년 장로로 장립되었고, 한국인 장로가 참가한 당회가 조직된다. 당시 송순명 장로가 개심시킨 사람 중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도 있다. 후에 안창호는 송순명과 함께 영신학교의 접장(선생)이 되어 3년간 활동하기도 했다.

1896년 교인수가 늘자 다시 성전건축 문제가 논의되었고, 계획한 지 15년이 지난 1910년 5월 29일 지금의 교회 위치에 예배당을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1,200명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서울 장안에서 가장 큰 예배당이 세워졌다. 헌당식 순서에는 새문안의 ‘연합정신(에큐메니칼)’이 잘 드러나 있다. 장로교·감리교 등 교파를 초월해 헌당식 예배순서를 맡았으며, 한국인 목사와 외국인 선교사가 순서를 고르게 나눠 맡았다.

◆ 격랑의 한국 역사와 함께한 새문안교회  
새문안교회를 비롯한 한국 교회는 1900년대 들어 정치 사회적으로 어려워지던 시기를 교회의 내적 정비와 발전의 전기로 승화시켜 나갔다. 대표적인 예로 독로회(獨老會) 결성을 들 수 있다.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최초의 노회가 결성됐다. 이 자리에서 그 해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서경조,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등 7인에게 최초의 한국인 목사 안수식이 거행됐다. 한 해 뒤에는 이날 안수 받았던 서경조 목사가 언더우드 목사의 동사(협동)목사로 새문안교회의 첫 한인 목사가 된다.

1913년 서경조 목사의 사임과 1916년 10월, 언더우드 목사의 사망으로 잠시 쿤스(E.W.Koons) 목사가 시무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차재명 목사가 2대 담임목사가 되어 한국인 담임목사 시대를 열었다. 1944년 2월 3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김영주 목사는 1945년 해방을 맞아 교회 재건을 위해 애쓰던 중 6·25 전쟁 중에 납북되었다.

1955년 12월, 4대 담임목사로 강신명 목사가 부임하면서 안으로 교회가 부흥하고 밖으로 농촌근로봉사활동과 의료선교 활동 및 도시야학운동을 추진하는 등 새문안의 위상이 높아졌다. 1957년에는 새문안교회 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그 중 오늘날까지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강좌가 바로 당대 한국 최고의 기독교 지성과 신학자들을 초청한 가운데 치른 언더우드 학술강좌다. 1958년에는 한국 개교회 역사서 가운데 최초인 <새문안교회70년사>를 발간했다.

강신명 목사의 눈에 띄는 업적 가운데 하나는 교회연합운동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1965년 4월 당회는 경기노회에, 분열된 한국 교회의 재일치를 호소하는 건의서를 올렸다. 즉, 장로교회만이라도 통합을 전제로 장로교연맹을 조직할 것을 건의했다. 이 헌의는 총회에서도 받아들여져 장로회연맹 결성을 위한 추진위원회를 구성했고 그에 앞선 협의 기구로 우선 장로교협의회의를 구성하는 선에서 합의를 보는 성과가 있었다. 1967년 9월, 교회 설립자이자 한국인의 벗이 되어주었던 그리스도의 종 언더우드 일가를 기념해 언더우드기념관을 준공했다. 교인 수가 크게 늘자 1972년 11월, 현재의 교회당을 신축했다.

1981년 4월, 5대 담임목사로 김동익 목사가 부임했다. 1987년 9월, 교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조준형 목사를 태국 선교사로 파송했다. 새문안 수양관 건립과 새진도교회, 새온교회 개척이 있었다. <새문안교회 문헌사료집>을 발간하고, 1995년에는 <새문안교회 100년>를 간행했다. 1998년에는 언더우드 기념 교회음악교육원 개원, 동작이수사회복지관 운영, 한·태선교관 헌당(태국, 치앙마이) 등의 행사가 연달아 있었고, 같은 해 4월, 김동익 목사가 별세했다.

◆창립 70주년을 맞아 증축한 예배당 모형(1957) 
2000년 9월, 6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수영 목사는 “120년 된 교회는 다른 어느 교회보다 더 많은 세월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그만큼 많이 받았다는 뜻이다. 그 은혜를 온 민족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초대형교회는 아닌데 초대형교회 같이 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역량의 한도 내에서 무엇을 하든지 바르게 하자. 한국 교회의 본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 목회방침이다.”라고 말한다.

십년 전 교회음악 교육원을 세우고 지휘자, 오르가니스트, 찬양대원들에게 바른 예배가 무엇인지 예배음악이 무엇인지 교회음악에 대한 바른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한국 교회 전체 교회들이 예배가 바로 서도록 돕는 일도 한국 교회를 위한 사역의 일환이다. 120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족한 교사교육원도 같은 맥락이다. 교회 미래는 교육에 달렸다고 보고, 교사교육을 위한 최선의 커리큘럼을 마련해서 각 과목마다 국내 최고의 전문가를 강사로 최고의 교사 양성교육과정을 제공한다. 교회와 교파를 초월해서 모든 교회에 양질의 교사들이 많아짐으로써 교회교육과 교회의 미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다.

섬김을 실천하기 위해 서울시립서대문종합노인 사회복지관과 종로종합사회복지관을 위탁 운영하고 있다. 일교인 일봉사직 갖기 운동을 통해 새문안 교인이라면 교회 밖의 봉사직을 하나라도 갖도록 하는 캠페인이다.
또 선교사들에게 진 선교의 빚을 갚기 위해 다섯 가정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현지인을 교육해 미래의 지도자로 설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이밖에도 창립 120주년 기념사업으로 시각장애인 120명에게 개안수술비 지원과 가족음악회 등 다양하고 의미 있는 기념사업들을 펼치고 있다.

큰 교회가 되려 하기보다 바른 교회, 섬기는 교회가 되기 위해 모(母)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새문안교회는 한국 교회 전체를 위한 사역에 중점을 두고 실천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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